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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ul 11. 2024

예레미야 31:10-22 구원신탁 4 : 지극한 사랑

예레미야 31:10-22 

예레미야 31:10-22 구원신탁 4 : 지극한 사랑

여호와께서 선한 목자처럼 양떼같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사 물 댄 동산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복으로 만족케 하시겠다 하십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라헬)을 위로하실 것이며, 징계 더에 부끄러운 옛 삶을 뉘우치는 이스라엘(에브라임)의 회개를 확인하시고 사랑을 고백하시며, 이스라엘을 처녀, 딸이라 하시며 새 일을 창조하시겠다고 하십니다. 

*

# 10-14 여호와께서는 양 떼 같은 이스라엘을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실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언자는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선포합니다. 민족들이 야훼의 구원역사를 전파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모아 지키듯이 과거 이스라엘을 흩으셨던 야훼께서 이제 강한 자의 손에서 이들을 구출해 보호해주실 것입니다(10-11절; cf. 사 40:11; 43:5; cf. 겔 34:11-22). 슬픔과 고난이 기쁨과 축복으로 바뀝니다(12-13절). 시온 산이 양식의 풍요로움과 잔치의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기름진 예물이 봉헌되고 성전 제사가 다시 드려져 제사장은 기름진 것을 실컷 먹고, 백성도 야훼의 축복으로 풍성한 결실을 거둬 배불리 먹습니다(14절).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주님의 목장으로 인도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라 하십니다. 모두가 즐거워하며 슬픔이 즐거움으로, 근심에 위로로 기쁨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시리라 하십니다. 

우리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 물 댄 동산 처럼 마르지 않는 샘의 근원으로 해갈하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아도 될 이유, 근심과 슬픔에도 절망하지 않을 이유는 주님이 우리의 목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

# 15-20 여호와께서 위로하지 못할 슬픔, 회복시키지 못할 상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주전 722/1년에 앗수르에 의해 유배당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말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의인화한] 라헬이 자식이 모두 죽어 한명도 없음을 탄식합니다(15절). 남은 자식이 없기에 위로를 거절하는 라헬에게 야훼께서는 유배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위로하십니다(16-17절). 18-19절에서 야훼는 에브라임의 탄식를 인용하십니다. 에브라임에 대한 그분의 징계는 긍정적입니다. 징계의 심판을 통해 에브라임은 자신의 불순종을 깨닫고 야훼를 인정하고 그분께로 돌아옵니다.

15절 예레미야는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에서 여전히 유배 살고 있는 북 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그는 베냐민을 낳다가 심한 산고(産苦)로 죽은 라헬의 운명을 비유적으로 이용하여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 왕국의 운명을 기술합니다. 라헬의 첫째 아들 요셉으로부터 에브라임이 나오기에 라헬은 북 왕국의 시조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북 왕국을 대표하여 라헬이 그 멸망(죽음)을 비통하게 탄식합니다. 어떤 미래의 소망도 찾아볼 수 없게 철저하게 파멸당한 라헬은 오직 죽음을 애통할 뿐입니다. 자식이 없어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라헬은 미래가 전혀 없는 북 왕국의 파국적 현실을 상징합니다. 자식들은 앗수르의 칼에 쓰러지거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에브라임의 회복은 전혀 생각할 수 없기에 어떤 말로도 위로받을 수 없습니다.

‘라헬’은 라반의 딸로 언니 레아와 함께 야곱의 아내가 되어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창 30:22-24; 35:16-18). 벧엘을 떠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에브랏으로 가는 중도에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창 35:16-18). 심한 산고로 탈진한 라헬에게 산파가 “그대가 또 득남하였느니라”(17절) 하고 위로하지만 이미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라헬은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내 고통의 아들)라 부르며 죽습니다(18절). 족보상 라헬이 낳은 첫째 아들 요셉에게서 북 왕국의 근간을 이루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나오기에 라헬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국모(國母)가 됩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벤야민 지파의 경계에 위치한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대략 10km 떨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사무엘이 활동했던 라마(삼상 7:17)와는 구별되지만, 그의 출생지(삼상 1:1)와는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렘 31:15와 삼상 10:2(‘베냐민 경내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로부터 라헬의 무덤이 라마에 있었다고 추론합니다. 후대의 전승은(주후 4세기경부터) 창 35:19의 진술(‘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에 근거하여 [잘못] 그의 무덤을 베들레헴에서 찾지만 창세기 35장 19절의 ‘베들레헴’은 [미가 5:2에 의지한] 난외주가 본문에 삽입된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이 원래적이라면 차라리 16절에 등장해야 합니다.]

16절 16-17절에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라헬을 야훼께서 직접 위로하십니다. 야훼께서 라헬의 통곡에 응답하셔서 그녀의 자손들을 유배당한 땅에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네 수고에 보상이 있어’[사 40:10; 62:11])은 야훼의 위로가 라헬의 수고에 상응하는 대가로 주어졌음을 전제하지는 않습니다. 라헬의 일(수고)는 보상(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위로 받지 못하고 통곡하는 에브라임의 절망적 현실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절망적인 간절함이 야훼의 마음을 움직인다.] 에브라임은 야훼께 잊혀진, 버림받은 자식이 아니기에(20절) 야훼께서 그의 탄식에 ‘가엾음’으로 응답하십니다.

17절 절망과 죽음이 지배하는 에브라임에게 미래의 소망이 주어집니다. 야훼께서 라헬의 탄식에 응답하실 때 에브라임에게는 미래가 새로이 열립니다. 에브라임의 미래는 유배민들의 귀환에 달려 있습니다.

18절 에브라임의 탄식 : 18-19절에서 야훼께서 에브라임의 탄식을 인용하십니다. 에브라임은 야훼의 징계에 회개와 간구로 응답합니다. 에브라임은 자신을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cf. 호 10:10-11), 곧 길들지 않은 송아지에 비교하면서 자신의 불순종과 고집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징계의 정당성을 인정합니다(18a절). 하나님의 징계가 마침내 효력을 발휘합니다. 에브라임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합니다(18b절). 에브라임은 야훼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회개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회개가 구원의 전제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회개한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회개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속합니다. 회개한 자의 용납과 거절은 하나님의 결정에 속합니다(cf. 눅 15:11-32). 하나님께 돌아감이 자신의 권리에 속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에브라임은 전통적이며 기본적인 신앙고백에 의존하여 간구합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18bb). 에브라임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 호소합니다(→ 20절).

19절 에브라임은 자신의 젊은 시절의 치욕을 뉘우치며 자신의 불순종을 깨닫습니다. 에브라임은 당하고 있는 수치와 창피가 자신이 과거에 범한 죄에서 기인함을 인정합니다. 현재의 수치와 고난은 스스로가 자초한 것으로 에브라임이 져야할 짐입니다. ‘볼기/허벅지를 치다’(cf. 겔 21:17)는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태도입니다.

20절 18bb절의 신앙고백적 진술에 야훼께서 긍정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야훼에 의해서 책망을 받고 고난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에브라임은 여전히 그분께서 가엾이 여기시는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입니다(cf. 호 11:1). 그분은 에브라임에게 심판을 선포할 때마다 당신 아들을 거듭 기억하셨습니다(20ab절). 에브라임의 심판 목적이 멸망에 있지 않고 정화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에브라임을 징계하시지만 에브라임은 그분께 여전히 ‘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마음 한 가운데서 에브라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솟구쳐 올라오기에 그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20b절; cf. 호 11:8-9).

“이스라엘의 진실한 회개를 확인하신 하나님은 그제야 마음을 놓으시고 그들을 향한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십니다.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기뻐하신다고, 징계하실 때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이 더 아팠다고, 당연히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자식의 잘못을 꾸짖으면서도 자식 걱정에 애태우는 부모의 마음, 딱 그 마음입니다.”_매일성경

*

# 21-22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처녀,  딸이라 부르시며 돌아오라 하시고, 방황을 끝낼 ‘새 일’을 창조하셨다고 하십니다. 

처녀 이스라엘에게 예언자(야훼?)가 돌아올 것을 허락하십니다. 유배당할 때 갔던 길을 잘 기억해서 되밟아 돌아오라고 말합니다(21절). 22절은 [유배민들에게] 귀환을 머뭇거리지 말라는 요청으로도, 또는 [가나안 땅에 돌아온 자들에게] 야훼께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요청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21절 돌아갈 것을 허락해 달라는 에브라임의 간구(18-19절)에 야훼께서 긍정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처녀 이스라엘(18:13; 31:4)에게 귀환을 허락하십니다. 유배 갈 때 지났던 길을 잘 생각하고 다시 그 길을 따라 이전에 살던 성읍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배 길이 야훼에 의한 징계의 심판인 것처럼, 귀환 길은 그분에 의한 용서와 구원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22절 전반절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부정적 인상을 내포합니다. ‘반역자’는 3:6-15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거듭 사용된 표현입니다. 가나안으로 귀환하기를 주저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면 바벨론 유배민을 그 대상으로 할 수 있습니다. 후반절은 아마도 가나안 땅을 전제하는 것 같기에[?], 야훼께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요청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후반절의 야훼께서 이 땅에 새로이 창조하신 것,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돌아온 아내 이스라엘이 남편 야훼를 감싸안는다는 말일까? 야훼께서 지켜주셔서 귀환 길이 여자가 남자를 에워싸고 보호할 정도로 위험이 없는 안전한 길임을 말하는가? 추측할 뿐입니다.]

*

# 거둠의 기도

선한 목자 되신 주님

우리를 푸른 풀같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앞에 회개하오며

여호와께서 복이 되신 줄 믿으며

우리를 물 댄 동산 같게 하실 것을 신뢰하며

모든 슬픔과 근심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당하는 그 어떤 슬픔과 절망도

주님은 능히 위로하고 치유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탄식과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주님을 바라며

긍휼히 여기시는 주앞에 나아갑니다. 

우리를 향하실 새 일을 기대하며

허탄한 길에서 돌이키며, 

모든 반역과 방황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께로 돌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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