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포구에서 듣는 신성(神性)의 파도 소리

요한복음 10:22-42

요한복음 10:22-42 겨울 포구에서 듣는 신성(神性)의 파도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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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은 나를 증명하려는 논리의 성벽을 허물고, 주님의 손이 내미시는 사랑의 신비 앞에 무릎을 꿇는 존재의 귀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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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수전절의 찬 바람이 성전 솔로몬 행각을 휩쓸고 지나갈 때, 사람들은 예수를 에워싸고 날 선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요 10:24) 그들의 목소리에는 명료한 답을 원하는 조급함과, 자기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예수를 향한 냉소가 서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는 표징과 귀에 들리는 명쾌한 정의(定義)를 구하지만, 진리는 논리의 정합성이 아니라 삶의 공명 속에서만 그 얼굴을 드러냅니다.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5) 문제는 말의 부재가 아니라 듣는 마음의 부재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일을 보면서도 그것을 자기들의 '상식'이라는 자로 재단하려 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사랑은 간청하는 것이 아니요, 스스로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이라 했습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은 대개 하나님을 증명하려 애쓰지만, 신앙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손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그 음성은 뇌를 자극하는 정보가 아니라 영혼을 울리는 심연의 떨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선포하셨을 때, 사람들은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성을 말하는 것을 그들은 신성모독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시편의 말씀을 빌려 우리 모두를 향한 놀라운 선언을 들려주십니다.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요 10:34) 이것은 인간의 오만을 부추기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 안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으며, 우리가 주님의 일을 행할 때 우리 또한 거룩한 신성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눈물겨운 초대입니다. 적극적인 신앙이란 종교적 열심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세상을 향해 자비의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인생의 겨울을 지나며 마음이 꽁꽁 얼어붙어 있지는 않습니까? "내 손에서 빼앗을 사람이 없느니라"(요 10:28) 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연약한 우리는 늘 흔들리고 넘어지지만, 우리를 붙드신 하나님의 손은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은혜는 우리가 자격을 갖추었을 때 찾아오는 보상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비천한 자리에 있을 때 우리를 '신성한 자녀'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정입니다.

살의가 가득한 성전을 떠나 예수는 다시 요단 강 저편, 처음 세례받으시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화려한 예루살렘의 종교적 수사(修辭)를 뒤로하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소박한 자리에서 비로소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화려한 말의 성벽을 내려놓고, 우리 존재의 시원인 주님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세밀한 음성을 들을 때, 우리 삶은 비로소 겨울의 황량함을 뚫고 피어나는 생명의 꽃이 될 것입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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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22-42 차가운 증명의 돌을 내려놓게 하는 따뜻한 음성, 그 ‘영원한 품’에 안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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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내 입맛에 맞는 정답을 요구하며 돌을 집어 드는 종교적 교만을 버리고, "누구도 내 손에서 너희를 빼앗을 수 없다"고 선언하시는 선한 목자의 음성을 내 영혼에 깊이 ‘새김(묵상)’으로써 영원한 안전을 누리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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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섭던 겨울바람이 마침내 물러가고,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 아래로 생명의 온기가 스며들어 기어코 연둣빛 새싹을 밀어 올리는 3월의 경이로운 봄날입니다. 저마다의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지고 오늘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오신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모호함과 짙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진리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께 생명이신 주님의 평화를 전합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증거와 성과를 요구합니다. 자격을 증명해 내지 못하면 가차 없이 밀려나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늘 긴장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 10장 후반부의 예루살렘 성전 풍경 역시, 예수를 향해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서늘한 적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는 수전절(Hanukkah), 곧 유대인들이 시리아의 압제에서 성전을 탈환한 것을 기념하는 빛의 축제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짧고도 의미심장하게 덧붙입니다. “때는 겨울이라”(요 10:22). 축제의 불빛은 휘황찬란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솔로몬 행각을 거니시는 예수님을 에워싸고 다그칩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요 10:24).

그들의 질문은 진리를 향한 순수한 갈망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에게 세속적인 번영과 권력을 안겨줄 강력한 메시아, 즉 자신들의 기대치에 맞는 정치적 구원자인지를 증명해 보라는 일종의 협박이었습니다. 송민원 교수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진리를 대할 때, 이미 자기 안에 확고하게 설정해 놓은 ‘모범답안’을 확인하려 하거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들으려는 얄팍한 종교적 욕망을 비워내야 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욕망이라는 틀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렸기에, 정작 눈앞에서 생명의 샘을 긷고 계신 참된 목자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닦달하는 무리를 향해 예수님은 당신의 양 떼를 향한 비장한 선언을 내놓으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유대인들이 쏟아낸 말은 율법과 교리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차가운 얼음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 말씀에는 벼랑 끝에 선 연약한 영혼들을 기어코 살려내어 품으시려는, 펄펄 끓는 가장 뜨거운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때로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나는 왜 늘 세상의 유혹에 쉽게 흔들릴까?”, “이렇게 부족한 나도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며 깊은 회의와 자책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남들처럼 적극적이고 번듯하게 헌신하지 못해 스스로가 초라하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양에 불과한 우리가 얼마나 똑똑하게 길을 잘 찾고 목자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손아귀 힘은 피곤하면 이내 풀려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어떤 상황에서도 너를 놓지 않겠다”며 우리를 꽉 움켜쥐신 전능하신 목자의 손, 그 맹렬한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응답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향해 유대인들은 결국 땅에서 돌을 들어 치려 합니다(요 10:31). 내 상식과 욕망에 부합하지 않는 진리 앞에서 그들은 스스로 성찰하기보다 진리를 죽이려는 폭력을 택했습니다. 혹시 우리도 내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혹은 나와 생각이 다른 이웃을 향해 슬그머니 정죄와 원망의 돌멩이를 집어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차가운 정죄의 돌멩이를 내려놓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을 뜨는 일입니다. 한동일 변호사가 성경을 강독하며 맹인 바르티매오의 부르짖음을 빌려 고백했던 기도를 기억해 봅니다. “랍보니, 우트 비데암(Rabboni, ut videam.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눈을 뜨고 있다고 자부했던 자들은 영적 맹인이 되어 예수께 돌을 던졌지만, 자신이 맹인임을 자각한 자는 은총을 구했습니다. 한동일 변호사는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위대한 자각이 바로 “나는 은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이라고 역설했습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은총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 벅찬 은혜를 우리 삶의 현실로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구약학자 차준희 교수는 『묵상을 다시 생각하다』에서 묵상을 가리켜 “새김”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묵상은 머리로 지식을 채우는 사변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거칠고 소란한 세상 한복판에서 잠시 멈춰 서서 “아무도 너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는 주님의 그 다정한 음성을 내 영혼의 피와 살이 되도록 씹고 또 씹어 내면에 깊이 새겨 넣는 거룩한 저항입니다.

예수님은 돌을 든 자들의 적의를 피해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 세례를 베풀던 초심의 자리로 물러가 거하셨습니다(요 10:40).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언가를 완벽하게 해내서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무거운 강박을 십자가 앞에 모두 벗어 던지십시오. 차가운 잣대로 서로를 다그치는 증명의 요구도 멈추십시오. 비록 우리의 일상이 여전히 모호하고 때로 흔들릴지라도, 크신 두 손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는 주님의 품 안에서 참된 쉼을 얻으십시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소음에는 귀를 닫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자의 음성을 깊이 새기며 평안의 항구로 나아가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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