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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Jul 30. 2017

민수기 22:21-35 광야학교의 덤앤더머 2

민 22:21-35 

민수기 22:21-35 광야학교의 덤앤더머 2


발락의 세 번째 부름에 발람은 여호와의 명을 따라 길을 나서지만 하나님의 사자가 가로 막는 것을 나귀는 보는데 발람은 보지 못합니다. 나귀가 말을 한 이후 여호와께서 눈을 밝힌 후에야 자신의 범죄함을 깨닫고 고백한 발람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길을 재촉한다. 


* 발람의 책 구조(22-24장)

 A. 발람과 하나님의 대면(22:2~35) - 이스라엘의 현 주소  

    22:2-6  도입  

    22:7-14  발람과 하나님의 첫 번째 대면  

    22:15-20  발람과 하나님의 두 번째 대면  

    22:21-35  발람과 하나님의 세 번째 대면  

     ① 나귀와 천사 1(22-23절) 

     ② 나귀와 천사 2(24-25절) 

     ③ 나귀와 천사 3(26-35절)

 B. # 발람의 신탁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22:36-40 도입  

    22:41-23:12  이스라엘을 향한 발람의 첫 번째 축복  

    23:13-26 이스라엘을 향한 발람의 두 번째 축복  

    23:27-24:13  이스라엘을 향한 발람의 세 번째 축복  

    24:14-25 발람의 마지막 신탁(추가적인 신탁) 마지막 세 번의 예언  

     ① 예언 1 - 왕정 초기 (14-19절)

     ② 예언 2 - 다윗왕 이후 (20-22절)

     ③ 예언 3 - 메시아의 날 (23-24)


* 발람의 책을 통해 보여주는 메시지   

    광야여정 - 가나안 - 예수님의 광야시험 - 우리(교회)의 광야학교로 연결하며 읽기  

광야 옛 세대들의 비극적인 종말의 와중에서도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와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 초점입니다. 또한 발람을 통해서는 광야 옛 세대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고(22:1-35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고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 그리고 그들의 운명, 아울러 이제 가나안에 가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탁을 통해서 향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짐을 통해서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22:36~24:25).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번성케 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 22절 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발람이 아침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길을 나섭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길을 막고 섭니다. 발람은 나귀를 탔고 두 종이 함께 합니다.


첫번째 대면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발람을 향해, 발락에게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라 했습니다(22:12). 그런데 두 번째 대면의 마무리 부분에서는(20절) 일어나 함께 가되 여호와께서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 합니다(22:20). 그런데 세 번째 대면의 배경에서 길을 나서는 발람을 향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가라고 하시고서는 뒤이어 가는 발람을 향하여 진노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인가? 발람에게 농간을 부리는 분이신가?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발람의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의도를 찾는 것이 더 지혜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관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대면의 마지막에 발람에게 가라고 한 것을 발람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발람이 복채(떡)와 존귀(영화)에 대한 유혹 앞에 이성을 상실한채 자신의 내면에 있는 탐욕이 꿈틀거립니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고 함께 가지 말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신을 찾아 오는 발락의 고관들을 대접하고 유숙하게 하며 다시금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말씀을 더하실까 생각하면서 계속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두 마음을 품고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있는 발람을 향하여서 하나님은 그럼 가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정말 가라고 하시는 의도보다는 탐욕을 갖고 묻는 발람에게 행하시는 유기와 비슷합니다.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라’ ‘가려면 가버려라’하는 의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정말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신을 차리고 지금 자신이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구나, 기뻐하지않으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가지 않겠다고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난 다음 날 아침에 나귀에 안장을 채우고 모압 고관들을 졸졸 따라 나서는 발람을 보시고 ‘그가 감으로’(23절)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발람을 향하여 여호와께서 기가 막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게 된 것입니다. 발람의 이러한 행동은 뻔히 하나님의 의도를 알면서도 불구하고 다시금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분이십니다. 택한 백성, 복 주신 백성을 저주하려는 이들을 막고, 돈으로 저주를 사려는 시도에 대하여서도 이미 아시고 예비된 사람과 방법을 통해서 피할 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은 무척 위험하고 경거망동하는 것이며 여호와의 주권을 침해할 요소가 매우 큽니다. 이미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난 이후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상황의 추이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납득할 수 없다고 기어이 자신의 속 마음이 관철되길 바라다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도대로가 아니라 자기 편한대로 듣고서는 그런 뜻에는 즉극 순종하려는 모습은 어린아이와도 같고, 어리석은 짓이며, 바보같은 신앙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하나님의 사자가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는 말씀은 뛰어내리라는 말이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이렇게 고지곧대로, 말씀대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무관하게 갈 수 있습니다(문자적인 성경의 이해와 성경대로 믿고 순종한다고 하는 이들 중에서 이렇게 본문의 의도, 하나님의 마음과 무관하게 오역하고 왜곡하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 주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살펴야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차 묻는 일도 불순종이니(사사 기드온의 예에서도 동일함) 말씀하시면 순종하고, 자꾸만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어리석은 일을 내려 놓길 바랍니다. 



23-27절 탐욕은 우리 눈을 멀게 하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발람이 타고간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손에 들고 선 것을 보고 밭으로 들어가자 발람이 채직질하고, 좁은 길에서 막아서자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짓누르니 또 채찍으로 때리고, 좌우로 더이상 피할 곳이 없는 곳을 막아 서니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립니다. 


지금 길을 나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기에, 가라고 한다고 철없이 떠나는 발람을 여호와의 사자가 막아 선 것입니다. 바로 죽일 수도 있으나 다시금 발람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는 발람과 대조적으로 타고간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자꾸만 피하고 급기야 그 앞에 부복하는데도 불구하고 발람은 세 번씩이나 그런 나귀를 채찍질하고 심지어 화를 내면서 지팡이로 때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영적인 민감함을 가지고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깨달을 수 있는 감각을 길러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영적으로 무디어지고, 자신의 탐욕으로 눈이 먼 발람은 나귀가 보는 여호와의 사자를, 나귀도 깨닫는 일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나귀를 통해서 다시금 발람에게 말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채찍질을 하면서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분노하고 심지어 지팡이로까지 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발람의 모습은 광야 일세대 모습의 끝판왕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출애굽하고 지난 광야의 여정을 지내오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와 뜻을 경험과 언약과 여러가지 시각적으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옳게 분변하지 못하고 조금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금새 자신들의 탐욕을 고스란히 드러 냅니다. 그럴 때마다 기회를 주시며 깨닫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제대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도 변함없이 우리 삶에 역사하고 계시며, 우리 삶을 세밀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사랑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 탐욕으로 멀어 있거나, 우리의 마음이 두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다른 이들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내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과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 하나님은 나를 깨우고 계신 것입니다. 



28-30절 초자연적 현상은 패역한 우리를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극단의 조치입니다. 

나귀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발람을 향하여서 마침내 여호와께서는 나귀의 입을 열어서 발람에게 말을 하게 합니다. 내가 뭘 했다고 이렇게 세번이나 때리는지, 오늘까지 발람이 일생동안 탄 나귀이고, 언제 이렇게 행동할 때가 있었느냐 하면서 말하는 나귀에게 발람은 칼이 있다면 죽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이전에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나귀의 말을 듣고서야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발람이 알고서 그제서야 주춤합니다. 


에덴에서 뱀이 말을 한 이후에 성경에서 유일무이하게 동물이 말을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분명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라고 말하면서 이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초자연적인 현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상징적 행동도, 우화도 아닌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대면하여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세 번씩이나 평소같지 않은 나귀의 행동을 통해서도 사인을 보내심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발람을 향하여서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곧 나귀의 입을 열어서 발람을 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탐욕에 눈이 먼 발람은 이마저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메신저를 죽이려고까지 하다가 이전에 이런일이 없었지 않느냐는 나귀의 말을 듣고서야 뭔가 다르다는 것을 감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발람이 이 모든 상황을 깨달은 것은 아직도 아닙니다. 


광야 이스라엘의 패역함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목적)을 많은 기적과 말씀과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깨닫거나 성숙해지거나 변화되지 않은데 있습니다. 때로 급할 때 어떤 말로도 통하지 않고 깨어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라도 깨우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적을 체험하는 것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의 패역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단의 조치를 통해서라도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은 성숙한 신앙이라기보다는 게으르거나 어린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표적과 이적을 구하는 이들도 결국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트집을 자기 위함이었고, 순종하기 위함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무수한 계시들을 얼마나 잘 감지하고 듣고 깨닫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과의 소통이 매일 일상화 되어 있을 때에 우리에게는 영적 민감함이 길러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계시를 금세 깨닫고 순종하게 됩니다. 하지만 매일 그런 소통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새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져서 제대로 듣고 깨닫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패역함과 우둔함과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애닳게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신앙이 아니라 영적 민감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금세 깨닫고 순종해 가는 믿음 갖기 원합니다. 



31-33절 주님이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셔야 결국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침내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자 그제서야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이제야 머리를 숙이고 엎드린 발람에게 여호와의 사자는 나귀를 때리고 사악한 길로 가는 발람을 막으려고 왔고, 만일 나귀가 아니었다면 발람은 벌써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립니다. 


나귀가 말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고 난후에야 비로소 여호와께서 눈을 밝히니 발람은 이제야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탐욕의 가려진 눈을 뜨게 하는일이 이렇듯 어렵습니다. 두텁게 발람의 눈을 가리고 있는 탐욕이 얼마나 벗어 내기가 힘든 것인지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욕심으로 죽게 될 인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에서 말하는 것을 도무지 듣지 못하고 조언과 권면을 깨닫지도 못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대로 불구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감사하게도 지금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묵상하며 순종할 수 있게된 것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지혜를 허락하사 주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불순종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특별한 계시들을 내려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발람처럼 오래도록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우리도 우리 주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진즉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을 목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안 하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면서 살아가는 우리를 깨우시고, 우리의 탐욕을 내려 놓고 복되신 주님을 따르게 하는 그 은혜를 우리 주님이 알게 하시고 깨워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발람의 길을 여전히 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소경의 눈을 진흙을 발라 새창조 하사 눈을 뜨게 하신 그 은혜를 오늘 우리도 받아서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과 소통하면서 주님 뜻 알게 해 주신 그 큰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34-35절 말로만 자기를 부인하고 행동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아직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발람은 이제야 자신의 범죄함을 고백하면서, 잘 몰랐다고 변명합니다. 거기다 덧붙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함께 가고 이르는말만 해야 한다고 당부하자 발람은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갑니다. 


이제야 깨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발람이 뒤에 덧붙인 말들은 그가 말로는 범죄했다고 고백하지만 마음의 탐욕을 다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잘 몰랐다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했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몰랐다고 자신의 불순종이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가지 발람이 더한 말 중에서 이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34절 하). 이제껏 막고 전하는 모든 이야기를 통해서 결국 발락에게 가는 일이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는데 이제 또 다시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면 가지 않겠다고… 하나님의 가슴이 고구마 여러개를 먹은 것처럼 퍽퍽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발람을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가라고 합니다. 비록 불순종하고 패역하고 무지몽매한 발람이지만 그를 통해 하실 계획을 하나님은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모습은 결국 오늘 교회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의 패역함에도 오래참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 여기까지 이끄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주님의 몸된 우리, 거룩한 성전된 우리, 왕같은 제사장된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어리석은 일들을 반복하는 상황에서도 오래참으시고 기회를 주시고 그렇게 부족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그 사랑앞에 그저 겸손하게 부복할 길 밖에 없습니다. 제발 우리가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된 온전한 자로 묵묵히 잘 자라 가길 기도합니다. 



* 기도

오래참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뜻을 앎에도 불구하고 

계속 되묻는 불신앙을 버리고

깨닫게 하신 그 뜻에 속히 순종하는 믿음 주소서

기적적인 계시가 아니라

일상에서 이미 주어진 말씀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계시하시는 주님의 뜻을

매일매일 잘 분변하는 믿음 주소서

삶의 현장에 특별한 계시로 주어지는 

상황과 사람을 통해서 주시는 뜻도

잘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도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부족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잘 감당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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