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엘리 트레스 (노르웨이)와 케이티 맥길브레이 (미국)
1. 입양 현황
대한민국의 해외입양은 한국전 직후인 1955 년부터 시작되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전쟁 고아들을 도우려던 해리 홀트Harry Holt 씨가 무려 8명의 아이들을 입양해 미국 포트랜드Portland로 데려간 것이 그 시초다. 가족 당 2명으로 제한하던 입양법을 바꾸는 노력 끝에, 현재 미국은 연평균 약 13,000명, 세계에서 외국 입양아를 가장 많이 받아주는 나라가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국내입양은, 해외입양의 3배에 가까운 연간 4만명을 넘는다. 입양 4건당 1건이 해외 입양이 된다.
반면, 인구절벽을 맞이했다며 저출산을 탓하는 한국정부는, 아직도 매년 2,500명 가까운 아이들을 해외로 보낸다. 국내입양은 한해 약 1,500명으로, 전체 입양의 35% 에 불과하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전 세계 한국입양아 누적인구는 무려 18만 명으로, 비공식 혹은 편법이나 불법입양을 감안하면 20만명 이상이라 추정된다. 경기도의 경우, 하남시나 오산시, 세종시 등이 각각 인구 20만 명의 도시들이며, 지방에서 찾는다면, 순천시, 목포시, 경주시 등이 비슷한 인구를 가진다. 결국 우리는, 도시 하나를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인원을, 그것도 경제 활동과 출산이 가능한 청년층 20만명을, 국외로 쫒아냈다.
해외입양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몇년전 방송에서 화제가 된 신성혁 씨(미국명 아담 크랩서)의 무국적자 강제추방사건, 양아버지의 구타로 죽은 현수(미국명 매덕 오켈러핸 2010~14), 또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1991년, (고) 최진실씨 주연의 영화 <수잔 브링 크의 아리랑>등은 모두 해외입양에서 시작된 나쁜 기억들이다. 다행히 이들처럼 언론에 알려지면 잠깐이나마 관심을 받지만, 20만 해외 입양인을 위로하기에는 우리 정부와 사회가 너무 무관심하다. 최근의 카라 보스씨의 경우, 유전자 검사로 친아버지를 찾았지만, 끝끝내 한마디의 대화조차 거부했다. 대신, 얼마전 사망하기 직전에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 카라씨를 법적인 가족으로 간신히 등재만 해주었다 (2020년 12월).
한국 정부의 대처가 이 모양이다 보니, 간혹 '성공한' 입양아들이 개인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조직적인 활동을 펼치는 일이 늘어났다. 어린 시절 혼혈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몸에 화상을 입고 입양된 토마스 박 클리맨트씨는, 사업가로 성공한 뉴욕에서 입양아 협회를 만들어 한국 아이들을 돕는다. 미국 방송인 출신인 제인 정 트랜카(1973년 미국 입양) 역시, 아예 한국에 거처를 두고 왕래하면서, 해외 입양의 심각성을 알리는데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입양 이야기를 출간해 작가상을 받기도 했다.
2. 엘리 트레스와 케이티 맥길브레이
지금껏 외면 해 온 20만 명 중, 아주 미미하지만 진심 가득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취재하였다. 이 인터뷰에는 노르웨이로 입양된 엘리 트레 스(한국명 이정숙)씨와 미국으로 입양된 케이티 맥길브레이(한국명 문상미)씨가 응해주셨다. 먼저, 아무 친분 관계가 없는 나에게 속마음을 활짝 열고 인터뷰에 응해 주신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소운: 인터뷰에 응하신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제 관심을 끌었던게 하나 있어요. 두 분 다, 본명이어야 할 한국 이름이, 부모가 아닌, 전혀 모르는 사람이 지어 주었다고 하셨어요, 그렇죠? 이름이 없거나 모를 만큼, 아주 어렸을 때 유기되었다는 이야기인데, 혹시 알고 계신 사실들이 있나요?
엘리: 저는 1968년 3월 서울에서 발견되었구요, 고향이나 생년월일 같은 정보가 전혀 없어서, 의사 선생님이 1월쯤에 태어났을거라고 생일을 1 월 23일로 결정하셨대요. 이름은 '기진 고아원'이라는 곳에서 저를 데려가면서 지어주셨구요. 위탁가정에도 잠깐 있었는데, 한살 반에 노르웨이로 보내졌어요.
케이티: 저는 1983년에 서울의 '한서 병원'에서 태어났어요. 서류에 보면, 친부모가 미혼이었고, 어리고 가난해서 저를 포기한다, 가족들의 반대로 헤어졌다고 써있어요. 태어나자마자 바로 기관에 넘겨졌고, 이름도 그 사회 복지사께서 지으셨어요. 6개월 때에 미국으로 갔습니다.
소운: 그럼 두 분 모두, 애기 때 해외로 가신 거네요. 너무 어렸을 때라, 남아있는 자료도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출생과 관련된 정보는 어떤 걸 가지고 계시나요?
엘리: 성인이 되어서 처음 입양 서류를 봤는데, 내용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가짜 이름, 가짜 생일, 소아마비로 다리가 아프다는 증명서 한장, 그리고 사진 뿐이에요.
케이티: 제 거는 그래도 좀 적혀있었어요. 친부모가, 제가 더 나은 가정으로 가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 뭐 그런 내용도 있어요.
소운: 어떠셨어요, 어렸을때? 새 가족들은 좋은 분들이셨나요?
엘리: 제 위로, 부모님의 친 딸 하나, 입양된 노르웨이 남자애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박사를 막 마치던 때였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셨구요. 나중에 알았는데, 어머니가 심한 우울증이었고, 아버지는 많이 소심하고 과묵했어요. 언니는 정말 흠잡을데 없이 완벽했는데, 오빠가 집중력 장애로 항상 사고를 쳤고, 그래서인가 두 분은 늘 싸웠어요.
케이티: 제 양어머니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어서 저를 입양했고, 다른 형제는 없어요. 아버지가 군인이셨고, 두 분 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셨구요. 할아버지도 저랑 산책 다니실 만큼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어릴 때 가끔 같이 다니다가 제가 소리 지르고 울고 하면, 할아버지랑 생긴 게 다르니까, 남들이 혹시 유괴범으로 신고할까봐 안절부절 하셨대요.
소운: 그분들은 고국이나 친부모에 대해 어떤 입장이셨나요?
엘리: 제 양어머니는 많이 부정적이 었어요. 가난하고 어린 한국 여자애와 지나가던 미군 사이에서, 그냥 놀다가 태어난 아이라고 비하하셨죠. 외모라던가, 유전자 검사 결과도 64%만 한국인 걸 보면 혼혈인건 사실 인데, 그렇다고 굳이 직업 여성이라는 증거는 없잖아요. 그래도 두 분은 늘, 너의 삶은 노르웨이에 도착해서 시작되었다라고 하셨고, 당시에 다들 그랬듯이, 친부모 찾는 것에 대해 별 관심 없으셨어요.
케이티: 저희 부모님은, 어쩌다 입양 이야기가 나와도, 그냥 서류에 있는 객관적인 ‘자료’ 이야기만 했지, 특별 히 꾸미거나 비난하거나 하는 건 없었어요. 별로 입양을 강조한 적도 없구요.
소운: 학교나 동네에서 어울리기 힘들지 않았나요?
엘리: 입양아라서, 아니면 동양인이라서 그런 것보다도, 제가 병으로 자주 아파서 병원에 들락거리다 보니까, 친한 친구를 만들지 못했어요. 차별 같은 건 없었지만, 오히려 제 스스로가,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 때문에 소극적이라서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어요.
케이티: 저는 작은 동네에 살아서, 사람들이 특별히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동양인도 너무 없어서 선입견 자체가 없었고, 이상하게 보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먼저 가서, “나는 한국에서 입양됐어. 우리 친구하자”고 말하고 다녔대요. 유치원 때 남자애 하나가 귀찮게 했는데, 아마 좀 다르게 생겨서 자꾸 까불었나봐요. 그만하라고 해도 안 듣길래 그대로 주먹을 날려서 코피를 터뜨려 줬던 게 생각나요.
소운: 지금은 성인이 되서 가정도 있고, 어릴 때하고는 시각이 좀 다를 텐데요. 본인의 입양이, 현재의 모습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세요? 입양이 되어서, 혹은 입양이 아니었으면, 지금보다 상황이 더 좋았다거나, 아니면 이런 점은 더 안 좋았을 거다, 이런 게 있나요?
엘리: 좋다기 보다는, 제가 입양되어서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잖아요. 막상 제가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학교는 졸업했지만, 몸이 아파서 지속적인 수입이 없었고, 정신적으로도 위험할 만큼 많이 힘들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바로 정부 기관에 도움을 청했어요. 아이들이 지금은 21살, 19 살인데, 성장기 때 7년을 위탁 가정에 가서 저랑 따로 살았어요. 떨어져 있는 내내, 늘 아이들을 생각했고, 다시 좋은 엄마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고요. 그래서 저도, 딸들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고, 애들도 그 점에 대해 불만이 있거나 원망하지 않아요. 그게 최선이었다는 걸 아니까요.
케이티: 입양은 여러 가지로 저를 성숙하게 만들었어요.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구요. 대학을 나올 수 있었고, 안정된 직장을 가졌고,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렸구요. 친부모에 대해서도 그래요. 품고 있던 아이를 떠나보내고, 지금껏 삼십년 동안 나를 그리워했겠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솔직히, 책임 질 수 없을 때는, 그래서 입양 보낸거라면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더 좋은 삶을 얻었으니까요.
엘리: 솔직히 아직도 저는, 입양되어 살아간다는 게 어떤 식으로든 좋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이런 소아마비와 트라우마를 가지고 버려진 채로 한국에 남았다면, 제 상황은 더 안 좋았을 것 같기는 해요. 아마 제 친엄마도 그걸 걱정했겠지요. 미래를 장담 할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겠지요. 물론 아직도, 마냥 자식일수 있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친부모가 그립기는 해요. 같이 기쁘고, 슬프고… 고생을 하더라도 일상을 함께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도 남아요.
케이티: 만약 제가 입양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가난했을 거고, 한국에 있다는 의붓 형제들도 태어나지 못 했겠지요. 많은 게 달라졌을거예요. 근데 분명한 건, 저는 슬프거나, 힘들거나, 친부모를 그리워해 본 적이 없어요. 여기(미국)에 진짜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어요.
엘리: 입양아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감정 자체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해요. 저는, 제 아이가 태어나서 한살 반 쯤 되니까, 그때가 얼마나 예민하고, 부모만 찾고, 안 떨어지려 하는지를 배웠어요. 한살 반이면, 딱 제가 입양 되었을 그 때인데,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어요. 그 일년반 동안 제가 얼마나 여기저기 실려다니며 무서웠을까… 노르웨이 입양 직후에 저를 담당했던 사회복지사의 기록을 보면, 제가 엄청 겁이 많고, 어디서 무슨 소리 하나만 들려도 기절할 듯 놀라고, 무서워하고, 관심과 사랑을 굉장히 많이 요구하는 아이였대요. 지금도 저는 무슨 소리가 나면 미칠 만큼 두렵고 무서워요. 인간관계도 힘들고… 아마 유아 때 여기저기 떠밀려 다니면서 생긴 트라우마일 것 같아요. 많이 힘들었나봐요. 평생을, 누구하고도 오래, 깊이 잘 지내 본적이 없어요. 만약 그때 버려지지 않았다면, 애착 형성도, 신뢰도, 다른 사람들하고의 관계도.. 남들만큼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케이티: 제 남편이, 애기 때 아버지가 떠나고 편모 밑에서 자랐어요. 나이 서른에 배다른 동생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왔더라구요. 처음에는 별 필요없다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제일 친한 친구에요. 가족과 헤어지는 건 슬프지만, 헤어진 가족을 다시 찾는 기쁨도 있어요. 입양된 건 이미 어쩔 수 없는 거고, 사실 입양이 안 되었으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 거라는 보장도 없구요. 저는 친엄마를 찾아서 기뻐요, 없던 동생들도 생겼고.. 입양이 안 되었다면 헤어질 일도 없었겠지만, 이렇게 30년만에 만날 일도 없었겠죠.
소운: 보내졌을때, ‘어린 아이’였잖아요. 그곳에서 자라는 동안, 친부모 생각을 한적이 있다면, 언제 제일 보고 싶었어요? 아니면 미울 때가 있었나요?
엘리: 어느날 갑자기 생각나고, 그립고, 그런 건 아니구요, 저는 항상 부모님이 마음속에 있어요. 사실 이제 와서 찾는다고 해도 살아가는 게 달라지거나, 인생의 답을 얻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벌써 죽어버렸다면 참 많이 슬플 거고… 만약 살아있다면, 어떻게 살았는지, 어디에 사는지, 거울에서 보이는 나랑 닮았는지, 그런 게 궁금하죠.
케이티: 미운 적 없어요. 고마웠어요. 사실은 생각나거나 보고 싶은 적도 없었는데, 몇년전에 양부모님이 갑자기 다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때서야 '아,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처음으로 궁금해 졌어요. 옆에 아무도 없어서 좀 허전했던 것 같아요.
소운: 엘리씨는 아직 친부모님을 찾는 중이고, 케이티씨는 어머니를 작년에 찾으셨어요. 그 과정이 어땠는지, 어떤 점이 힘들었는지 이야기 해 주세요.
엘리: 저는 처음부터 기대 안 했어요. 혼혈인데다가 한쪽 다리에 장애가 심해요. 누가 봐도, 원하지 않아서 버린 거에요. 생일도, 고향도, 이름도 없는데 뭘, 어떻게 찾겠어요. 담당자도 참 어이없고 막막했을 거에요. 요즘에는 유전자 검사로 많이들 만난다고 해서, 그것도 해서 보내고… 근데 그쪽에서 저를 찾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그래도 그 유전자 덕분에, 먼 친척 중에 저처럼 입양 보내진 사람이 하나 더 있어서, 그 사람을 찾았어요. 말이 친척이지, 얼마나 가까운지,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도 없고, 그냥 모계 쪽 일부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연이라고 하는 그런 정도요. 지금도 십년 넘게, 시스템 상으로는 가족을 찾고 있지만, 일부러 아무 기대 안 하려고 노력해요.
케이티: 제 경우는, 어디에다 물어봐도, 다들 가능성이 낮다고 하니까, 저도 그냥 혹시나 했구요. 다행히 저는 그래도 80년대 출생이라 그랬는지, 부모님 정보가 병원 기록에 남아 있었어요. 담당자 분이 거기에 적혀있던 주소로 편지를 보냈어요, 제가 찾는다고... 엄마만 연락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제 출생에 대해 절대 비밀이라고, 자기를 찾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그러셨어요. 그래도 다행히 거부는 안 하셔서, 연락도 되고, 유전자 검사도 응해주셔서 친자 확인 했구요. 그래도 엄마의 지금 가족들은 저에 대해 모르고 있어요.
소운: 엘리씨는, 친부모가 나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솔직히, 기분이 어떠세요?
엘리: 괜찮아요. 그 분들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그런 결정도 이해해요. 저 혼자 중얼거리는 거지만, 항상 두분께 그렇게 이야기 해 왔어요. 절대 나쁜 감정도 없고, 좋다, 나쁘다 평가하지 않는다고요. 내가 처했던 상황, 질병 이라든가, 기타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유들 때문에 힘들었을 거고, 분명히 날 사랑해서, 더 잘 살게 하려고 그랬을 거라고 믿어요. 너무 미화하는 것 같 지만, 누가 딱 나타나서,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그냥 네가 귀찮아서 버렸어, 하고 꿈을 깨게 해 줄 때까지는, 그런 이미지로 가슴에 남길 거예요.
소운: 케이티씨는 아버지를 아직 못 찾았잖아요, 그건 괜찮으세요, 아니면 아직 찾고 싶으신가요?
케이티: 대부분의 경우, 누가 연락이 안 된다 그러면, 특히나 가족이, 연락이 안된다 그러면, 연락처가 잘못되었다거나 바뀐거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이 경우는, 저와 연락하는 게 싫어서 피할 가능성이 높고, 준비가 안 되었다, 숨기고 싶다, 뭐 그런 거라면 더 이상 어쩔 수 없죠. 한국 정서상, 현재의 가족이 있는데 혼외 자식이 나타나면, 가정 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본인들은 얼마나 걱정되고 두렵겠어요. 피하고 숨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사실 거절 당할 각오를 했었어요. 처음부터 그 쪽이 버린 거 니까. 내가 버려진 거니까요. 만나겠다는 건 처음부터 저 혼자만의 바램이었죠.
소운: 입양에 관련되신 분들 중, 특별히 말씀 전하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이유는요?
케이티: 입양되신 모든 분들이요. 그리고 그걸 솔직하게 인정해 주시는 모든 부모들이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거예요. 사실, 직접 부모를 찾아보니까 혼자하기에는 너무 어려워요. 앞서 재회하신 분들이 더 많이 정보를 공유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한테는 큰 힘이 되었어요.
엘리: 저도 그래요.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보면, 아는 사람도 아닌데, 꼭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신비한 느낌이 있어요. 다 형제같고, 가족같은 그런 거 …?
소운: 돌아가셔서, 연락은 이제 못하지만, 양부모님께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엘리: 왜 입양했냐고 묻고 싶어요. 책임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왜 함부로 한 생명을 데려 왔는지, 원한 적 없는 접대를 해놓고 내게 어떤 인사를 기대했는지요. 양어머니가 우울증으로 모두를 괴롭혔을 때, 가족이 다 무너졌어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끈을 놓지 않으려 하셨던 양아버지가 아직 마음에 남아요. 친부모를 찾아주지 못한 것과 더 좋은 아빠가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항상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나는, 아버지가 최선을 다 하셨다고 생각해요.
케이티: 저는 두 분 다, 똑같이 54세에, 7개월 차이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가시고 나니까 친척들이 그러시더 라구요. 두분이 늘, 제 친부모를 찾아주고 싶다고 그랬었대요. 찾아서 저랑 꼭 같이 한국에 가서 만나보고, 그 희생에 감사하다고, 아이를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한다고 그러셨대요. 저한테는 한번도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없었어요. 엄마아빠를 다시 보면, 편하게, 같이 그런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좋겠어요.
소운: 마지막으로, 해외 입양이 이런게 문제다, 정책적으로 아니면 사회적으로, 이런 거는 좀 고쳐야겠다, 하는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엘리: 입양 관련 단체들과 정부차원에서 보완 할 게 많아요. 저처럼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가짜 신분으로 입양을 보내지는 것부터 금지 해야죠. 내가 누구인지, 내 뿌리가 어디인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알 권리 자체를 없에는 거예요. 그게 어른들은 편한지 몰라도, 입양아들은 다 미칠 것 같은 고통이 되요. 또 반대로, 입양을 받아주는 쪽도, 전적으로 양부모만 믿는 거잖아요. 학대 받거나 다시 방치되는 아이들을 보면 화도 나고, 정말 공포에요. 제대로 된 보호조치가 마련되어야 해요.
케이티: 솔직히, 버려져서, 한국에서 누구도 원하지 않아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도 두드려 맞고, 쫒겨나고, 살해 당하고 … 그런 뉴스를 보면, 저도 입양되어 온 입장이라 너무 끔찍해요. 법적인 것도 그래요. 그까짓 입양 서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남의 나라에 들어 올 때, 임시가 아니라, 처음부터 합법적인 신분이 주어져야 하구요, 아이와 부모에 대한 정보도 양쪽 가정에서 똑같이 알고 있어야 하구요. 양쪽 다 부모 잖아요. 본인들 사생활이지만, 공동으로 보호해야 하는 한 생명에 관련된거 잖아요. 혹시라도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경우에, 원인이나 치유법을 친부모 쪽에서 찾을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입양을 데려오는 쪽에서 상담이라든가, 문화 차이등에 대한 공부라든가, 미리 준비를 할 수 있구요.
그리고 이건, 제가 친부모를 찾으면서 느낀 건데요, 두 나라 사이에 언어나 문화에 대해 다리 역할을 해 줄 기관이 정말 필요해요. 찾는 것도 힘들지만, 찾은 뒤에 대화도 안 되고 왕래도 안 되고… 결국은 다시 제자리인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진짜 입양의 가장 큰 문제는, 친부모를 찾고 안 찾고가 아니에요. 태어나자마자부터 죄 없이 버려져서, 물건처럼 이 사람한테 갔다가 저 사람한테 갔다가… 다 커서도 누구도 나타나 찾지 않고… 결국 ‘나는 도대체 뭔가, 왜 사나’ 하는 생각에 평생 고통스러워요. 이제 한국도 전보다 먹고 살만하잖아요. 전처럼, 다른 나라로 입양가면 더 잘 살 거다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3. 대한민국에 바란다
2010년 3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던 7살 소년이 6개월 만에 파양되었다. 그것도 어린 아이를 보호자 없이, 혼자 비행기에 태워 돌려보냈기에 사람들은 더욱 분노했다. 러시아는 그해 9월, 미국으로의 아동 수출을 전면 중단한다. 매년 약 1,500명이 미국으로 보내졌던 걸 생각하면, 굉장히 빠르고, 단호한 결정이다. 정치적 속셈이 무엇이든, 자국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며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제 한국은 러시아를 제치고, 미국의 3번째 고아 수출 대국이 되었다. 사실, 지난 60여년 동안의 누적된 숫자로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아이들을 미국으로 떠넘겼다. 모두가 힘들던 시기에, 어쩔 수 없이 보내야했던 때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난이나 질병보다는, 부주의와 이기심으로 책임을 떠넘기며,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다음 세대가 되어 줄 소중한 아이들이 무연고의 외지로 팔려간다. 누구를 위한 해외 입양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해보자.
<참고> 이 글은 2017년에 문예지 <희망봉 광장>에 실렸던 글로, 제가 두 분과 이매일로 인터뷰 한 내용을 번역 및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