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16 지체되는 은총, 그 막막함 너머

요한복음 11:1-16

요한복음 11:1-16 지체되는 은총, 그 막막함 너머의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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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시간표대로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의 ‘지체하심’을 견뎌내며, 절망의 현장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죽으러 가는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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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로부터 슬픈 전갈이 날아듭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3)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 짧은 외침에는 주님이 오시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간절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응은 우리의 상식을 비껴갑니다. 나사로를 사랑하신다면서도, 그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십니다. 이 '이틀의 지체'는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어둠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침묵 앞에 절망합니다. 간절한 기도에도 상황은 나빠지기만 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울 때 우리는 "주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막막한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기적의 단물'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을 대면하길 원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요 11:4) 주님의 지체하심은 방관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어 부활의 신비를 계시하시려는 '거룩한 기다림'입니다.

다시 유대로 가자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술렁입니다. 불과 얼마 전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그곳으로 다시 가겠다는 것은 자살 행위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요 11:9) 빛이신 주님과 함께 걷는다면, 그곳이 설령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유대일지라도 결코 실족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안전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라 하시는 '위험한 현장'으로 발을 내딛는 모험입니다.

이 대목에서 도마의 고백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비록 나중에 흔들릴지언정, 이 순간 도마가 보여준 결기는 신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신앙은 고통을 면제받는 티켓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고통의 심연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행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음을 아시면서도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요 11:15)라고 하신 주님의 역설적인 기쁨은, 이제 곧 제자들이 목격하게 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권능'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삶에도 나사로의 병세처럼 깊어가는 우환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더뎌 마음이 타들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조급함보다 깊고 오묘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단순히 '살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를 '믿게'(요 11:15) 하려 하십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야만 비로소 보게 되는 생명의 빛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도마처럼 고백해 봅시다.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겠습니다." 내 자아를 죽이고, 내 욕망의 시간표를 내려놓고 주님의 뒤를 따를 때, 우리를 가두었던 절망의 무덤은 열리고 생명의 새 아침이 밝아올 것입니다. 지체되는 은총 속에 담긴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신뢰하며, 오늘이라는 낮 시간을 빛 가운데 뚜벅뚜벅 걸어가시길 소망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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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16 지독한 어둠 속에서 발효되는 은총, ‘나사로야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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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시간표에 맞춘 얄팍한 기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캄캄한 암실 속에서도 기어코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와 우리를 깨우시는 주님의 맹렬한 은총에 내 삶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위대한 기다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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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섭던 겨울의 칼바람이 마침내 자취를 감추고,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 아래로 생명의 온기가 스며들어 기어코 연둣빛 새싹을 밀어 올리는 경이로운 봄날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과 짙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생명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늘 신속한 응답과 해결책을 요구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즉각 조치해야 하고, 기도하면 당장 내 눈앞에서 기적이 펼쳐져야만 안심하는 조급함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1장의 서두 역시, 몹시 다급하고 절박한 전갈로 시작됩니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급해진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3). 이 짧은 전갈 속에는, 이 소식을 들으면 주님께서 만사 제쳐두고 당장 달려오실 것이라는 당연한 기대가 담겨 있었습니다. 누이들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마땅히 지금 당장 오셔야 한다’는 모범답안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은 참으로 낯설고 당혹스럽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요 11:4)라고 덤덤히 말씀하시더니, 그들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요 11:5-6). 생명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 이틀을 지체하셨다는 것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철저한 외면이요, 가혹한 침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쓰라린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깊은 ‘묵상’입니다. 김기석 목사님은 묵상이란 단순히 성경의 좋은 구절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에 밑줄을 긋는 것을 넘어, 말씀이 우리 마음에 밑줄을 긋도록 자아를 무방비로 내어드리는 일”이라고 역설하십니다.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원망의 돌멩이를 집어 들고 신앙의 회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묵상은 내 시간표와 내 모범답안을 고집하던 낡은 자아를 허물고, 이 납득할 수 없는 지연조차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더 크고 깊은 은총의 ‘카이로스(결정적 시간)’임을 수용하며 그분의 마음에 주파수를 맞추는 거룩한 머무름입니다.

이틀의 침묵이 끝난 후, 예수님은 마침내 유대로 다시 가자고 선언하십니다(요 11:7). 제자들은 펄쩍 뜁니다. 방금 전까지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했는데 거기를 왜 또 가시냐는 것입니다(요 11:8). 제자들의 눈에 유대 땅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공포의 장소였습니다. 그때 도마가 나서서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도마의 이 말은 비장해 보이지만, 실상은 생명의 주님을 곁에 두고도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있는 인간의 짙은 비관주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주님의 걸음은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니라 살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 도마의 말은 두려움과 절망으로 돌아가는 어두운 언어였지만, 예수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씀은 생명을 창조하셨던 태초의 하나님의 가슴으로 향하는, 펄펄 끓는 생명의 언어였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요한복음 1장의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 존재의 근원은 비루한 절망이나 폭력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이상(理想)’이신 하나님께 맞닿아 있다고 갈파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마저도 ‘잠’으로 규정하시며, 기어코 우리를 그 비루한 무덤에서 일깨우기 위해 살기등등한 유대 땅 한복판으로 당신의 몸을 밀어 넣으셨습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은 왜 내 기도에 침묵하실까?”, “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흠결이 많은데 하나님이 과연 나를 돌보실까?” 하며 깊은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계신 분이 있습니까? 더 적극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초라함 때문에 위축되어 계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위대한 자각은 “일어나 가자(Surgite, eamus)”라는 주님의 초청 앞에,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마처럼 대단한 영웅적 결단을 내리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우리, 상처 입고 죽어가는 우리의 냄새나는 무덤 곁으로, 당신 자신의 생명을 걸고 친히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기꺼이 사지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오시는 주님의 그 맹렬한 은혜 덕분입니다.

이제, 당장 응답이 없다고 조급해하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무언가 번듯한 믿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도 십자가 앞에 모두 벗어 던지십시오. 우리를 깊은 잠에서 깨우기 위해 거친 유대의 돌밭을 걸어오시는 주님의 숭고한 발소리에 영혼의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번 한 주간, 비록 삶의 현실이 더딜지라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사랑의 빛 안에서 넉넉한 자유와 위로를 누리시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캄캄한 ‘사진 암실(Darkroom)’에서 한 장의 사진을 현상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암실은 숨 막히도록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때로는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그 짙은 어둠의 시간, 그리고 화학 용액 속에 푹 잠겨 기다리는 그 인고의 지연이 없다면, 필름에 새겨진 본래의 형상은 결코 세상 밖으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캄캄한 암실 속에 갇힌 것 같을지라도, 바로 그 기다림의 묵상 속에서 주님의 은총이라는 인화액이 스며들어, 마침내 우리 영혼에는 세상 어떤 것보다 찬란하고 눈부신 생명의 빛이 아로새겨지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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