할마씨.
이장네 다녀오다가 슬쩍 넘어졌어. 당신 보고 있었나? 이 망할놈의 자전거가 고 째끄만 돌 하나를 못 넘고 덜컥 하더니 휙 쓰러지는 거야. 에이, 팔꿈치가 좀 까졌는데, 그것보다도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몇십년을 다닌 길인데 창피하게 거기서 넘어지나 그래. 할마씨 타박이 들리는 것 같던데, 맞지? 영감탱이 나이 팔십을 똥구멍으로 먹었나 욕 했을거야.
혼자 다니는데 뭐하러 기름 쓰며 경운기를 타나 싶었어. 손주보다도 나이를 더 먹은 고물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가 그 꼴이 났지 뭐야. 오랜만에 타서 그런가.. 손에 잘 안 익고 왜 그게 그렇게 무거워졌는지. 그만 고물상에 갖다 줘야지 못 쓰겠어. 그놈의 거, 당신 말대로 이제는 대문턱 넘기기도 힘들어. 백날 기름칠 해 봐야 삐그덕빼그덕.. 나 고물입니다, 동네방네 다 들리지. 나처럼 말이야, 우리처럼.
온 군데가 다 아파 여기저기 시내 병원까지 찾아갔을때, 훤칠하니 잘 생긴 의사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나? 할아버지, 집에 텔레비 몇년 되었어요? 얼마 안되었지, 한 십년 넘었나? 그 전에 쓰던거는요? 한 15년 쓰고 고장나서 버렸어. 무겁고 두껍고.. 사람도 같애요. 팔십년 썼는데 여기저기 고장인게 당연하죠. 이제는 그려러니 하세요, 고장 안나는게 이상한 거에요...
어린 놈들은, 지들이 안 아파봐서 낄낄거리지. 괘씸하기보다는 서운해. 너도 나이 들어봐라... 그게 무슨 소용이야? 지들 나이 먹고 나면 나는 세상에 없는걸.. 아, 그때 할아버지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뒤늦게 알아주는 꼴을 볼 수나 있어? 시간은 정직하게 앞으로만 가지. 아쉬운 마음은 지가 알바 아니니 모른척이고... 미련없어 좋기도 하겠다만, 가끔은 말이야, 꿈에서라도 한번씩 젊은 시절에 왔다갔다 해봤으면 좋겠어.
할마씨 만났던 충주 장터에도 가보고 싶고, 사치호사가 왠말이냐 생략했던 결혼식도 해봤으면 하고.. 결혼식 대신에 사진관에서 찍었던 사진 말이야, 애들이 칼라로 다시 뽑아다 준거.. 스무살 어린 나이에 임자 찾았다고 뻐기느라고, 제법 어깨에 힘이 들어갔었잖아. 이렇게 죽을때까지 일만 하면서 애미애비로 살게 될 줄 모르고, 철없이 설레기만 했었어. 마땅한 기술 하나도 없이, 요즘말로 안정적인 직업도 없이.. 이해타산 따질 줄 모르고 그저 손에 들어오는 몇 천원에 행복했을거야.
천생연분이지? 당신이야 질색하겠지만, 하늘이 맺어줬다니까. 그렇게 연분이 깊어 아들딸 줄줄이 낳고 그 말도 안되는 고생길을 이태껏 같이 온거야. 하나가 벌면 하나가 키우고, 하나가 못 벌면 하나가 대신 나가 벌어오고.. 당신 닮아 순한 첫째가 묵묵히 동생들 건사하고, 나 닮아 지랄맞은 둘째 세째 두놈이 십원 한장 허투루 쓰지않고 싹 다 벌어 들였지. 못배워도, 못나도, 나는 우리 할마씨가 제일 든든했어.
아이들도 알거야. 내가 왜 그렇게 울고만 있었는지. 아무것도 못해준게 미안해서, 환자인 당신보다 내가 더 많이 기력이 없었다지. 눈만 껌뻑여도 살았구나, 오늘은 기분이 좋구나, 나를 알아보는구나 온갖 상상을 했어. 숨소리도 안내고 잠이 들면, 좋은 꿈 꾸시오, 꿈에서라도 나 한번 더 봐주시오, 아이들 말고, 손주들 말고.. 그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을 봐야한다면 꼭 한번은 나였기를.. 가기전에 잠깐만이라도 정신이 들어 인사 한 마디 해 주기를.
할마씨. 우리 전에 약속했던거, 당신 죽으면 나 혼자 못 산다, 나 데리고 가라.. 그거 왜 여직 안 지키나? 반토막만한 집이래도 당신 없으니 휑 하니 이렇게 커다랗고.. 쓰지않는 밥그릇이 아까워 내꺼에 한번, 당신꺼에 한번.. 번갈아가며 밥을 푼다네. 잘 차려먹고 어둡기 전에 치우려 싱크대 앞에 서면, 밥그릇 두개가 바가지 속에서 찰랑찰랑 사이좋게 앉아있지. 금테 다 벗겨진 부부 찻잔도 아침에 하나, 저녁에 하나.. 이걸 다 누구한테 줘야하나?
이름이라도 써 놓을 걸 그랬어. 당신이 몇번을 말했었는데, 이건 큰애 주고, 이건 작은 애 주고.. 다 버릴건데 누굴 주냐고 건성으로 들었었어. 혼자 남아 이 고물들을 보려니 자꾸 당신이 생각나. 애들도 그럴까? 지들이 먼저 이거 주세요, 저거 엄마꺼네... 그러면 좋으련만. 억지로 주는 것 같아 난 쉽지 않아. 당신이라면 어땠을까.
내가 먼저 갔으면, 할마씨는 야무지게 잘 처리 했을거야. 뚝딱뚝딱 집도 처분하고, 늘 돌아가고 싶어하던 강화도 어디쯤으로 훌훌 털고 갔겠지? 나도 진작에 갔을걸 말이야, 당신 있을때.. 둘이 방 한칸 얻어 살더라도 먼 바다 보며 살 걸 그랬어. 구경 한번 제대로 시켜준다 큰 소리 뻥뻥 치고는 고작 반나절 돌고 지쳐버렸었지. 허, 그러게 여행도 젊어서나 했어야지. 팔십에 못 할 걸, 칠십에는 왜 못했고, 육십에는 왜 안했을까.
몰랐어. 정말로 갈 줄 몰랐어. 남들 다 가는 그 길을, 당신은 갈 줄은 몰랐어. 시름시름 아프다고 짜증내서 미안해. 늙느라 그런 줄 알았지, 병이라고는 생각 안했어. 의사가, 자식이, 동네 사람들이 다 얘기해도, 설마설마.. 그러고만 있었어. 나을 수도 있잖아. 나아야 하고.. 살아야 하고.. 평생을 아파본적 없어서 그랬나, 누워만 있는 모습이 왜 그렇게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는지.
만만찮은 시골 살림을 척척 해내던 당신을 좀 칭찬해 줄걸 그랬어. 차례차례 도시로 떠나던 아이들 뒤로 허전했을 당신을, 수고했다, 고생했다 위로할 걸 그랬어. 아픈 몸 이끌고 간신히 흰밥 차려내던 내 할마씨를, 가만히 따뜻한 방 구석에 앉혀 놓고 죽이라도 한 숟갈 더 떠 먹일 걸 그랬어. 자식들 눈치 볼 필요없이, 마지막 가는 길에 손이라도 꼭 잡고 있을걸 그랬어..
비가 오네. 가뜩이나 흉물스레 녹슨 고물 자전거가 더 불쌍해 보이겠지. 그래도 질퍽한 흙마당에 물이 고이면, 사람 소리 줄어든 우리집도 제법 운치를 찾아. 누워만 있던 당신을 위해 한뼘만큼 열어놓던 방문을 기억하나? 방울방울 예쁘게 떨궈내던 처마끝은 안보여도, 촐싹촐싹 사방으로 부서지던 빗방울 소리에 혹시 눈이라도 한번 뜨려나 기대했었어.
들었으니 괜찮아. 눈 뜨지 않아도, 입 열지 않아도.. 내가 옆에 있는 거 알고 있었으니 괜찮아. 아무것도 해준거 없지만, 가는 길 지켜봤으니 괜찮아. 당신은, 평생 나한테 다 해줘놓고, 나 가는 길만 곁에서 못 봐주겠네. 괜찮아. 먼저 가서 나 기다리고 있을테니 그것도 괜찮아. 우리 할마씨는 길눈이 어두워 어차피 멀리 못 갔어. 조 앞에 가만히 앉아서, 참방참방 빗소리나 듣고 계시게. 고물탱이 자전거 멀리 가는 날, 나도 당신한테 갈거야.
할마씨 밥그릇 한번, 내 밥그릇 한번.
오늘 점심은 뭘 해 먹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