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만한 물가 - 93호
20140404 - 삼림(森林) 속 진달래
봄비가 왔다. 수분을 머금은 꽃망울이 터지자 평소에 보이지 않던 그 꽃이 수줍은 듯 피어 있다. 잠시 내린 봄비가 송글 거리며 연한 진달래 꽃잎에 붙어 있다. 비에 젖은 가지가 진해지니 보랏빛이 더 선명해진다. 손을 내밀면 금세 보랏빛 물이 들 것 같다. 한껏 머금은 빗물이 오래 고이진 않는다. 봄비에 젖은 진달래는 꽃이 가진 슬픈 전설 때문인지 눈물처럼 보인다. 이 꽃이 가진 수줍은 이미지와 보랏빛이 주는 아픔들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색케 한다.
봄바람이 살랑인다. 가늘디가는 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너무도 여린 가지여서 아이들이 손을 대도 금세 꺾이는 진달래지만 봄바람에는 꺾이지 않는다. 오히려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이 진달래를 춤추게 한다. 근처의 산죽을 지나치며 소슬 거리는 바람 소리에 덩달아 기웃거리는 진달래의 모습에는 영락없이 고운 아낙네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바람이 멎을 때면 이내 연지 곤지 찍은 새색시 마냥 다소곳이 피어 있다. 새색시 눈꺼풀처럼 떨리는 꽃잎과 함께...
봄 햇살이 비췬다. 원래 음지에서 주로 자라던 터라 삼림 속에 더 많이 핀다. 여느 산처럼 너무 많이 군락 져 있으면 조금은 천박해지는 듯하다. 마을 뒷산에도 소나무 숲 군데군데 그러면서도 옹삭 한 데 피었던 꽃인데, 학교 옆 전나무 숲에도 그렇게 여기저기 수줍게 피어 있다. 아침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간간히 비춰질 때면 보랏빛 꽃잎이 연분홍으로 변한다. 영롱한 아침이슬이 햇살에 비췰 때면 연분홍 입술처럼 보인다. 햇살에 고개를 들다가 눈이 부셔 진달래가 눈을 깜박일 때면 햇살에 비친 진달래를 가슴에 한 아름 안아보고 싶어 진다.
봄 향기 가득하다. 진달래 이외에도 많이 피는 꽃들을 볼 때면 삼림 속 진달래는 금세 뒷전을 밀리지만 달래 냉이 씀바귀 캐 오던 그 들에서는 진달래가 더 눈이 갔다. 나물 캐는 누나가 파내는 흙내음도, 나물들의 독특한 향기들도 몸과 마음을 회복케 한다. 그런데 소나무 숲 향기 속에서 진달래 꽃잎 하나 입에 머금으면 쌉싸름한 신맛과 함께 꽃향기가 가슴까지 전해진다. 또 한 움큼 쥐어 꽃잎에 코를 바짝 대면 가슴이 콩닥거리며 설렌다. 선인들은 그 향기 오래 두고 싶어 두견주 담아 머금었으리라.
봄비, 봄바람, 봄 햇살, 봄 향기, 봄나물 모두 진달래와 노래한다. 그런데 그 꽃 앞에 부끄럽다. 진달래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 들은 다 사라지고 어느새 몸도 마음도 굳어진 내 모습과, 거짓과 탐욕에 눈먼 세상과 이기적인 소음들 가득한 이들이 문득 이 꽃이 노래하는 그 모습 앞에 얼마나 초라한지. 이름 없는 산야에 잠시 피었다 지는 그 꽃도 묵묵히 제 역할을 하고 가는데 우리는 무얼 그리 득달같이 살아가다 누리지도 품지도 못하고 악취만 풍겨대고 살아가는지. 진달래꽃 머금은 그 향기,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런 변함없는 사람의 향기가 그립다. 삼림 속 진달래를 만나고 그렇게 변함없이 제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