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3:01-16
여호수아 23:01-16 고별설교 1 - 오직 여호와께로 가까이 - 지도자들에게
*
연로해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불러 그간 여호와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목도한대로 약속의 땅에 살게 되었으니, 오직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힘쓰고, 가나안 족속과 왕래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여호와의 신실한 말씀과 불길한 말씀 모두 여호와의 령과 언약의 순종 여부를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
여호수아의 고별사. 떠나는 이가 남겨진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모아 고별사를 전합니다. 지난 여정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하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과 남겨진 사명과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상기시켜 주며 축복합니다.
*
<40자 메시지>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주를 사랑하는 자니 오늘도 사랑 베푸신 주를 앙망하나이다
(여호수아 23:1~16)
*
# 1-8절 첫번째 권면 :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니 오직 여호와께 가까이 하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시고 싸우신 여호와 그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너희도 끝까지 남겨진 땅을 차지하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셨고(3절), 땅을 주셨으며(4절), 남은 땅도 차지하게 하신(5절) 은혜를 강조합니다.
지나온 여정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세밀한 부분까지 역사하시고 통치하시고 인도해 주신 그 은혜 지금도 이후로도 그렇게 함께 하심을 믿으니 내일일을 몰라도 믿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들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아는 일 말씀과 역사를 통해서 알아갈 수록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믿음을 성장 성숙시킵니다. 그 믿음의 눈으로 오늘 내게 주어진 사명도 확인하고 행할 이유와 능력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에(롬10:17) 오늘도 하나님의 역사인 말씀을 상고하여 믿음 얻습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세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첫째 6절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명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비교 신 5:32; 신 28:14; 수1:7)하시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신앙을 명합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태도를 삼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근본주의가 문제이고, 너무 진보적인 것도 문제입니다. 균형을 잘 잡는 것이 좋다. 그것이 악에 대한 침묵과 방관을 말하지 않습니다. 중립도 아닙니다. 이는 모두다 극단에 대한 암묵적 동조일 뿐입니다. 균형은 선악과 사리를 분별하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판단하여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말하니다.
둘째 가나안의 다른 민족들(히. 고임) 중에 가지 말 것과, 그들의 신들의 이름 부르지 말고, 절하지 말라 하십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구약에서 때로 성관계를 표현하는 의미입니다. 라합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이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결혼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섬겨 절하지 말라 합니다. 이스라엘의 통혼 금지는 혈통의 순수성 보존의 목적이 아니고 신앙의 순수성 지키기 위함입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믿지 않는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가까이(히. 다바크) 할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을 인정합니다. 가까이 한다(다바크)느 말은 요단 동편 지파에게 권면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가까이 친근히 하는 것을 말한다. 언약적인 용어입니다. 멀리할 것은 이방신이고 가까이 할 것은 하나님입니다. 서로 반비례이므로 둘 다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은 맘몬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셨습니다. 섬김의 대상 곧 주인이 둘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부분에서 넘어집니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풍요의 신도 같이 섬기는 것입니다. 풍요에 대한 유혹이 그들이 혼합주의로 빠지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풍요의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 타락의 핵심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기독교 신앙은 얻기 위해서 포기해야 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내려 놓아야 합니다. 오늘날 강단의 세속화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적 성공을 강조하고 부자로 사는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인양 말합니다. 그러나 부를 얻는 것이 신앙의 동기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을 수단화 하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심의 욕망을 채우는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신앙은 순수한 동기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
# 9-13절 두 번째 권면 : 여호와께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했으니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은 그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거나 섬기면 그것이 결국 올무와 덫과 채찍과 눈에 가시가 되어 함께 멸망하게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떠오르는 부분으로 부터 깊은 묵상을 통해서 이러한 요소가 발견되거든 미루지 않고 정리 정돈해 가는 것이 지혜로운 자요 유혹과 미혹과 타협을 뿌리치는 일이요 거룩한 길 가는 자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23장에서 10회정도 반복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언약을 맺었기에 언약적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배타적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이를 비신자들은 비난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성경에서 다른 신 인정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타종교와 평화로운 관계 인정하나 그들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진리)은 하나라 하기에 세상에겐 독선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라 하는 하나님의 요구가 지나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만을 위해서 그러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 사람에게 유익이며 축복이니까 하나님만을 섬기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창조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것인가? 자신이 창조하고 보살피고 있는 이 인간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인가가 관심이니 하나님만 섬기라 합니다.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그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12-13절에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돌아서서 다른 신에게 가면.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가까이 하면(혼인하며 – 다바크를 혼인으로 해석한다)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신명기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부부의 관계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문화와 구별된 문화로 살아야 합니다. 가나안은 타락한 문화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선택사상과 잘못 결합되면 우월의식으로 잘못 적용됩니다. 구별은 거룩으로 가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거룩은 구별(세속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는 달라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부르는 목적(정체성)입니다.
교회는 본질상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거룩을 상실하면 정체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 세상의 모임이나 교회의 모임이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증거들이 아닌가?
만일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면 두려운 결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이 올무가 되고 덫이 되고, 채찍이 되며, 눈에 가시가 될 것입니다(비교. 삿 2:2-3; 왕상 11:1-13). 점층법으로 뒤로 갈수록 고통이 더 커집니다. 사사기에서는 이것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 경고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로 나타난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돌아서지 않으면?하면서 계속 강도를 더하는 것은 매를 덜 맞고 회개하길 원하신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점점 더 강한 고통으로 발전시켜 나갑니다.
그래도 돌아서지 않으면 결국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할 것(히. 아바드)이라 경고합니다. 그리고 생명과 사명, 축복과 저주가 놓여져 있습니다. 신명기 33장에서 생명을 택하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명기가 말하는 생명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선택 앞에 놓여 있습니다. 모든 인류도 두 가지 길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멸망과 생명의 길을 말씀하시고 좁은 길을 선택해서 걷고 있는 사람이라 합니다. 이 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결국 자기가 지는 것입니다.
*
# 14-16절 세 번재 권면 : 여호와의 선하심이 아름다우니 마음과 뜻을 다해 여호와를 섬기라
이스라엘에게 승리 주시고 땅을 주신 선한 일을 다 이루심을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이니, 다른 신을 섬겨 불길한 말씀이 임하여 멸망의 길로 행하지 말고, 여호와를 섬기라 권합니다.
모든 사람이 한번 죽는 것도, 여호와의 선한 말씀이 다 응하는 것도, 불길한 말씀이 성취되는 것도 정하신 이치요 우리도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들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자명합니다. 선한 말씀의 약속들을 믿음으로 붙잡고 날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함이요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그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은 이미 이루신 말씀을 듣고 믿으며 아직 이루지 않은 말씀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오늘을 하나님 앞에서 인도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선하다 아름답다는 히브리어 ‘토브’를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좋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좋은 땅, 아름다운 땅, 선한 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땅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땅이기에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이상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합니다. 이는 신학적인 표현입니.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르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른 신을 섬기면 멸망합니다. 이는 신명기 28장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섬긴다’, ‘멸망한다’는 둘 다 아바드로 발음되나 다른 단어입니다. 다른 신을 ‘아바드’하면 그들이 ‘아바드’합니다.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바드’ 할 것인지, 이스라엘 백성을 ‘아바드’ 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망당하는 것은 헤렘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헤렘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늘 깨어 있어 선한 길로 행해야 합니다.
*
# 거둠의 기도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쉼과 기업을 주시고
원수를 물리쳐 선한 길로 인도하셨으니
마땅히 주님만 바라고 사랑하며 섬겨야 하는 줄 믿습니다.
주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 듣고
유혹과 타협을 물리치고
오늘도 거룩한 그 순종의 길을
끝까지 사랑하며 행할 수 있길 원합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니
그 선한 말씀 붙잡고
오직 여호와만 아바드하길 원합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어리석음을 벗고
오직 주만 섬기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