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2:21-34 하나됨의 증거가 되는 엣제단

여호수아 22:21-34

여호수아 22:21-34 하나됨의 증거가 되는 엣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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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동편 지파들은 중재단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적 결백을 말하고 큰 제단을 쌓은 목적이 후손들의 갈등을 방지하고 요단 동편도 동일하게 여호와의 분깃임을 증거하기 위해 쌓은 것이라는 것을 맗바니다. 이를 좋게 여긴 중제단들을 돌아가 보고하니 즐겁게 여기고 오해를 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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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자 메시지>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인내로 경주하고 주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찬송하길

(여호수아 22: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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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3절,, 코람데오의 자세는 우리 삶을 투명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굳게 믿었고 요단 서편 지파의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 그 의도를 해명하고 이에 오해를 풀고 서로 좋게 여기며 즐거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언행심사를 아시고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뿐더러 불꽃같은 눈동자로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사실이 진실한 자들에게는 힘과 위로가 되지만 불의한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됩니다.

혹여 억울한 일들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닥치더라도 주께서 아시므로 행한 일이나 당한 일들에도 묵묵히 감당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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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9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공동체를 향한 신뢰도 하나됨의 조건입니다.

요단강변에 제단을 쌓은 이유는 자손들에게 여호와 경외하기와 여호와의 분깃을 동일하게 요단동편에도 허락하셨음을 증거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들의 기우였지만 하나님나라에 소속된 것 그 분깃을 지키는 일들 그리고 자손들도 계속 그 안에 거할 수 있길 간절히 원했고 그 증거를 삼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신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의 증거들을 세우는 일이 서로 상반되어 보입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겼고 큰 위기를 초래할 뻔 했습니다. 사전에 그런 기우에 대한 방편을 함께 논의하고 진행했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공동체를 향한 상호 신뢰도 결속을 유지함에 필요합니다. 좋은 의도로 행한 일들 모두 사전에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논의 후에 결정하는 일은 신뢰형성에도 도움이 됩니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 공동체를 세워가는 기본 자세인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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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4절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함께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요단 동편 지파의 해명을 통해서 제단을 쌓은 의도를 좋게 여기고 즐겁게 찬송합니다. 그들의 기쁨은

오해를 푸는 것만큼 요단 동편 지파의 하나님 경외하기와 후손들의 분쟁과 신앙에 대한 강한 기원들이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앙하며 자손들도 주를 잘 따르는 일이 이들의 즐거움과 찬송의 이유였습니다.

지금 나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이 하나님과 신앙의 이유가 아니라 세상적 물질적 헛된 것들을 통해서가 아닌지 돌아봅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헤프닝같은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쁨의 근원 되시는 주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즐거움과 찬송의 이유갖는 믿음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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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늘 주님 앞에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며

언행심사에 진실함을 담게 해 주시옵고,

혹 오해의 소지가 있더라도

진실의 힘을 믿고 진솔하게 대화하며

신뢰를 갖고 타인을 대하기 원합니다.

우리 삶에 주님을 경외하는 것과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에 있어서

헛된 탐욕과 이기를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함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마침내 오해가 풀리고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의

한계를 깨닫게 될 때

기꺼이 생각과 행동을 고치고

마땅히 용서와 화해의 손을 내밀고

형제를 품어 낼 수 있는 용기와 결단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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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수아 22장의 신학적인 의미

1. 합법적 제의 처소. 비교 신 12장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처소는 하나의 장소여야 합니다. 신12장 율법에 의해서 여호수아에서는 그 장소가 실로가 됩니다. 그 외에 다른 곳에 제의 처소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이 그 이후로 지키지 못하고 예루살렘 이외의 다른 산당에서 예배했고 이는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때까지도 그랬습니다. 마침내 요시야때 지방 산당을 다 파괴합니다. 22장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암시하는 본문처럼 다뤄지고 있습니다. 동일한 주제이기에, 합법적 중앙성소의 규정은 중요한 원칙으로 남게 됩니다. 이후 어떤 제의 장소도 예루살렘 외에는 용납하지 않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이집트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가 세워지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이 합법적인 제사장이 아니어서 오염되었기에 율법이 명시하는 사독계 제사장이 이집트에 세우고 진짜 성소라 하고, 합법적 제사장 계열이니 그곳에서 드린 것이 합법적이라 하면서 성소 세우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는 요시야 종교개혁이 이후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2. 이스라엘의 하나 됨(unity)

요단 동편 두 지파 반도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 백성입니다. 열두 지파가 모두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된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12라는 숫자를 강조하는 것은 상징적 의미로 완전성을 의미합니. 이 지파 안에 하나님을 구원하는 모든 백성(이스라엘+언약백성+구원받을 백성까지 다 포함)을 포함한다.

3. 이스라엘의 정체성

앞에서는 혈통적인 문제(라합, 기드온등)다루고, 지리적 문제(어디에 거하느냐가 언약백성의 조건 아니다)를 다룹니다. 유일한 조건은 신앙적인 조건입니다. 야웨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조건하에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는 열려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약의 사도바울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합니. 지리적으로 나라의 경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고백으로 하나의 공동체임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의 공동체 백성이라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개교회중심적인 부분은 깊이 재고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연결된 연합하여 하나님의 선교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적 연합 아니라 지역교회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 나라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사도바울이 편지할 때 모두 지역교회에 편지합니다. 가령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편지할 때 그들 모두가 다 하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4. 대화를 통한 갈등의 해결

종족간의 분쟁은 대화를 통해 해결되어야 합니다. 동서편 지파간의 갈등의 해소과정은 하나의 모델 케이스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혹여 지파간 갈등이 생기면 꼭 이렇게 해야 합니다. 먼저 대표를 뽑아 문제를 파악하고, 합리적 문제 제시해서 모두가 윈윈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의견의 일치를 도출해 가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본문에서 합리적 모델로 제시됩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이후로 이런 모습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 지파간 갈등의 문제 주제가 나오는데 이런 모델을 따르지 않고 무력으로 반응합니다. 왜 그런지 원인을 묻지도 중재나 조정을 거치지 않고 무력으로 반응합니다. 사사기 12장에 에브라임 42,000이 동족을 죽이고, 또 다른 지파도 멸족되는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오늘 대화를 통해 남북간의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 일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대립적 태도는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무력은 또 하나의 무력을 낳을 뿐입니다. 테러는 무력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역사 가운데 악을 악으로, 무력을 무력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될 갈등은 없습니다. 악을 선으로, 폭력을 비폭력으로, 그렇게 중제하고 화해하며 해결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긴급한 시국은 이미 형성된 법치 안에서 공정한 절차를 따라 진행되어야 합ㅎ니다. 이를 어느 한켠이라도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면 법은 결국 힘과 무력과 폭력에 의해 왜곡되고 말아 갈등과 분쟁은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정의가 이루어지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수호하고 응원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불법 부당한 일들에 잘못된 신념을 갖고 자행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속히 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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