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01:17-27
사무엘하 01:17-27 활 노래 - 다윗의 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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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애가를 지어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고 유다 족속에게 명하여 가르칩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용사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은 또 사울과 요나단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자라 하고 이스라엘을 부요케 했다고 평합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우정을 심히 아름답다 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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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8절 리더는 슬픔을 가르칠 줄 알아야 합니다.
애가를 지어 부르는 것이 통상적인 예인지는 몰라도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애가를 짓고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명하여 가르쳐서 부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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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조문하는 일 자체까지는 큰 문제가 없으나 애가는 그들에 대한 존경 이상의 평가와 의도를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弔喪)한 다윗의 모습이 노래를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기에 더없이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손색이 없었던 것입니다. 조문을 넘어 애가로 조상하는 일은 단순한 예만 갖추는 것이 아닌 다른 의도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긍정적으로는 다윗의 정당성을 높여주는 일이지만 부정적으로는 그런 모습이 과하게 비춰져서 오히려 더 의심하게 되는 역효과도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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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서 이해 당사자인 정치인들이 조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조문하는 모습들을 언론에 노출되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고인을 존경한다느니, 아쉬웠다느니, 안타깝다느니 하는 인터뷰나 조사도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그 가식적인 모습은 가릴 수 없는데, 결국 권력자들이 가릴 수 없는 탐욕의 한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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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에 있는 본색을 감출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분수를 알고 주어진 자리에서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 진실한 마음으로 행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특히나 슬픔 중에 있는 이들, 연약한 이들, 그리고 원수의 불행 앞에서까지라도 진실된 마음,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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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절 리더는 공동체를 헤아리고, 사랑하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영광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용사라고도 말합니다. 요나단에게는 형제라고도 표현하고 심히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재평가하는 데 있어서 존귀하게 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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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윗의 요나단에 대한 평가는 그래도 인정되지만, 사울에 대한 평가는 다소 과하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우선 용사라 하는 표현과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니 아니함은 이미 사울의 준수한 외모와 전쟁에서의 승리 경력으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라는 것과(성품),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다는 표현들(전사), 그리고 붉은 옷으로 화려하게 힙혔고, 금 노리개로 백성의 옷에 채웠다(경제)는 표현은 과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물론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의 모습은 부정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면에서는 이 말들이 일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상에서 그려진 사울의 모습은 다윗의 평가에 대해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울의 성품은 거의 정신 분열증적인 모습이었고, 전쟁에서도 늘 경계에 실패한 모습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백성들을 풍요롭게 해주었다는 말은 별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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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용비어천가와 같은 활 노래를 지어 부른 것은 아닌지 재고하게 하는 표현들입니다. 노래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평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각자의 입장과 관점이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존중과 사랑의 대상은 될 지언정 경배의 대상으로까지 추앙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과거 유신정권에 대한 찬양이 이와 같이 도가 지나친 추앙과 숭배로까지 이어지는 모습들을 보면 눈살이 찌뿌려집니다. 전 정권에 대한 피해의식도 역시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다. 오늘도 용비어천가를 불러대는 추종자들과 언론의 배설물같은 기사들은 여전히 씁쓸함을 양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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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오직 사랑의 대상입니다. 죽음을 슬퍼하고 존경과 사랑을 표할 순 있지만 그런 이들을 추앙하고 숭배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과한 칭찬과 존경에 대한 가식적인 표현들은 안하니만 못하다 생각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며, 땅은 관리와 통치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원리를 혼돈하게 되면 위험한 우상숭배와 신성모독과 경거망동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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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처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부분을 부각한 이유는 2장에 들어서기까지 다윗의 모든 조문 행동에 대해서 한번도 하나님께 묻지 않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비록 복잡하고 미묘하다 하더라도 과한 표현들에서 너무도 적나라하게 저의가 드러나는 노래가 아닌지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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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과 요나단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묘사한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내 영광이 산 위에서 죽음을 당했다. 이 영광 안에는 사울이 포함되어 있다. 두 용사가 엎드려져 있다. 그리고 두 용사의 죽음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할 것을 권유한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의형제요, 많은 은혜를 받았으니 그런다 하는데, 사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한 것은 의례적이다. 애가의 성격상 사람이 죽었는데 자신이 싫어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 애도를 표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고 애가의 성격으로 볼 수도 있는데, 사무엘 저자는 이것이 다윗의 진심임을 보여주고, 다윗은 사울에게 원한이 없음을 여러 차례 보여준다. 그래서 지금 다윗의 애도가 가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애가는 다윗의 진심과 정치적 안목도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후에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서 이런 반응을 보인다.(다윗의 애가(조가) 정치라고 한다)
특히 18절에 이 노래를 유다지파(자신의 지파)에게 가르치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지파가 경쟁자인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지 말라 한다. 그것이 자신의 통치에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윗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울의 추종 세력을 끌어안아야 하는데, 사울의 죽음을 기뻐한다면 그들이 다윗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윗은 이것을 볼 줄 아는 정치적 감각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사무엘 통해 신앙인 다윗과 정치가 다윗의 모습을 같이 볼 수 있어야 한다. 현실 정치에 대한 감각을 다윗이 가지고 있었기에 다윗이 왕이 된다. 순수한 신앙인의 모습만으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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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사람들을 향한 나의 마음이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진실하고 투명하게 대할 수 있길 원하며
사람들에 대한 과분한 칭찬이나 추앙으로
기만하는 행동을 삼가하고
진실하고 투명한 처신과 행실로
행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