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28-37
요한복음 11:28-37 신의 눈물, 고통의 심연을 비추는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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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는 차가운 논리가 아니라, 함께 울어주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통해 우리 존재의 비참함을 위로받고 일어나는 사랑의 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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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니의 슬픔이 깊어만 갑니다. 오라비 나사로를 잃은 마리아가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에 급히 달려 나갑니다. 그녀는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립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32). 이것은 마르다가 했던 말과 같지만, 마리아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이 말은 더 깊은 비통함과 절망의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늘 속수무책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그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아 우는 것뿐입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지만 강렬한 한 문장,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이것은 성서에서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신적인 순간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가진 분이 왜 우셨을까? 그것은 죽음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깊은 공감이자, 사랑하는 자를 잃은 이들의 고통 속으로 당신을 완전히 밀어 넣으신 사랑의 육화(肉化)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고난으로부터의 도피나 정답 찾기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이런 불행이 일어나는가"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는 차가운 관찰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곁에 다가와 흙먼지 묻은 발을 씻겨주시고, 우리의 통곡 소리에 가슴을 떨며 함께 눈물 흘리시는 분입니다.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통받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삶이 너무 아파서 기도의 말조차 나오지 않을 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곁에는 여러분보다 더 깊이 흐느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기적'을 행하기 이전에 '공감'으로 먼저 찾아옵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어떤 열광적인 행위가 아니라, 나를 위해 흘리시는 그분의 눈물자국을 발견하고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위로에서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은 수군거립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요 11:37). 그들은 능력의 유무를 따졌으나, 마리아는 사랑의 현존을 보았습니다. 기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주님의 눈물은 이미 죽음의 독기를 중화시키는 생명의 약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누군가의 아픔 곁에 머물며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됩시다. 논리적인 설명보다 따뜻한 곁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의 길입니다. 그 눈물겨운 사랑의 연대 속에서 우리를 가두었던 무덤의 돌문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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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28-37 정답의 폭력을 녹이는 위대한 눈물, 그 곁을 내어주는 거룩한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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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며 정답을 찾으려는 차가운 이성을 내려놓고, 우리의 캄캄한 슬픔 곁으로 다가와 함께 눈물 흘리시는 주님의 ‘콤파씨오(Compassio)’에 기대어 우리의 찢긴 삶을 은총의 이야기로 엮어가는 치열한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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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섭던 겨울의 칼바람이 마침내 잦아들고,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 아래로 생명의 온기가 스며들어 기어코 연둣빛 새싹을 밀어 올리는 경이로운 봄날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과 짙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진리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생명이신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언제나 빠르고 명쾌한 ‘해결책’을 요구합니다. 누군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조차, 사람들은 슬픔 곁에 고요히 머물러 주기보다는 원인을 분석하고 섣부른 조언을 던지려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1장의 베다니 마을 역시,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 쏟아내는 인간의 탄식과 차가운 논리들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오라비 나사로를 잃은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울부짖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32). 마리아의 눈물에는 주님의 부재에 대한 깊은 야속함이 배어 있습니다.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 역시 수군거립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요 11:37).
그들의 반응은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고통 앞에서 우리는 늘 “만약 ~했더라면”이라는 가정법에 갇히거나, 신의 능력을 의심하며 인과관계를 따져 묻곤 합니다. 자끄 엘륄의 사상을 묵상한 찰스 링마는 “일반화는 의미를 파괴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송민원 교수의 통찰처럼,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대할 때 수직적인 신학의 앙상한 틀이나 교리적 모범답안으로 그 상황을 일반화해 버리면, 정작 눈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구체적인 ‘사람’은 지워지고 맙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기적이라는 과거의 스펙을 잣대 삼아 현재의 죽음을 논리적으로 재단하려 했을 뿐, 그 참담한 슬픔 한가운데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란스러운 논리와 원망 앞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뜻밖의 반응을 보이십니다.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사 불쌍히 여기시며(요 11:33), 마침내 이렇게 행동하십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말씀 한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전능자가, 굳이 그 냄새나는 무덤 앞에서 사람들과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계십니다. 김승희 시인은 〈배꼽을 위한 연가〉에서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당신의 배꼽을 보여준다면, 나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 시장하셨다거나 피곤해하셨다는 성경의 구절 앞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낍니다. 주님이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뻘밭 같은 현실의 밑바닥을 뒹굴며 함께 아파하시는 분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위대한 가치를 ‘콤파씨오(compassio)’, 즉 타인의 고통을 함께 겪어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바로 이 콤파씨오의 절정입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밧줄을 던져주며 알아서 기어 올라오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친히 우리가 갇힌 슬픔의 감옥 속으로 걸어 들어와 우리와 함께 오열하시는 분입니다.
이 뜨거운 주님의 눈물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의 여정』에서 박대영 목사는 묵상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공한 경력들(스펙)만으로는 이야기가 형성되지 않는다. 묵상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써 내려가는 우리의 순례 스토리(Story)다.”.
묵상은 성경 구절을 이리저리 조립하여 내 삶을 포장하는 '서사기술자'의 건조한 작업이 아닙니다. 내 상처와 눈물, 내 실패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나를 위해 울어주시는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 속에 나의 남루한 일상을 포개어 넣는 치열한 여정입니다. 찰스 링마의 말처럼,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키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이므로 언제나 자아를 깨뜨리는 ‘위험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말은 귀소 본능을 지닌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눈물은 어떠할까요? 눈물이야말로 가장 깊은 영혼의 귀소 본능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서로를 평가하고 찌르는 차가운 얼음장이었지만, 주님의 눈물에는 상처 입고 버려진 영혼들을 당신의 품으로 온전히 돌려세우시려는 펄펄 끓는 생명의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때로 삶이 너무 버거워 “주님, 왜 제가 기도할 때 그곳에 안 계셨습니까?”라고 원망하며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나의 믿음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져 위축될 때가 있습니까? 더 뜨겁게 헌신해야 한다는 종교적 강박감이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그 무거운 잣대를 모두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에게 완벽한 신학적 지식이나 흔들림 없는 강인함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슬픔으로 무너져 내린 여러분의 곁에 조용히 다가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며, “네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다”라고 속삭여 주실 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훌륭한 스펙을 쌓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스토리를 당신의 눈물로 닦아내어 기어코 부활의 생명으로 빚어내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한 은총 덕분입니다.
이번 한 주간, 섣부른 정답으로 타인을 재단하던 낡은 습관을 버리고, 눈물 흘리는 이웃의 곁을 조용히 내어주는 거룩한 연대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깨어진 도자기의 틈새를 금(Gold)으로 메워 더 아름다운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킨츠기(Kintsugi)’의 수선 과정과 같습니다. 세상은 상처 나고 깨어진 삶을 실패라 부르며 폐기 처분하려 하지만, 예술가이신 주님은 우리의 부서진 조각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과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흘리신 ‘눈물’이라는 가장 고귀한 순금으로 우리의 깨어진 틈을 다정하게 이어 붙이십니다. 내 힘으로 상처를 숨기려 애쓰지 말고 주님의 손에 나를 온전히 내어맡길 때, 우리의 찢기고 남루한 일상은 세상 어떤 무결점의 그릇보다 찬란하고 유일한 은총의 작품이 되어 눈부시게 빛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