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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Aug 01. 2017

민수기 22:36-23:12 광야학교의 신탁 1

민 22:36-23:12  

민수기 22:36-23:12 광야학교의 신탁 1


발람은 자신을 환대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진을 보여주는 발락에게 신탁을 받기 위한 제단과 제물을 준비하게 하여 드린 후에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이에 발락은 불평한다. 


* 발람의 책 구조(22-24장)

 A. 발람과 하나님의 대면(22:2~35) - 이스라엘의 현 주소

    a. 22:2-6 도입

    b. 22:7-14  발람과 하나님의 첫 번째 대면

    c. 22:15-20  발람과 하나님의 두 번째 대면

    d. 22:21-35  발람과 하나님의 세 번째 대면

       ① 나귀와 천사 1(22-23절) 

         ② 나귀와 천사 2(24-25절) 

         ③ 나귀와 천사 3(26-35절)

 B. # 발람의 신탁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a. 22:36-40  도입

    b. 22:41-23:12  이스라엘을 향한 발람의 첫 번째 축복

    c. 23:13-26  이스라엘을 향한 발람의 두 번째 축복

    d. 23:27-24:13  이스라엘을 향한 발람의 세 번째 축복

    e. 24:14-25 발람의 마지막 신탁(추가적인 신탁) 마지막 세 번의 예언

         ① 예언 1 - 왕정 초기 (14-19절)

         ② 예언 2 - 다윗왕 이후 (20-22절)

         ③ 예언 3 - 메시아의 날 (23-24)


* 발람의 책을 통해 보여주는 메시지 

    광야여정 - 가나안 - 예수님의 광야시험 - 우리(교회)의 광야학교로 연결하며 읽기  

광야 옛 세대들의 비극적인 종말의 와중에서도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와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 초점입니다. 또한 발람을 통해서는 광야 옛 세대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고(22:1-35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고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그리고 그들의 운명, 아울러 이제 가나안에 가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탁을 통해서 향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짐을 통해서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22:36~24:25).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번성케 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세 번의 신탁에 각각 나타난 동일한 요소들

  ① 높은 데로 데려감 - 바못 바알(22:41); 비스가산(23:14); 브올산(23:28)

  ② 7개의 제단을 쌓고 희생제사를 드림(23:1-2, 14, 29-30) 뇌물을 주고 축복받으려는 목적 

       레위기 제사와 다른 고대근동의 술사의 제사

  ③ 말씀을 받음(23:3-5, 15-16, 24:2 세 번째는 비전을 봄)

  ④ 이스라엘에 대하여 축복의 신탁(23:7-10, 18-24, 24:5-9)

  ⑤ 발락왕의 부정적 반응(23:11, 25; 24:10-11)

  ⑥ 발람의 대답(23:12, 16; 24:12-13)



22:36-40 탐욕을 위한 환대는 결국 바른 판단보다 욕망의 올무에 빠질 수 있게 합니다. 

세 번의 요청 끝에 오는 발람을 발락은 환대하며 자신이 특별한 대접을 해 줄 수 있음을 과시합니다. 이에 발람은 자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말할 뿐이라고 말하는데, 발락은 계속 대접을 지속합니다. 


세 번씩이나 복채와 고관들과 마음이 동할만한 조건들을 제시한 발락의 요청에 탐욕을 숨길 수 없었던 발람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깨워주셨습니다. 하지만 모압까지 오는 동안 발람은 여전히 그 욕망을 버리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런 발람을 향한 발락의 교묘한 환대는 오랜 시간에 걸쳐 온 피로한 발람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깨우기에 충분했습니다. 보통 접대를 받으면 먹은 그것이 결국 마음의 짐이 되고 올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시대 많은 이들이 이러한 접대에 결국 정의를 세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므로 일꾼이 마땅히 받을 삯 이외의 환대와 접대는 분명 다른 마음을 품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많은 소유나 불필요한 양식을 축재하지 못하게하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일하도록 한 것입니다. 필요 이상의 접대는 자신의 정체성과 분수를 망각하고 깊숙한 곳에 가린 욕망을 스멀거리게하고 드러나게 합니다. 발람의 최후는 결국 이 물욕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모든 것을 잃게 만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신 것은 오늘 하루의 모든 일들이 주님의 공급하심에 족하고, 주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을 소유하여 배부르게 되는 순간 우리들은 어느새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 과하게도, 너무 부족하게도 말고 적당하게, 분수에 맞게, 필요에 족하게 하는 정도로 구하고 소유하고 받고 누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자세입니다. 부족하거든 구하고, 부요하거든 주신 뜻을 따라 나눠야 하며, 필요 이상의 환대와 접대 앞에서는 단호함과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맡은 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양식과 탐욕을 위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전해야 할 말씀만 가감없이 전하고 주님이 채우시고 공급하시는 것에 자족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22:41-23:3 예배는 복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발락은 발람을 바알의 산당으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을  보여줍니다. 이에 발람은 제단 일곱과, 제물 수송아지와 숫양 일곱 마리씩 준비하여 드리게 한 후에 신탁을 위한 장소로 이동합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의 수가 많음으로 두려워해서 발람에게 도움을 요청한 상황이기 때문에 굳이 이스라엘 진영을 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진의 끝만 보여줍니다. 이에 발람은 신탁을 위한 무술적 제의를 진행합니다. 완전 수 7제단과 7제물들을 준비하여 드리지만 이는 발람의 행위들이 모두 주술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방법을 따라 제사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발람이 이전에 행하던 자신과 이방 풍습대로 그리고 환대에 이끌려 어떻게든 신탁을 얻으려는 방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여호와를 위한 제단은 하나이면 충분하지만 그는 7제단을 쌓은 것으로 보아 단순히 여호와만을 위한 제단이 아니라 다양한 신들을 위한 제단을 쌓아 이전에 행하던 주술적 방법을 동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준비하라고 하는 발람의 제안에 발락은 신속하게 순종하여 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저주하려는 일, 그래서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일에 발람의 욕망을 이용하여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주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한 우리의 열심에 비해 오히려 탐욕의 제의가 훨씬 더 간절하고 집요합니다. 또한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는 의미로서의 예배를 드리는 이들의 예배도 있습니다. 이런 예배일수록 웅장하고 화려하고 대단합니다. 많이 드리면 많이 받을 줄 알고 드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는 이미 얻고 누린 복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감사하므로 드리는 것이지 우리의 드림으로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거래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 예배를 드린다면 우린 어느새 발람의 주술적 제의에서 멀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이 받지 않으시며 냄새나고 산물난다고 하는 예배입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복은 평생 예배하고 감사해도 남을 은혜를 입었기에 우리의 삶은 날마다 거룩한 산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4-6절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발람이 신탁을 위한 장소로 이동하자 하나님께서 임재 하십니다. 이에 발람은 자신이 드린 주술적인 제단과 제물을 자랑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발람에게 말씀을 주시며 발락에게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발람이 쌓은 제단과 제물로 인해서 하나님이 임재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먼저 발람의 제물을 기뻐 받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또한 발람이 재차 자신이 쌓은 일곱 제단과 일곱 제물들에 대해서 자랑하듯 말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코멘트 없이 발락에게 전할 말씀을 주시고 가서 전하라 하실 뿐입니다. 발람은 자신의 열심과 특심이, 그리고 자신이 명해서 쌓은 제단과 제물이 하나님의 임재와 신탁을 가능케 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러한 것들을 드리지 않아도 여호와께서는 발람에게 말씀하셨고, 심지어 여호와의 사자도 보내고 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신이 드린 주술적 제의가 하나님을 응답하게 하신 것처럼 제단과 제물 드림에 대해서 말하지만 하나님은 일언반구 이에 대한 반응없이 말씀을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예물을 이와 같이 생각하고 드린다면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신탁 그리고 응답은 우리의 열심, 우리의 제단, 우리의 제물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임하시고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을 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부리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림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 나갈. 때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기 위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7-10절 하나님은 우리를 새 인류, 새 백성, 새 사람으로 특별하게 세워 주셨습니다. 

발람의 첫 번째 신탁은 먼저 자신 임의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이스라엘이 특별하다는 것을 부러워하며  번성한 이스라엘을 아무나 헤아릴 수 없다고 고백한 이후에 자신도 그들과 같길 바란다는 고백으로 마무리 됩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면서 발락이 비록 자신을 멀리서 불러서 야곱 곧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꾸짖으라 하지만 하나님이  저주 하시지 않는 자를 감히 저주하거나 꾸짖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스라엘의 진영을 보니 그들의 번성함이 크다는 것을 알고 고백합니다. 급기야 발람은 자신의 삶도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살고 죽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10절). 하지만 의인의 죽음, 이스라엘과 같은 종말을 기대했던 발람의 최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계획을 신실하게 성취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한 우리의 삶의 성장과 성숙은 이미 약속된 것입니다. 다만 그 은혜를 기억하며 겸손하게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홀로 살 것’, 즉 특별하게 구별된 삶을 살도록 새창조 되었습니다. 여러 민족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민족이 아니라 특별하게 택하심과 세우심과 사명을 품은 새 백성, 새 피조물, 새 인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평생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의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이 광야학교로 부르시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살게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1-12절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품은 이는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발람의 축복에 발락은 불평합니다. 원수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한 발람을 향해 불평하는 발락을 향하여 발람은 여호와께서 주신대로 전할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발락은 발람을 통해 전달된 신탁에 대해서 일언반구없이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주장합니다. 이렇게까지 대접하고 환대한 이후에 주어진 신탁이라면 적어도 발람의 말에 대해서 반응해야 하는데 오히려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발람은 자신은 그저 주신 말씀을 그대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듣고 순종할 때 우리는 그 말씀의 능력을 알게 되고 담대하게 전하게 됩니다. 어떠한 환대와 위협과 불평에도 주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아니하고 바르게 전하고 증거할 수 있길 원합니다. 



*기도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겸손히 행해야 함을 잊지 않게 하옵고,

복음에 대해 합당하게 반응하는 예배하게 하옵시며,

오직 친히 제물 되어 주신 흠없는 주님, 

그 주님이 지신 십자가만을

나의 자랑으로 삼게 하옵시고,

특별한 부르심 곧 새 피조물 새 백성 새사람 되게 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맡겨주신 말씀을 가감하지 아니하고

묵상하고 순종하며 증거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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