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집애… 어쩜 이렇게 지만 아는지 몰라.”
씩씩거리며 화를 참아내는 아내를 안보는 척, 들키지 않게 눈 끝으로 슬쩍.. 봤다. 딸아이다.. 또 딸이랑 싸웠구나 싶다. 며느리에게는 세상 온화한 미소를 다 쏟아내는 사람이, 어쩐지 막내하고는 다섯마디 이상을 곱게 못한다. 질세라 서로 감정 상하는 말만 퉁퉁 뱉어내고는 삐져버린다. 이럴때는 가만히 못들은척 하는게 상책이지만, 귀를 막아도 꾸우욱 달팽이관까지 기어들어와 묵직히 박혀드는 한마디 – 아내가 즐겨쓰는, 사실 모든 사건을 촉발시키는 핵심 문장이 튀어나온다.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쯤되면 습관처럼 후훗… 소심한 웃음이 샌다. 사나워진 두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 웃지않은 척, 금새 표정관
리에 들어간다. 가장이라면… 불과 몇년전까지만해도, 정의의 사도처럼 짜잔 나서서 다 해결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물베기라는 부부사이보다도 더한 우리집 모녀 싸움. 그래서 붙여준 이름이 공기베기다. 칼로 공기 베기.. 물결조차 일지않는 흔적없는 싸움. 아무 소득없이, 손실없이.. 누구도 이기고 지는 일 없이.. 내 눈에는 분명히 치열했는데 며칠 안 가 콩짝콩짝 다시 둘이 짝꿍이 되는, 참 요상한 관계다.
“왜 웃어? 당신, 이래도 딸 편이지?”
편이라는 게 있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연 내게 편을 고를 권한이 있었나 말이다. 식상하지만, 연애시절에는 왜 이여자한테 날개가 없을까 싶었던, 그까짓 날개만 없을뿐이지 정녕 천사라 믿었던 사람이다. 전생에 폭포수 아래서 옷을 잃었을 그 선녀같은, 그런 아내와 결혼했다. 왕도, 옥황 상제도 부럽지 않던 달콤한 뭉게 구름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인간으로 살아왔다. 그제서야 그녀에게 왜 날개가 붙어있지 않았는지 알게되었다. 결혼 38년차... 이제 아내에게는, 날개는 커녕 날선 발톱만이 늘 공격 태세로 나를 노린다.
“도데체가, 어디서 저런 성질머리가 나왔는지...”
어디서 나오긴, 당신한테서 나왔지. 아마 그때, 옷을 잃어버려 하늘로 못간게 아니라, 선녀직 짤리고 폭포 밑으로 내던져진건 아니었을까. 하필 지독한 근시에 난시까지 심한 내가 길을 잘못들어, 실수로 잘못 주워온거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왜그리 피한방울 안 섞인 당신 시조모를 닮아가는지. 우리 집안 ‘센여자’의 상징이신 내 할머니 말이다. 반갑게도, 친근하게도.. 정이 폴폴 솟아나게도, 오래전에 돌아가신 그 분의 힘찬 꾸짖음을 아내에게서 듣는다.
“지들이 잘나서 혼자 큰 줄 안다니까. 부모고 뭐고 안중에도 없어.”
우리 아이는, 내가 보기에 반은 저절로 컸다. 별거 아니어도 꼴딱꼴딱 잘 받아먹고 쑥쑥 길어지더니, 이 평범한 유전자를 가지고도 여기저기서 인정 받으며 제법 사람놀이를 한다. 어디가도 안빠지는 아이가 무척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아내도 그럴거다. 다만, 남보다 엄청 잘해준건 없어도, 제 자식이니 욕심이 나나보다. 아마 본인 평생의 성적표라도 받는다 생각하는지, 조금 더 잘, 조금 더 높히.. 업그레이드 시키고 싶은것 같다.
“누구덕에 이만큼 컸는데..”
한숨... 덕분에 한풀 가라앉았다. 치떨리는 배신감은 지나가고, 실망과 허무가 오버랩되는 자조의 시간이 왔다. 슬슬 해피 앤딩으로 유도해볼까… 어차피 오래가지 않을 싸움인걸 안다. 다 큰 자식을 이래라 저래라… 소용없다. 현실 속 자식은, ‘아이’가 아닌지 오래되었다. 기저귀가 빵빵하도록 잠만 자던 녀석이 어느새 마트를 뛰어다니고, 계절 몇번 바뀌니 학교를 간다. 연예인 헤어스타일을 검색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맛집에 앉아 인증사진을 올린다. 돈 벌어오는 만큼 발언권도 세지고, 둘만 남아 심심한데 더이상 놀아주지도 않는다.
“잘못 키운거야. 엄마 말을 아주 우습게 알어.”
아니다. 잘 키운거다. 지엄마한테 따박따박 한마디도 지지않도록, 똑똑하게 잘 키웠다. 수십년 봉사했으니 이제 당신 인생 살으라고, 아빠랑 둘이 다시 연애시절로 돌아가라고, 슬쩍.. 아주 약간 독하게, 시간 맞춰 빠져주려는거다. 사실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데, 아내는 선뜻 아이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아직도 어린애로 보는건지, 아니면 나랑 둘이 있기 싫은건지 잘 모르겠다. 여태껏 복작복작하게 살다보니, 어쩌면 다시 우리끼리만 지낸다는게 어색하기도 할거고, 혹시 정년 지난 내가 불편한가…
“고작 그런 놈 만나라고 지금까지 뒷바라지를 한거야. 내가 미쳤지...”
아, 다행이다. 저런 말은 처음이다. “그 놈은 안돼, 미쳤니?” 도 아니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도 아니고… 우리가 미친짓 한 걸 인정한거다. 쓸데없는 짓, 헛짓거리, 다 부질없는 거… 그럼 이제부터 청신호다. 다 포기한다는 뜻이다. 아이는 그냥 '그 놈'을 만나는거고, 우리는 지금이라도 정신차린다. 엄마라는 이름의 과잉보호도, 권력남용도.. 이제 그만하겠다는 항복선언이다. 긴장이 풀리며 나도 모르게 시간을 본다. 도착할 때가 한참 지났는데.. 조급해져 핸드폰을 확인한다. 아무 문자 없다.
“카톡 하지마. 아직 허락한 거 아니야.”
옆통수도 아니고… 정확히 뒤통수 이만큼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떻게 다 아는지. 핸드폰을 집어넣고 아내 곁으로 가본다. 저녁 내내 식탁만 지키고 앉아있었을 테니 분명 허리가 아플거다. 삐딱하게 앉은 뒷모습이 예전과 똑같다. 아내는 화가나면 꼭 저렇게 2시 방향으로 돌아앉아 나를 외면한다. 이번일은 내 잘못이 아니니 좀 억울하지만, 아이의 아빠니까, 아내의 남편이니까 적당한 분풀이는 당해주기로 한다. 슬그머니 손을 뻗어 아내의 어깨를 주무른다. 눈치 못 채게,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추운 날은 더 늦는다.
“소개팅이 줄로 섰는데 이게 뭐냐고.”
평범한 우리 딸아이의 아주 평범한 남자 친구… 크게 구식은 아니어도, 아내도 먼지 뽀얀 골동품의 가우가 있긴 있었나보다. 남자가 좀 더 잘나야 할 것 같은, 더 좋은 학벌, 더 좋은 회사, 더 좋은 집안… 그래서 더 좋은 시작이 되기를, 남들보다 아주 째끔만 더 수월하게 살아가기를, 딸 가진 엄마의 소박한 그거, 장모 자리만이 바랄수있는 특권.. 그거다. 그런데 얼씨구나 환영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딱 잘라 반대할 사유도 없는.. 그런 맹숭맹숭한 보통 녀석을 데려온다니 별 구미가 땡기지 않는 거다.
“아우, 몰라. 밖에서 한번 보던지.. 집에 오면 밥차리고 뭐하고 짜증나.”
/띵똥…/
잠시 아내를 놔두고 현관으로 간다. 드디어 왔다. 철컥.. 아내가 싫어하지않게, 최대한 살살 현관문을 열고 닫는다. 적당한 온기가 느껴지는 용기를 꺼내 아내 앞에 놓는다.
“뭐야? 배달 시켰어?”
“어.. 밥 차리고 뭐하고 짜증 난다며.”
보쌈이다. 환호까지는 아니어도, 싫지는 않은 것 같다. 이것저것 깔끔하게 포장한 그릇들을 차례로 늘어놓는다. 젓가락과 소주 한병도 자리를 잡는다.
“연습해. 인제 우리 둘이만 살면, 이런거 먹어야돼.”
둘둘 말린 랩을 뜯어 먹기 좋도록 벌려놓는다.
“둘이 살면 허리띠를 졸라매야지. 이런걸 어떻게 먹어, 양도 너무 많고..”
“하나 시키면 2-3일씩 가잖아. 요새는 많이 못 먹어.”
“병원 가보자니까? 맨날 소화 안된다면서 왜 병원을 안가?”
아내가 반지르르한 고기 한젓가락을 집어든다. 궁합 잘 맞으라고, 재빨리 빈잔을 채운다.
“운동을 안해서 그래. 맨날 출근하다가 집에만 있으려니까 소화가 되나”
“하루 두번씩 나가서 걸으라니까 말은 왜 안들어.”
“눈 좀 녹고 길 다 치우면... 그러다 미끄러지면 큰일나.”
말랑하고 따뜻한, 한입에 들어가기 딱 좋은 네모난 고기 한점을 밀어넣는다. 새빨간 김치가 침샘을 울린다.
카톡.. 딸이다.
/아빠, 집이야? 엄마 뭐해?/
아내가 모르는 척, 또 한점을 입으로 가져간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답장을 한다.
/아빠랑 연애하지. 너무 늦지마/
핸드폰을 엎어놓는다. 보란듯이 옆으로 쭈욱.... 멀찌기 밀어놓는다. 잔을 비운다. 오물오물 잘 먹는 아내를 본다. 다 알지만, 한마디 건네본다.
“…괜찮지?”
“…응.”
“그래. 그럼 된거야.”
아내가 고기를 고른다. 반듯하고 예쁜 놈으로 집어 내 앞에 내민다. 입으로 넙죽.. 받아먹는다. 시원한 소주 한잔에 모든게 다 잘 풀린것 같다.
2023년. 새해가 왔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제일 맛있게 생긴 놈으로 가져왔습니다.
*새해에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