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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ul 17. 2017

민수기 16:25-35 광야학교의 엄중한 퇴학 처분

민 16:25-35

민수기 16:25-35 광야학교의 엄중한 퇴학 처분


대화를 거부하고 오지 않은 르우벤 자손에게 모세는 장로들과 함께 직접 간다. 이어  모세의 중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부응하기 위해 회중을 반역의 무리에서 떠나게 하고 하나님께서 새일을 통해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자 땅이 갈라져 반역의 무리들을 삼키고 분향한 무리들을 불사른다.


* 16장의 두개의 반역 사건 :

 - 첫번째 반역(1-40절) : 고라, 다단, 아비람, 온, 250명의 지도자들

 - 두 번째 반역(41-50절) : 온 회중


25-27절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신다.

  22-24절에서 모세와 아론의 중보에 따라 하나님은 회중을 반역의 무리에서 떠나도록 명하셨다. 이에 모세는 다단과 아비람에게 장로들과 함께 가서 회중들에게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아무것도 만지지 못하게 한다. 이에 무리들는 떠나지만 다단과 아비람은 오히려 처자식을 데리고 자신들의 장막문에 선다.

  반역한 무리들의 선동에 동조한 무리들이 부화뇌동할 것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헤렘을 작정하셨으나 모세와 아론의 중보에 마음을 돌이키사 회중들에게 기회를 주신다. 성막의 남편에 진을 친 반역의 무리들(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에게 장로들과 함께 간다. 이는 모세가 자고하며 군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함과 동시에 이 일을 독단적으로 경거망동한 것이 아니라 동역자들과 함께 신중하게 처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가서 회중들에게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을 만지지 못하게 한다. 이미 반역한 무리들은 필경 망할 악인들로 정의하고 그들의 물건을 멸할 것이기에 만지지 못하게 한다. 헤렘(진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악인과 함께 멸망할 것이고 하나님의 소유물이기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악인들에게서 떠나지 않고 그들의 물건을 접촉하는 일은 결국 악인의 길에 물들고 동일하게 반역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무리들이 순종하고 떠난다. 하나님은 심판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하지만 반역한 무리들은 처자식까지 데리고 나오면서 여전히 대항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하고 돌이킬 기회를 외면한다. 패역함과 강퍅함은 결국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는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날마다 주의 말씀을 주야로 즐거이 묵상하는 자다. 하나님의 경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고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다. 하나님이 긍휼에도 여전히 자신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대적하는 일이고 결국 망하는 길이다. 지금 나의 언행심사에 이러한 강퍅함은 없는가?


28-30절 여호와 하나님은 새 일을 통해 심판의 주권을 행하신다.

 모세는 앞으로 진행되는 심판이 여호와께서 자신을 보내 행하신 것임을 알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반역자들의 죽음과 벌이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새 일 곧 땅이 입을 열어 삼켜 산채로 스올에 빠지게 하실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들이 결국 여호와를 멀시한 것임을 회중들이 알게 되리라 말한다.

  출애굽과 시내산, 십계명과 성막, 그리고 광야 여정까지 모세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께서 자신을 보내셔서 행하신 것이지 임의로 한 것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다. 이제 반역한 무리들을 심판하는 일도 마찬가지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기에 그 증거가 분명함을 역설한다. 모든 사람들이 죽고 벌을 당하는 보편적인 죽음과 벌이 있는데 지금 이 반역의 무리들은 땅이 입을 열어 삼켜 스올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곧 지진과 같은 형태로 보인다. 이토록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이들의 반역이 결국 모세와 아론의 정치적 제사장적인 권위에 도전한 것이 하나님을 반역 하고 멸시하는 것 곧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기도의 응답과 역사는 우리가 미처 계산하지도 예측하지도 못하는 방법으로도 역사하고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 광야학교를 살아가는 방식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다. 언행심사 또한 거룩한 백성 답게 부르시고 보내신 이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다. 사람을 세우는 일 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임의로 행할 때 그것은 곧 모든 만물의 주되시는 주님의 주권을 멸시하는 것이며 우리의 욕망을 따라 우리 스스로 왕이 되려는 반역과도 같은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 마련이다. 매일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바로 이 정치적인 부분이다. 누가 우리의 왕이냐는 것이며, 나의 삶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 늘 확인하는 것이다. 심판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다만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 깨닫길 기도하고, 깨달을 후에는 또 그 뜻에 순종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새 일을 기대하면서도 모든 심판의 주권이 주님께 있으니 행한대로 심는 대로 거두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부르신 그 뜻을 따라 오늘도 충성된 발걸음으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31-35절 여호와 하나님은 땅을 가르고 불을 살라 심판하신다. 

  모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땅이 갈라져서 반역한 무리들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자 산채로 스올에 빠지고 땅이 그 위에 덮인다. 온 이스라엘이 두려워하는데 또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반역의 무리 중에 분향한 250명도 함께 불사른다.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셨을 뿐 아니라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함께하시며 역사하셨다. 심각한 반역을 처리하는 모든 과정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모세의 믿음에 하나님은 부응해 주셨다. 모세 임의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신 것이다. 지진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면서 순식간에 땅이 갈라지도 반역의 무리들을 삼켜버린다. 가히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회중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두려워 한다. 단순한 두려움과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이유를 두 눈으로 목도하며 배우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진행된 250명에 대한 심판은 성막에 다른 불을 켜다가 죽은 나답과 아비후와 유사하다. 결국 제사장 직을 탐하다가 나답과 아비후처럼 불에 타 죽은 것이다. 조상들의 신앙에 대한 유산을 물려받고 신앙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었더라면 지금 이들이 분향하는 다른 불과 행위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탐욕으로 눈먼 이들의 판단력은 흐려졌고, 기억은 쇠하였으며, 뵈는게 없고 오로지 탐욕으로만 점철되다 망하게 되는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변개치 않으시고 소멸치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미 역사적으로 성취된 수많은 예언들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과 바른 길로 행해야 할 여정을 더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어느새 나태와 기만과 게으름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여정에서 딴 길로 나가거나 외면하거나 소홀함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 눈앞에 진행되는 하나님의 역사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하고,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잘못된 불신앙의 전철을 밟지 않고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좋은 본을 보여 바른 길로 행하며 바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 기도

심판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심판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지금 강퍅한 심령으로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는 죄를 깨닫게 하소서

우리이 모든 언행심사가 부르시고 보내신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우리가 임의로 행치 않길 원합니다.

주님을 향한 경외를 회복하고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처신하는 삶이게 하옵소서.



* 김경열교수 묵상 팁

고라 이야기는 갑자기 장면이 바뀌면서 두 가지 사건이 교차로 등장합니다. 고라 일당의 성막 입구에서 쿠타테 장면과 다단/아비람의 장막 현장에서 시위 장면입니다.

그래서 비평학자들 대부분은 이 이야기를 P와 JE 기사의 짜집기로 분석한다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아선 안된다고 설명드렸어요.

내일 본문도 그래요. 이야기의 흐름은 갑자기 모세가 장로들을 이끌고 다단과 아비람에게 찾아가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모든 반역자들이 회막 앞에 운집해 있었는데 그들은 어느 순간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간 것이죠.

본문은 그 과정은 언급하지 않고 침묵하나 아론 가문의 제사장 권에 도전한 고라와 250명의 무리만 회막 앞에 여전히 남아 있고, 모세의 정치적 지도권에 반기를 든 다단과 아비람이 진영 내의 자신들 구역으로 돌아가 모반을 계속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라 이야기에 다단/아비람 자료가 갑자기 끼어든 결과로 보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단절되고 모순되며 엉뚱하기 까지 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민수기 저자에 대한 큰 모독입니다. 설사 편집되었다해도 그렇게 어설픈 수준 이하의 편집자가 아니기 때문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모세의 작품으로 당연시 하구요.

몰살 심판이라는 무서운 두 재앙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발생합니다. 이 두 종류의 몰살 심판 또한 두 자료의 증거라 제시됩니다.

하지만 아제 말씀드린대로 고라가 주도한 그 반역은 두 경로(two track)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설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죠.

고라 일당은 제의적 권력의 찬탈이 목적이고 다단/아비람은 정치적 권력의 교체가 목적입니다. 물론 모세-아론 둘 다를 뒤엎어야 그들의 목적이 성공을 거두죠. 여기서 궁극의 권력자는 물론 모세죠.

따라서 고라 일당의 반역도 모세에게 초점이 맞춰 있지만, 그를 끌어 내려 아론 가문의 제사장 권을 빼앗아 올려 한 것이죠.

하지만 고라 가문도 고핫 자손에 속하여 아론과 모세와 같은 집안 사람들입니다. 레위의 세 가문, 고핫, 므라리, 게르손 가문 중에서 고핫 자손이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은 레위인들이죠. 그들은 성막의 중요한 비품들을 책임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직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론 가문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진 제사장 직분을 욕심 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도다"고 꾸중한 것이죠.

다단과 아비람은 르우벤 가문에 속합니다. 르우벤이 장자였는데 그 장자권이 요셉에게 넘어가 빼앗기죠. 하지만 기득권은 이토록 무섭습니다. 다단과 아비람은 그것을 수긍하지 못하고 장자의 자격을 회복하려 하면서 권력 교체를 시도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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