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눈코입이 녹아내린 것 처럼 끈끈한 액체가 흐르고, 배배 꼬인 신물에 오장육부가 쓰렸다. 두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아픈 기억…. 우리가 아무 사이 아니었던 것 처럼, 그 날 일도 아무일 아니었던 걸로, 그렇게 조용히 잊혀지고 싶었다.
솔직히 살면서 몇번쯤은, 식당이나 영화관, 아니면 아무데고 작은 길모퉁이 한 구석에서, 갑자기 그가 튀어나온다면 어떨까 상상은 했었다. 아마도 바짝 쪼그려 숨긴 몸으로, 그가 여전히 행복한지만 슬쩍 살폈을거다. 절대 얼굴 보는 일 없이 꽁꽁 숨어 사는 중이었는데… 숨죽이던 세월이 허망할 뿐이다.
이렇게 어이없게 만나다니 - 아니, 마주치다니. 2년을 숨어 짝사랑한것도 모자라,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헤집으며 무릎 꿇던 그 날이 아직도 수치스러운데, 하필 만삭의 거구가 되어 그를 마주칠 줄이야. 출산 전에 밥 한끼 사준다는 친구의 전화에 대충 아무거나 당겨 입은게 화근이다. 하긴, 차려 입을 옷도 없을 몸이긴 했다. 가까운 카페로 나갔다. 쉴틈없이 흐르는 땀방울을 연신 닦아내며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희정씨, 오랜만이에요!”
테이블에 자꾸 배가 닿아 삐뚜룸하니 앉았던 단정치 못함 때문은 아니었다. 퉁퉁해진 다리를 쩍 하니 벌리고 있던 어쩔수없는 무교양 때문도 아니다. 그를 알아보자마자 얼굴이 확 달아오른 이유는 바로… 10년은 족히 되었을것 같은 낡은 운동화였다. 임신 당뇨에 임신 중독… 하다하다 발등까지 빵빵하게 부어올라 어쩔수없이 신고 다니던 남편의 오래된 신발... 거지도 안 주워갈 시장표 노브랜드 운동화였다.
첫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절 간절 구구절절 온몸 바친 사랑도 아니었건만, 왜그리 숨고 싶던지. 아닌척 하기에는 너무 친한 사이처럼 나를 불렀고, 누군지 모르는 척 하기에는… 그는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설레는 목소리에 깔끔한 머리, 깔끔한 양복, 깔끔한 신발… 신발, 깔끔 신발...구두다. 먼지 하나 없이, 모래 한톨 없이.. 무균실에서 부화되어 방금 튀어나온 듯한 고가의 구두... 부끄러운 내 두 발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더 예뻐졌어요. 남편이 잘해주나봐요.”
“예에, 그냥 뭐.. 주임님은요? 외근 나오셨어요?”
“거래처 왔다가요. 커피 한잔 가지고 들어가려구요… 그럼, 말씀 나누세요.”
반듯하게 각을 세워 인사하고 돌아선다.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뒷모습도 차마 못보겠다. 잊었던 심장이 쿵쿵 요동친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카페 벽지를 본다... 하아… 머리카락이라도 헝클어졌을까 생뚱맞은 헛손질도 해본다. 마주앉은 세은이가 발로 툭툭 치더니 소리없이 입모양으로만 묻는다.
‘누구…??’
억지로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찌그러진 미간이 볼만했을거다. 나는 웃음으로 거짓말하지 못한다. 분명 티가 났을거다. 세은이가 또 남자 쪽을 보길래 이번에는 내가 발로 툭툭 쳤다.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만해. 쳐다도 보지마.’
‘뭐? 왜? 어쩌라고?’
진심 반, 장난 반으로 투닥거리는 사이, 남자가 커피를 받아들고 돌아선다. 가벼운 미소, 몸짓, 발걸음… 오랜만에 보는 봄바람 같은 남자… 커피가 뜨거운지 살짝쿵 컵에서 떨어져나온 기다란 손가락.. 그 손가락으로 살랑 내게 인사를 하며 지난다. 바보.. 배가 커 발딱 일어서지도 못하고, 힘에 벅찬 (무척 벅찼다!!) 모습으로 질펀하니 앉은채 또 그를 보냈다. 이렇게 뚱하게 무표정으로, 이렇게 무심하게, 이렇게 무겁도록...
“누군데?”
그가 문 밖으로 사라지자마자 세은이 재촉한다. 그제야 숨을 좀 쉰다.
“… 전에 일하던 백화점... 구 주임.”
“아, 그때 그 사람? 진짜 예쁘다!”
“예쁘긴, 남자가 뭘 예뻐?”
“예뻐서 좋아했잖아, 네가!! 너 그때 2층 명품관 오라는 것도 저 사람 때문에 안갔고.. 맞지? 그 사람이지”
기집애.. 머리도 나쁜 게 이런 건 다 기억한다.. 쓸데없이, 지난 일을.
***
첫번째 직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첫번째 보스였다.
“적당한 기회를 노리는 거야. 아직은 때가 아니거든. 지금은 관심없는 척, 철저하게 부하 직원으로만 옆에 있는 거야. 안전 거리를 두고 깍듯이 모시다가, 언제든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그때 확 들어가야지. 저런 남자가, 오히려 여자 많이 안 사귀어봤어. 허를 딱 찌르면 백프로 넘어간다. 기달려봐라, 언니가 진짜 으른 연애가 뭔지 보여준다.”
매장 왕언니가 마음에 두고있던, 솔직히, 함께 일하던 모든 싱글들의 마음마다 일정량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흔한 인기남이었다. 적당한 키에 표준어, 하얀 피부, 단정한 외모, 보통 대학, 간단한 외국어 두어개.. 그리고 총각.. 여기까지야 백화점 말단 관리직의 기본 중 기본이고, 모두가 비스무리한 와중에 그가 유독 돋보이던 건, 딱 한가지 때문이었다 - 구두 사랑.
그는 학생때부터 구두 매장에서 알바를 했다. 그 ‘아이들’을 너무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마치 자기 얼굴처럼, 스킨케어하듯 돌봤다고 했다. 대리점주의 강력한 추천으로 본사까지 올라갔고, 최고 알바생으로 뽑혀 장학금도 받았다. 나중에는 건실한 취준생 컨셉으로 신상품 광고 모델도 했는데, 그 사진은 회사 홈피에 최근까지도 남아있었다 (당연히 나도 한장^^;). 그 인연으로 쭈욱~~ 거기에 남아 열과 성을 다 해 구두를 지키는 중이었다. 그리고 억세게 운이 좋은 나는, 그가 지키는 그 아름다운 매장에서 첫 돈벌이를 시작했다.
매일매일이 감사한 출근이었다. 남여 차별이니뭐니 말이 많았어도, 분위기상 꼭 참석해야했던 메이크업 교육조차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더 예쁘게, 더 매력있게 보이고 싶었다. 간지러운 극존칭과 보는 사람도 불편한 90도 인사, 콧소리로 두 톤 올려주는 응대법까지, 군소리 하나 없이 차근차근 교육 받았다. 모든 고객을 그 사람이다 생각하며 정성을 들였다.
“희정씨, 귀걸이 바꿨네요.”
그는 다정하고, 자상하고, 친절했다. 출근하자마자, 첫 월급으로 새로 산 내 명품 귀걸이를 단번에 알아봤다. 너무 티나지 않게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기며 조금 많이 행복한 얼굴로 그를 향해 돌아섰다.
“예, 주임님. 이거요?”
아유ㅡ 예쁘긴요, 비싼 거 아니에요, 윗층에서 세일하길래.. 라는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많이는 아닌데, 규정보다 조금 길어요. 오늘은 괜찮고, 다음에는 쉬는 날에만 해요?”
“….?”
“데이트 갈 때 하면 예쁘겠어요. 잘 어울려요.”
“…!”
***
“그때 너 혼자 좋아하다 말았지? 슬쩍 말이라도 해보지 그랬어?”
세은이가 운을 뗀다.
“안하길 다행이지. 여자 많았어. 아니, 바람둥이라는게 아니라, 저 사람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았다고.”
“당연하겠지, 왜 아니겠어? 백화점이 또 워낙 여직원이 많잖아, 남자는 몇 안되고.. 속상했겠다, 눈앞에 두고 말도 못해보고.”
“그러게 말이다. 한살이라도 어렸을때 용기 내어볼걸.”
눈치가 없을까, 모른척이었나.. 아니면 여자들이 너무 많이 따라다녀 심드렁했나. 내 생각에도 그는 내게 (위로 같지만 다른 여자들에게도 절대!) 별 관심이 없었다. 여자들만 바글거려 불편했는지, 회식을 가도 늘 밥만 먹고 먼저 일어섰다.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이상한 종교라 술담배를 못한다, 본사 이사님 딸하고 사귄다, 게이라더라.. (어떤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꼭 옷 잘 입고 친절하고 예쁜 남자들을 그렇게 몰아가던 때가 있었다)
하다하다 재벌 3세라는 말도 있었다. 본사의 본사 (모기업)가 대기업이다보니, 그 외가쪽 누구라는 말도 있었고, 또 하필 성이 구씨다 보니 LG 구씨라는 헛된 꿈과 희망도 들려왔다. 믿을만한 이야기도 있긴 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취업 잘 한 성실한 젊은이이고, 경영 대학원을 준비하느라 퇴근후에는 시간이 없다.. 뭐 이정도라면 지지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대학원이 아니라 절에 들어가 고시공부를 한다고 해도 기다릴거였다.
식품 매장에 내려가 무심한척 집어드는 1+1 캔커피로 마음을 전했다. 나보다 많이 벌테니 비싼 건 생략하고, 안면근육에 잘 저장된 백화점 미소와 친절을 무기삼아 나름 선방하고 있었다.
“희정씨는 막내라 사랑 많이 받겠어요. 부모님이 예뻐하시죠?”
“어제 많이 마셨다고 다들 힘들어하던데, 늦지않게 잘 들어갔어요?”
“내가 할 게 하나도 없어요. 먼지 한 톨을 안 놓치네요.”
“희정씨는 못하는게 뭐에요? 예쁘지, 깔끔하지, 상냥하지.. 너무 완벽한데요?”
이만하면… 그도 내게, 직장 상사 이상으로 가깝다고 생각했다. 희망이 보였다. 그런데 어느날…!
“그, 새로 온 포터생 말인데요, 영업 시간에 매장에 자꾸 올라오는거, 희정씨 때문이죠?”
평소답지않게, 그가 머뭇거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포터생이라… 창고에서 매장으로, 혹은 손님 차량으로 왔다갔다 물건을 날라주는 알바생이다. 보통은 식품 매장이나 가구, 가전제품 쪽 콜이 많은데, 새로 온 어떤 놈이 자꾸 우리 층에서 왔다갔다 한다. 이노무 자슥.. 너 그러다 걸릴줄 알았다.
“처음이고 어린 친구니까, 좋아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좀 자제를 시키라는 말이 나와서요. 우리 층은 포터 쓸만큼 대량 주문이 없잖아요. 다른 직원들 보기에, 시간 날 때 마다 거의 여기 와있는 거 같다니까, 남자 친구한테 얘기 잘 해서..”
“남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동갑이라, 또래끼리 몆명이 같이 밥먹고 놀고.. 그냥 아는 애.. 에요..”
상당히 꼬질꼬질한 놈이다. 지는 알바라며 술값도 안내고 얻어먹기만 한다. 그런 놈을 남자 친구라니… 열심히 부정하는 나를 보며 그가, 웃고 있었다... 아, 그래요, 뭐 그런 얼굴..? 뭐지.. 저 의미심장한 눈빛은… 설마 지금 안도하는 거야? 그럼 질투? 아하, 대학생 알바가 나를 따라다니니 견제하는 거다…!
“그래요, 그럼 생각보다 간단하겠네요. 제가 얘기 할테니까, 희정씨는 못 들은 걸로 해줘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참나... 점잖은 척 하더니,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 연적을 물리치겠다? 그래, 확실히 주임님도 내게 마음이 있는거다.
***
“너, 남편도 거기서 만났다 그랬지?”
갑자기 생각난 듯, 세은이 물었다. 크흡… 아 우습다.. 남편… 그래, 남편이 있었다.
“백화점이 문제야, 돈 돌지, 화려하지, 예쁘지.. 순식간에 눈 돌아간다니까. 보이는 거 막 사고 싶고, 돈 쓰고 싶고.. 거기 세워놓고 보면, 사람도 그렇지 않아? 아무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고, 연애하고 싶고.. 일단 다른데보다 좀 꾸며 놓잖아.”
부정 할 수 없었다. 비록 노란 형광 조끼를 걸치고 돌돌이 철재 카트를 밀어도, 백화점 알바는 험한 일 하는 다른 노동 알바와는 달라보였다. 청바지도 안되고 문신도 안되고, 매장에서 땀을 흘리거나 음식물을 먹거나 핸드폰을 사용해도 안된다. 수염을 길러도 안되고, 옷은 매일 갈아입어야하며, 인사는 공손하게, 입꼬리는 올라가고 허리는 60도 내려가고, 짐을 싣고 트렁크를 닫을때도 쾅 소리나지 않게, 부드럽게 살짝 콩...
“야, 너네 주임은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냐?”
그날 저녁, 퇴근 후 모인 저녁 술자리에서 포터생이 툴툴거렸다.
“규정이잖아. 쓸데없이 왜 매장에 들락거려?”
“알바는 구경도 못해?”
“알바 조끼라도 벗어놓고 구경을 하던가. 구경을 했으면 뭐 하나 사던가.”
“미쳤냐? 얼마 번다고 거기서 구두를 사?”
“그러니까 오지마. 살거 아닌데 왜 와?”
“치사한 놈... 두고 봐, 내가 나중에 돈 벌면, 꼭 너네 주임한테 가서 구두 열 켤레 산다. 지가 뭔데 매장에 오지 말래?”
***
그가 본사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적어도 열명, 아니 한 다섯은 확실히 울었을거다. 나도 차라리 울고 싶었다. 이제 막 뭐라도 시작할 것 같았는데.. 저 부드러운 미소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제 회사 밖에서 당당히 만나도 된다는 기쁨에 머리가 바빠졌다. 이때다 싶었는지 다른 매장 여직원들이 줄줄이 선물을 들고 나타났다. 뻔했다. 넥타이, 넥타이 핀, 와이셔츠, 벨트, 스킨로션, 향수… 굴러넘쳐 발가락에 걸릴만큼 많을텐데, 딱 박스 사이즈를 보아하니 그거다. 그렇다면, 나는 뭔가 다른걸 준비해보자…
뭐가 좋을까… 며칠을 그것만 궁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생일대의, 전대미문의.. 짧은 사자성어를 모두 동원해서 가장 크고 엄청난, 최고의 이벤트를 짜냈다.
<밧데리가 없어서 전화 곧 꺼집니다. 오실때까지 양재역 3번 출구 **** 에서 기다릴께요>
핸드폰을 껐다. 이정도면 핵폭탄이다. 그는 취소도 안되는 약속을 지키러, 연락도 안되는 나를 만나러.. 아무도 모르는 우리집 앞 술집까지 제발로 찾아올거고, 나는 적당히 취해 있을거다. 당연히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해 집에 데려다 줄거고, 그러면 그 긴 밤을, 그 긴긴 밤 동안을 꼭 안고, 아니아니, 손을 꼭 잡고 마주 앉아 꼭꼭 숨겨놓은 진심을 전하리라. 나도 으른 연애를 보여줄테다..
시간이 흘렀다. 아주 한참 흘렀던 것 같다... 그리고 술도 많이 흘렀다. 더이상 무슨 맛인지 모를만큼 마셨을때, 그가 나타났다. 몇시였나.. 아직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의 얼굴, 빠른 걸음, 한쪽 귀가 막힌듯 웅웅 거림 속의 내 이름, 촛점은 잘 안 맞으면서도 눈에 확 들어오던 고급 구두. 반가움 반 (내 생각), 놀라움 반.. 너무 늦게 와 미안함으로 가득하던 진심어린 첫 마디..
“혼자 마셨어요? 이걸 다…?”
헤벌죽 웃었나보다. 반가움에 손짓한다는게 그만 손에 술잔을 들고 있었다는 걸 잊었다. 아니면 아마 술잔이 테이블 끝 어디… 팔꿈치 쯤에 있었을려나..? 아리까리 잘 기억 안나지만, 갑자기 술잔이 푸드득 혼자 날아가더니 쨍그랑… 유리가 사방에 튀었다. 그가 뛰어와 팔을 잡았다.
“이쪽으로 와요, 다쳐요..”
그는 평소에, 깔끔깔끔한 나를 많이 칭찬했었다.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매장, 쪼로록 줄 잘 맞춘 구두, 각도 잘 세운 가격표… 절대 오점을 남겨서는 안된다. 그의 마지막 날이라해도, 그건 우리의 첫 날이 될 감동스러운 역사이기에, 나의 정리정돈 솜씨를 뽐낼때다.. 그의 손을 뿌리치고 비틀비틀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향해 다가갔다. 혀가 꼬이지만, 정신은 정말 말짱했다.. (그랬을…거다..?)
“제가 치울께요, 주임님은 쩌어리 비키세요!”
“위험하다니까요..”
쪼그리고 앉으려는 순간이었는지, 이미 앉은 나를 당겨 일으키는 순간이었는지.. 고작 162 센티미터의 고도차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이 덤볐다. 올라왔다, 내려갔다, 찌그러졌다, 펴졌다, 늘어났다, 줄어들며.. 벌컥, 와르륵 주르륵, 그리고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았다. 혹시 나 빈혈..? 그러나 나는, 원래 몸이 가볍고, 빠르고, 균형 감각이 좋다. 수퍼 히어로처럼 번개같이 몸을 휘리릭 돌리며 집싸게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을 거다 (라고 믿는다). 절대 넘어지지 않은거다. 천천히 앉았다가 계획대로, 섹시하게 엎드린거다.
흐뭇하니 두 눈을 떴을때, 정지화면처럼, 코앞에 붙박이처럼 버티고 선 그의 구두가 보였다. 그가 하루에도 몇번씩 체크하는 소중한 ‘명품’ 구두. 장인의 손길만이 스친다는 박음선, 갓난 아기처럼 부드러운 가죽과 매끄러운 광택... 그걸 주르륵 훑고 내려가며 툭.. 툭.. 방울져 내리는 시큼한 액체... 뭐지? 아하, 그거네.. 아까 맨정신일때 뜯어먹은 고르곤졸라 치즈 덩어리와 잘근잘근 씹혀나간 살라미, 브로컬리 (혹은 아스파라거스?) 사체, 그리고 저기까지 튀어 나간 저 곰팡이 같이 생긴 놈은 이탈리안 소세지…?? 헤헤.. 아까는 따뜻해서 맛있던데, 먹고 나니 냄새가 별로다. 이 집 안주 영 못 쓰겠네...
“주임님, 왜.. 어째 오늘은 구두가 엄청 더럽은디..? 쪼까 딲아야 쓰겄는디. 아이구, 추접시럽게 이 꼴로 으째 회사를 댕겼쓰까...?”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나는 아주 낮고 겸손한 자세로 - 엎드려 포복으로 꾸역꾸역 기어 그에게 다가갔고, 두 손을 쭉 뻗어 구두를 덥썩 잡았으며, 그 냄새와 미끄러움에 치를 떨며 탈탈탈 손을 털다가, 그의 양복 바지를 단단히 움켜잡고 뽀드득하게 닦아냈다. 손가락 사이사이, 손바닥과 손등까지, 앞뒤로 싹 싹… 그가 인정한 대로 나는, 먼지 한 톨 놓치지 않는 완벽깔끔 그 자체니까.
***
다음날, 가뜩이나 그가 없어 슬픈 매장에 포터생 꼬질이가 나타났다. 전날 술에 기분도, 몸도 안좋았던 차에 그를 보니 짜증부터 올라왔다.
“뭐? 왜?”
“구두 사러 왔다. 6층 VIP 센터 정 과장님이 남자친구 꺼 하나 사오래.”
“와서 사지 왜 널 시켜?”
포터생은 퉁퉁 거리는 나를 본체만체하며 구두로 시선을 돌렸다.
“지나가다 만났어. 바쁜 것 같아서 내가 갖다 드린다 그랬어, 잘 아는 거라서… 이걸로 줘, 275.”
대충대충… 성의없이 제품번호를 확인했다. 사이즈를 찾으러 돌아서다 멈칫했다. 어라..?? 이 제품 275 면…? 찌질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영혼 메마른 걸걸한 목소리로 약 올리듯 읊는다.
“정 과장님 남자친구가, 어제 누가 구두에 엄청 토해가지고, 비싼 거.. 그걸 그냥 쓰레기 통에 버렸대. 그래서 똑같은걸로 선물하신대. 그 사람이 아끼던 거라고.. 뭐해, 얼른 찾아줘. 퇴근해야 돼.”
멍하니 넋이 나간 내가 어지간히 한심했는지, 꼴에 위로를 한다.
“야, 벌써 날 잡았댄다. 부부가 같이 근무하기 불편하니까, 구 주임이 한참전부터 전근 신청한거고... 바보야, 사귄지 엄청 오래됐대.”
친구라고 했다. 그냥!! 중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했었다…!!! 밥도 같이 먹고 친해보이길래 다들 그런가보다 했다. 모두를 속인거다.
이럴수가… 역시 서울의 남녀공학이 문제다. 범죄의 온상이다. 세상의 모든 부도덕, 불륜, 치정, 사기와 공갈이 난무하는..! 게다가 VIP 팀 정혜미 과장이라니! 하긴, 불여시처럼 살살 웃는 게, 거짓말 엄청 잘 하게 생겼다. 그러니 실적이 좋겠지. 사람이고 물건이고.. 다들 번지르르한 겉모습에만 팔려 정신 못차리는거다.
“슬프냐? 끝나고 술 한잔 할래? 내가 구두는 못 사줘도 소주는 사 줄수 있는데.”
***
세은이와 헤어져 버스를 기다린다. 남편에게 전화건다.
“야! 돈 벌면 구두 열 켤레 산다며 왜 아직도 안 사? 네꺼 이거 운동화 버리고, 구두 산다.”
“애부터 낳고 사야지. 발 다 땡땡 부어서 아픈데 무슨 구두를 사?”
“내 꺼 말고 네 꺼. 애 아빠 되는데 꼬질꼬질하게 댕기지 말고 좀!”
옆 가게 유리창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본다. 두툼하니 곰발바닥 같이 못난 운동화가 보인다. 아직 아이 낳고 두어달은 충분히, 더 신을거다. 언제부터인가.. 가끔은 꼬질 맞은 게 편안해졌다. 누구처럼, 발에 꼭 맞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