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7-27
요한복음 11:17-27 마지막 날의 신화에서 ‘지금’의 생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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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죽음 이후의 막연한 보상을 기다리는 ‘미래의 신념’에 갇히지 않고, 지금 내 곁에 계신 주님을 통해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신비를 오늘 여기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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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의 공기는 무겁고 서늘합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 유대인들의 정서 속에서 ‘나흘’이란 영혼마저 육체를 떠나버린 완전한 절망의 시간입니다. 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마르다가 달려 나갑니다. 그녀의 첫마디는 원망 섞인 탄식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이 탄식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계셨더라면’이라는 과거의 가정 속에 머물며, 이미 닥쳐온 불행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집니다.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 마르다의 신앙은 정통적이고 올바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부활은 ‘먼 미래’에 일어날 교리적 사건일 뿐, 지금 당장 그녀의 슬픔을 뚫고 들어오는 생동하는 힘은 아니었습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며 산다고 비판했습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 이후의 천국에만 매몰될 때, 우리는 정작 오늘 우리 삶의 자리를 잠식하고 있는 허무와 절망의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합니다.
주님은 마르다의 시선을 ‘나중’에서 ‘지금’으로, ‘지식’에서 ‘존재’로 옮겨놓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것은 시간의 연대기를 뛰어넘는 영원의 선언입니다. 부활은 나중에 일어날 어떤 현상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와 잇대어 있는 상태 그 자체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이는 이미 죽음의 권세를 넘어선 존재입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미래의 보상을 담보로 오늘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평화를 오늘 내 비루한 일상 속으로 끌어오는 도약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신앙에 회의가 찾아오거나 삶이 죽음처럼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관념의 세계로 초대하지 않으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무덤 같은 절망에 갇혀 있을 때, 그 돌문을 두드리며 “지금 일어서라”고 말씀하시는 생생한 현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대단한 신학적 확신을 묻지 않으십니다. 그저 슬픔의 한복판에서 그분을 신뢰하며 고개를 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마르다는 비로소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이 고백은 죽음의 권세 앞에 던지는 생명의 선전포고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고백을 우리의 호흡으로 삼읍시다. 마지막 날의 신화에 안주하지 말고, ‘지금’ 내 곁에서 숨 쉬시는 주님의 생명을 누립시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절망한 이의 손을 잡을 때, 베다니의 무덤가에는 이미 부활의 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그 눈부신 생명의 사귐 속으로 우리 함께 나아갑시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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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17-27 닫힌 교리의 무덤을 여는 현재적 생명,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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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막연한 교리적 정답에 갇혀 무기력하게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한복판인 ‘지금 여기’로 찾아오신 주님을 마주하고 그분의 은총을 호흡하며 매일의 일상을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묵상’으로 채워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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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땅을 헤집고 피어난 봄꽃들이 온 세상을 화사하게 물들이는 경이로운 계절입니다.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 아래로 보이지 않는 생명의 수맥이 흘러 마침내 생동하는 봄을 마주하듯,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모호한 현실 속에서 흔들리며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들의 영혼에도 하늘의 찬란한 생명이 깃들기를 평화의 주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불쑥불쑥 찾아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1장의 베다니 마을 역시 짙은 죽음의 그림자와 탄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갇힌 지 나흘이나 지나, 마르다의 마음은 이미 체념과 절망으로 굳어버렸습니다. 그녀는 뒤늦게 도착하신 예수님을 향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라고 토로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답합니다. 그녀의 대답은 교리적으로 완벽한 정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답은 현재의 찢어지는 아픔을 조금도 위로하지 못하는 차갑고 무기력한 지식에 불과했습니다.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에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수직적인 신학의 앙상한 틀에만 갇히지 말고,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즉 수평적 시선과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고 통찰합니다. 마르다는 자신이 가진 ‘미래의 부활에 대한 교리적 지식’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었기에, 바로 눈앞에 서서 슬픔의 자리에 동참하고 계신 현재적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주저앉아 있을 때,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인하지만 정작 내 비루한 일상 한복판에서는 그 능력이 역사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해버리지는 않습니까?
이토록 무기력한 우리를 향해 예수님은 당신의 온 존재를 걸고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기주 작가는 일찍이 언어의 본질을 살피며 "말은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르다의 말은 율법과 교리에 갇혀 슬픔을 애써 누르는 차가운 얼음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 선언은, 죽음이라는 가장 끔찍한 한계를 단숨에 녹여버리는 펄펄 끓는 생명의 온도였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요한복음 1장의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는 구절을 강독하며, 우리 존재의 근본은 비루하고 남루한 폭력이나 죽음이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이상(理想)'이신 하나님께 맞닿아 있다고 갈파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질병과 죽음으로 망가진 우리의 삶을 태초의 그 아름다운 생명의 기원으로 다시 돌려놓으시겠다는 창조주의 비장한 약속이었습니다.
이 뜨거운 생명의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누리기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김성희 교수는 "묵상은 생명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조에)은 단순히 살아 있는 생물학적 상태가 아니라, 구원의 다른 이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거하는 방식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또한 김기석 목사님은 "묵상은 걷기다"라고 하셨습니다. 홀로 말씀을 대면하며 하나님과 대자연,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진실한 만남을 향해 걸어가는 고독하지만 위대한 여정입니다.
묵상은 성경을 읽고 교리적인 모범답안을 도출해 내는 건조한 작업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처럼 악취 나고 절망적인 내 삶의 자리로 찾아오신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잇대어지고, 그분이 주시는 생명을 호흡하며 오늘이라는 좁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치열한 관계의 이음입니다.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굳은 이성을 깨뜨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고단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신앙생활의 동력을 잃어버린 것 같을 때가 있습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 때문에 회의감에 사로잡혀 계십니까? 그러나 한동일 선생의 권면을 기억하십시오. 꽉 꼬여버린 매듭 같은 현실 속에서도, "인간은 자기 삶의 주석자, 해석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의 렌즈로 우리 삶을 새롭게 해석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리적으로 완벽한 지식이나 무결점의 도덕을 갖추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냄새나는 무덤 같은 현실 속에서 울고 있는 우리 곁으로 다가오셔서,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온전히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우리를 내어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흔들릴 때조차 주님은 "내가 바로 너의 부활이고 생명이다"라며 우리의 곁을 든든히 지켜주십니다.
이제 앙상한 교리라는 차가운 상자 속에 주님을 가두었던 우리의 낡은 습관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읍시다. 무언가 훌륭한 헌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도 벗어버리십시오. 이번 한 주간, 우리 삶의 가장 따뜻한 해석자가 되어 주시는 주님의 그 생명력 넘치는 말씀 안에 머물며, 절망 속에서도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숨결을 깊이 들이마시는 벅찬 은혜가 여러분의 일상에 가득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강물 아래서 조용히 숨 쉬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겉보기에 세상은 차가운 죽음과 단절로 덮여 있는 듯하지만, 두꺼운 얼음 밑 깊은 곳에는 얼지 않는 맑은 물이 도도히 흐르며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슬픔의 냉기로 가득 차 무기력해 보일지라도, 생명이신 주님과 잇대어 묵상하며 호흡하는 영혼은 결코 얼어붙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깊은 은총의 흐름 속에서 견디다 보면, 마침내 따스한 봄볕이 얼음을 녹이고 찬란한 자유의 은빛 물결 위로 솟구쳐 오르는 부활의 기쁨을 필연코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