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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ul 18. 2017

민수기 16:36-50 광야학교의 기념물과 전염병

민 16:36-50

민수기 16:36-50 광야학교의 기념물과 전염병


여호와께서는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반역자들이 드린 향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어 기념물로 삼으라 하시고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이튿날에는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염병이 시작되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는다. 


* 16장의 두개의 반역 사건 : 

 - 첫번째 반역(1-40절) : 고라, 다단, 아비람, 온, 250명의 지도자들

 - 두 번째 반역(41-50절) : 온 회중


36-40절 십자가는 우리 죄악의 증거요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증표다.

  여호와께서는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불법적인 불을 담아 다른 곳에 쏟으라 하시고, 향로는 여호와께 드린 것이기에 거룩하게 되었으니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한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것을 보고 여호와 앞에 함부러 분향하지 못하게 하고, 반역자의 무리들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신다.  

  다른 불, 다른 향로를 가지고 여호와 앞에 섰던 반역의 무리들을 불로 태우신 후에 남은 향로를 다 수거해서 잘못된 불은 다른 곳에 쏟아 버리고 놋 향로는 거룩하기에 제단을 싸는 철판을 만들라 하신다. 비록 반역의 무리들이 가져온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헤렘을 명하셨기에 하나님의 것이며, 기록 그들이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놋 향로를 가져다가 녹이는 것이 아니고 쳐서(두드려 펴서 펴는 방식) 만들었다고 말한다(38, 39절). 결국 이스라엘은 이 기념물을 통해서  죄악의 결과를 기억하게 하고,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러 성막에 갈 때마다 이것을 보며 기억해야 했다. 자신들의 조상이며 이웃이었던 자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자신들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했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실하게 순종하사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신 십자가이다. 우리의 죄악의 증거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증표가 십자가인 것이다. 


41-42절 원망은 모든 관계를 깨뜨리고 잃게 하는 심각한 죄악이다. 

  고라와 반역의 무리들이 죽은 지 하루만에 이번에는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이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치려 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 나타난다.

  고라의 반역이 공동체를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는 행위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분노케 하는 사건인지 인지하지 못한 무지한 회중들, 그리고 이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주도적인 집행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결국 눈에 보이는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치려 한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치는 것은 결국 보냄을 받은 자는 이들을 보내신 자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백성의 원망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며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고 하나님을 향한 정면 도전인 셈이다. 이미 반역의 무리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목도하고도 기어이 회중들까지 그들의 원망이 전염된 것이다. 이와 같이 원망과 불평 그리고 잘못된 폭력은 결국 공동체를 파괴하고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여 자멸하게 하는 심각한 죄악이다. 

  권위주의는 잘못된 것이지만 위로부터 오는 권위에 순종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점검해야 하는 부분이다. 위로부터 오는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분별할 때 우리는 그 권위를 세워주고 보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 속에서 개인과 일부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차이가 있어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거나 진행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을 때, 한편으로 자신의 욕심이나 조급함들이 작용할 때 우리는 원망하거나 불평하고 심지어 폭력을 통해서 자신들의 욕망을 분출하고 이루려 한다. 지금 우리가 소속된 공동체에는 권위를 인정하고 서로 사랑하며 어린 영혼들을 향하여서는 돌봄과 나눔과 섬김이 있을 때라야 아름답게 세워져 갈 수 있다. 이 부족함들을 메우는 일이 성실하게 이행 되면 공동체가 아름답게 서지만 조금이라도 욕심을 낸다면 그 공동체는 아름답게 세워질 수 없다. 우리의 원망과 불평과 폭력의 근본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타인과 위의 권위에만 문제를 삼지 말고 나의 신앙과 삶에 탐욕과 조급함이 기인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43-46절 사랑할 수 없을 때에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참사랑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 나타나자 모세와 아론은 급히 회막앞에 이른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들을 멸할 것이니 회중에게서 떠나라 명하신다. 그러자 다시 또 모세와 아론은 엎드려 기도한다. 그리고 모세는 급히 아론에게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불을 담고 향을 피워 급히 회중에게로 가라 한다. 염병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명한 것이다. 

  여호와의 명을 따라 진행중인데 눈이 어두운 회중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자 급히 회막 앞으로 나간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인이 더 우선되고 주님의 뜻이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반응해야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회중을 멸하시려고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부분이지만 그런다고 모세와 아론보다 이 백성을 덜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아론의 마음보다 훨씬 더 이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세와 아론은 이번에도 기도한다. 중보적 기도로 보인다. 하나님 아버지에게 긍휼을 구할 때 하나님은 사랑에 눈먼 이처럼 또다시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이를 악용하거나 오용해서 죄에서 자유함이 아니라 죄와 더불어 방종하는 이들은 어리석은 자이다. 

  회중에게서 염병이 발생하자 모세는 아론에게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불에 향을 피워 회중 가운데로 보낸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속죄하라 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행한 중보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45절과 46절 사이의 긴박한 순간에 기도와 응답이 교차되고 수동적 기다림에서 적극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모세아 아론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기도에 대한 긴박함을 점검하게 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뜻을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 이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그 뜻을 알고 난 이후에는 긴박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들을 향하여 원망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대해 무지하며,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려는 무지한 회중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행동하는 모세와 아론의 모습에는 참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일은 세상도 한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길을 가셨고, 오늘 우리에게도 이 참사랑을 경험하고 받고 소유했으니 그렇게 우리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라신 그 길로 가길 원하신다. 그 길이 참사랑의 길이며 온전한 자 사랑의 성도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참사랑을 알고 받고 경험한 만큼 나누고 전할 수 있다. 받은 복을 찾아보고 세어보라. 


47-50절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입은 치료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분이시다.

  아론은 모세의 명을 따라 향로를 가지고 회중에게로 가서 백성을 위해 속죄하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있을 때 염병이 그친다. 이 일로 만 사천칠백 명이 죽는다. 아론은 회막 문 모세에게로 돌아온다. 

  아론이 회중 가운데로 가는 일은 회중을 치는 여호와의 역사에 함께 죽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런데 긴박한 상황 속에서 순종하며 명한대로 나아간다. 전염병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것이지만 회중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모세와 아론의 마음과 같다. 모세가 속죄를 위해 아론을 급히 보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보여주는 모형이다. 주님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신 상처입은 치료자, 중보자이신 것이다. 아론은 향로를 통해서 속죄했으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님은 자신의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내어주신 그 죽음으로 우리를 영원히 속죄하신 것이다. 그 속죄의 사랑과 치료가 우리를 고치시고 싸매시며 치료하사 살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신 중보자이십니다. 이제 우리도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셔서 그렇게 하나님앞에 설 수 없는 죽은 자를 살리는 섬김의 일에 동참케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하여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일이며, 우리 주님이 먼저 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따라 가는 길입니다. 오늘 내가 찾아 가야 할 그 자리, 그 사람, 그 일이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 기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배은망덕과 무지몽매함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눈이 어두워 주님의 역사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원망하고 조급해 하며 폭력을 행했던 일을 기억하며 회개합니다. 

허락하신 권위를 잘 분별하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늘 기도하는 자리에 나아가기를 게을리 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 되신 주님의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우리에게 맡기신 그 섬김의 길을 온전히 따르길 원합니다. 

오늘 사랑해야 할 사람, 섬겨야 할 사람, 중보해야 할 사람들을 위해

성실하게 사랑하며 섬기며 중보하게 하옵소서.


* 김경열교수 민수기 묵상 팁 : 민 16:36-50

본문 역시 고라 반역 사건이 연속입니다. 고라 일당과 다단/아비람 패거리들이 각각 몰살의 심판을 당해 죽지요. 이렇게 해서 일단 상황이 정리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반역자들의 향로를 성막에 헌정하라 하십니다. 250개나 되는 놋 향로죠... 녹이면 아마 굉장히 많은 양이 나올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놋 향로가 "거룩하다"고 말하십니다. 원래 그 놋 향로는 불법적으로 제작되어 사용된 것이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거룩하게 여기죠. 여기에 나름 이유가 있다고 추론되요. 그것이 일종의 "헤렘"(herem)의 징벌로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이죠.

헤렘 징벌과 심판은 한 마디로 싹쓸이를 말합니다. 인간은 모두 멸절되고 전리품은 모조리 하나님께 헌정되어 인간이 전혀 자기 몫을 챙길 수 없어요. 그 놋향로들이 그런 헤렘의 전리품이라 할 수 있죠. 묵상과 설교에 설명한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반역자들이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대문이다. 이것은 원칙상 불가하나 사안의 특수성과 중대성으로 인해 예외적으로 성물로 받으신 것으로 추론된다. 

하나님이 그 놋향로를 녹여 놋제단의 벽면에 붙이라고 명령하시죠. 원래 마당의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틀을 짠 뒤 동판을 입혀서 사용했어요. 동판이 제단 불의 고열을 차단하여 조각목이 그을려지는 것을 막는 역할도 겸한다고 봐야죠. 그런데 사용하다보면 고열로 동판이 녹거나 손상을 입거나 할 수 있는데, 그 놋을 사용해서 두껍게 동판을 입히라는 명령인 거죠. 그것이 두고 두고 "기념물"이 된다고 말씀하시고요...

근데 이 사건 다음날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이 떼죽음의 심판을 목격한 백성들이 믿기 어렵게도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집단적 죽음이 부당하다고 모세와 아론에게 항의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도대체가 이해불가하죠...

그래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모세와 아론이 긴급히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아론이 특별한 분향을 피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심판이 누그러집니다... 이 분향의 정체와 의미는 조금은 어려운 문제에 속합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사례처럼 때로는 분향이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트리면서 "속죄"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이 흥미롭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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