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형 인간

푸풀쉴물 - 20040819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비가 온 뒤에는

논으로 가서 곡 해야 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논두렁이 무너진 데는 없는지

물은 제대로 물고로 들어오는지

막아놓은 보에 이상은 없는지

무엇보다

벼에 별다른 병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물러진 벼가 있다면

일정기간 논에 물을 완전히 빼서

건조시킨 후에 다시 물을 대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고병이나 도열병 등의 병이 한번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데

이럴 땐 하는 수 없이 농약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사용하던 것은

등에 지고 손으로 조정을 해서 뿌리는

수동식 분무기가 있었습니다.


왼손으로는 부지런히 펌프질을 하고

오른손으로는 좌우로 저으면서 골고루

약이 뿌려지도록 하는 일이었지요.


분무기 가득 물을 붓고 약을 타서

등에 짊어지고서 논두렁을 갈 때까지는

그래도 특별한 연습이 필요 없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논으로 들어가서

벼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녀야 될 때가 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들에 있는 논들은 줄을 잡아서 모를 심었기에

한두 줄 잡아서 그 고랑으로만 죽 걸어가면 문제가 없었지만

산중에 있는 천수답 다랑지들은 줄을 잡지 않고

모를 심어서 고랑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분무기를 짊어지고 벼를 밟지 않도록

그 고랑을 찾아가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지요


왼손은 펌프질

오른손은 분무를 위한 조정

두발은 고랑 사이 벼를 밟지 않도록 지나기 위해서

길을 찾아야 하는 작업

두 눈은 분무기 보랴, 길 찾으랴 정신이 없었지요

완전히 로봇처럼 멀티형(?)이 되어야 했습니다.


처음엔 애꿎은 벼도 많이 밟았습니다.

분무기 통을 짊어지고 넘어지기도 하고..

한참을 하고 나서야 익숙해진 솜씨로

고른 살포를 할 수 있었지요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전엔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 중에 한 가지가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였지요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 속에서는

여러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펌프질만 해도 되었지만

손을 휘저으며 골고루 사랑해야 할 일도 있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길을 찾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잘못 걸어가다간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제풀에 겨워서 넘어지기도 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러한 과정 없이 노련한 선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지요



이 세상에는

나의 펌프질이 필요한 많은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골고루 그 사랑을 뿌려줄 곳도 있지요

한 곳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을 다니며 다양한 분야에서

그 애정이 싹트도록 하는 일도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잘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만큼의 일들에는

노련한 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 손 두발 다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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