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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Aug 18. 2017

민수기 32:16-27 광야학교의 등급 시험2-타협

민 32:16-27 

민수기 32:16-27 광야학교의 등급 시험 2 - 타협


요단 동편을 요구한 갓과 르우벤 지파는 모세에게 수정안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 어린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자신들은 무장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에서 전쟁하고 각기 기업을 얻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제안을 반드시 이행하지 않으면 죄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이라 경고하고 갓과 르우벤은 이행할 것을 서약합니다. 


16-19절 우리의 목숨을 걸만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갓과 갓과 르우벤 자손은 모세에게 와서 가축을 위해서 우리를 어린 아이들을 위해 성읍을 견고하게 건축한 후에(건축 순서가 24절 모세의 제안과 다름) 무장하여 약속의 땅 정복에 앞장서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각기 기업을 얻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고, 자신들은 요단 동쪽의 기업을 받고 약속의 땅 기업은 받지 않겠다고 제안합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이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반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의 정황을 두고 보면 먼저 미디안과의 전쟁은 약속의 땅에 대한 헤렘과 전리품의 분배에 대한 원칙을 보여주고 있고, 이제 요단 동편의 땅을 차지하는 일에 대해서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광야 이스라엘의 자세를 교육하기 위한 본문으로 보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다른 자손들을 배려하여 자신들이 요단 동편에 거하는 것이 다른 자손에게 유익이라 생각하고, 또한 자신들이 정복 전쟁의 선봉에서므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쟁에 대해서도 대가를 지불하다 하고, 가축과 가족들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유익이 있습니다. 또한 막무가내로 요단 동편을 달라 하지 않고 모세에게 충분히 상의하고 요구를 거두고 수정하는 자세등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먼저 요단 동편에 거하는 지파는 르우벤과 갓 지파 외에 므낫세 지파의 절반 정도인데 여기서는 므낫세 지파가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지파는 인구가 많기에 요단 동서에 거할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이 지파가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갓과 므낫세의 부정적인 문제에 므낫세 지파를 제외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번째는 요단 동편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이미 암몬 모압 에돔이 살고 있는 땅이고 이들은 비록 이스라엘을 대적하지만 형제의 나라입니다. 이 땅이 아무리 좋아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원래 약속은 요단 동편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이 아니라 자신들이 좋아 보이는 땅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요청하고 결정하려 한다는 사실이 문제가 됩니다. 셋째는 요단 동편에 거하는 이유를 가축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일이 합당하게 보이지만 먼저 이들의 안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이들이 병거와 경고한 성읍과 다른 인간의 노력들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들이 제안하는 순서가 아이들이 먼저가 아니라 소유된 가축의 우리를 먼저 짓겠다는데에는 이들의 속내가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보다 물질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들의 기준이 더 우선되는 것을 판단한 것입니다. 네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도 역시 이들이 제안하는 약속의 땅에 대한 정복 전쟁에서 자신들이 선봉에 선다는 표현에 있어서도 전쟁의 모든 전략과 방법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함부로 목숨을 걸고 선봉에 서겠다고 하는 것은 전쟁의 주권을 가지신 주님을 자신들의 열심으로 권위를 훼손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는데 이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물론 정복이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볼 수도 있지만 무모한 맹세로도 보입니다. 역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들의 욕심에 기인한 고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섯째로 요단강 건너편의 약속의 땅 대신에 이편을 택하는 것에 대해서도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이스라엘이 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이들이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기에 분열의 씨앗을 제공하는 일이므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들이 선봉에 서고 후일에 요단 동편 땅에 거하게 되지만 몇번 다른 지파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위험도 실제로 있었고, 무엇보다 안타까운것은 앗수르의 침공에서 요단 동편의 이들이 가장 먼저 끌려가게 됩니다(대상 5:26). 이러한 모습은 결국 약속의 땅에서 먼 이들이 결국 하나님과의 약속과도 멀어지고 그것이 신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목숨을 걸고 손해를 보는 것처럼 헌신하고 맹세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발로로 기인한 것이라면 결국 과정이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하더라도 그 열매와 끝이 좋지 않다면 긴 역사적 관점에서 봤을때 문제가 됩니다. 정말 우리가 헌신하고 대가를 지불하고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은 우리의 이기적인 탐욕을 성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그 약속을 이루며 누리는 일들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의 탐욕과 이기로 인한 것이라면 지금은 좋을지 몰라도 후일에는 결국 망하는 길입니다. 그토록 열심으로 취하고 들어가려 했던 그 나라에 가서 여기가 아닌가벼 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인도하시는 대로, 인내하며 끝까지 순종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20-24절 하나님 앞에 지은 죄의 결과는 반드시 죄인을 찾아냅니다 

모세는 갓과 르우벤이 선봉에 선다고 제안하는 것에 대해서 보충하여 확인합니다. 기업을 분배할 때까지만 아니라 그 당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기까지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호와게 범죄함이어서 반드시 그 죄에 대한 결과를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것이면 어린아이들을 위해 성읍을 건축하고 양을 위하여 우리를 지어서(두 지파가 말한것과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진행되는 대화와 제안 속에서 모세도 이러한 제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먼저 여호와께 묻지 않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전에 여호와께서는 약속의 땅 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을 모세에게 명하셨고, 그 땅에서 어떻게 땅을 분배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자세등에 대해서 잘 가르치는 일까지 교육하는 것이 모세의 사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약속의 땅을 어떻게 정복하고 분배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공평과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사람의 수에 따라서 그리고 제비를 뽑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지 지금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이 좋아보이는 땅을 달라고 이렇게 생떼를 쓰는 방식으로 한다면 향후에라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모두가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모세는 갓과 르우벤 자손이 제안하는 것보다 더 강조해서 선봉에서도 시간도 더 무겁게 제시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여호와께 범죄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그 죄에 대한 결과를 반드시 묻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갓과 르우벤이 간과하는 문제는 모세가 이들이 지으려고 하는 성읍과 우리의 순서를 교정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아이)이 먼저냐? 돈(양)이 먼저냐? 사람들부터 먼저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건축한다고 해야지 너희들의 마음이 돈(양)이 먼저이니 그것을 지키려고 먼저 짓겠다는 것 아닌가 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공동체와 가족들의 문제들에 대해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먼저 주님의 뜻을 묻고 있는지 아니면 나의 지혜와 경험과 연륜을 따라서 섣부른 판단으로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언행을 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먼저 돌아봅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따라 가족과 성도들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을 마치 믿음을 훈련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진 않는지,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확신하면서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고 타협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도 돌아봅니다. 우리가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원칙을 기억한다면 오늘 나의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먼저 더 나은 길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일이 우리가 우선해야 할 일인줄 믿습니다. 



25-27절 우리의 가족을 지키고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갓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모세를 주라 말하면서 자신들은 모세의 종으로서 모세의 명령대로 행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아내와 양 떼와 모든 가축을 길르앗 성읍에 두고 모세의 말대로 무장하고 선봉에서서 싸우겠다고 다짐합니다. 


물론 이전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운 모세를 대적하고 했을 때보다 더 진전된 모습으로 모세를 주라 한 것은 한단계 성숙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갓과 르우벤은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아부성 발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주는 여호와이시며,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일들과 기업을 분배하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안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지 병거와 말, 그리고 견고한 성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견고한 성읍이, 예비한 건강이 모두 다 헛된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치워지는 전쟁의 승패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과 열심과 욕심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갓과 르우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이, 그리고 목숨을 건 대가지불이 충분히 얻을 것을 얻겠다는 계산으로 서원(서약)까지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서원에 대한 주권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다시한번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안정된 직장, 넉넉한 집, 든든한 노후보장, 보험, 저축, 인맥 등등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안녕과 내일을 보장할 것처럼 보이고, 지금 당장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든든하게 해 주는 것처럼 보이고, 이러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안정된 삶을 영위하고 행복한 삶을 보장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생명을 내일까지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들의 모든 수고가 헛됨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현실을 택합니다. 하나님은 현실을 모르고, 현실에 절박한 맘몬의 유무가 더 피부에 와닿게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갓과 르우벤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실용적으로 합리적으로 처신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하는 믿음이 우리 삶의 어떤 부분과 영역까지 다스리고 적용될 수 있을까요? 어떤 것을 양다리 신앙이라 하고, 무엇을 온전한 신아이라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신앙이라 할 수 있을까요? 지금 나의 믿음의 분량은 어디까지 주님 앞에 내려놓고 맡기고 의뢰할 수 있는가요? 삶의 전 영역을 주님께 의뢰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 믿음을 구합니다. 



* 기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우리의 안위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고 있는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믿음과 현실 가운데서 

자꾸면 눈에 보이는 현실과 타협하려는 연약함을

주님 붙잡아 주옵소서. 

주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는 믿음없음을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끝까지 약속에 신실하신 주님을 의뢰하고

오늘도 주님만 따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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