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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Sep 15. 2017

예레미야 02:01-08 첫사랑을 버리고 왜 헛된 것을

렘 02:01-08

예레미야 02:01-08 첫사랑을 버리고 왜 헛된 것을 따르는가?


예레미야가 외쳐야 하는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광야의 때를 기억 가면서 왜 그 사랑을 잊고서 지금 헛된 것을 따르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더니 그곳에서 준 하나님의 선물을 먹고서 오히려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잊고서 그 땅마저 더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이제부터 예레미야를 묵상해 가면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레미야가 외치며 고발하는 그들의 모습들은 모두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 아닌 것을 우상처럼 믿는 우리들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패역하고 무지몽매하고 비열하기까지한 모습들이 결국 우리 안에 여전히 남겨진 죄악된 모습임을 기억하며 하나하나 양파 껍질을 벗기듯 우리의 죄악을 깨닫고 돌이키고 버리고 청산하며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빚어져 가는 시간이길 간구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사가 달린 심각함과 긴박함을 갖고 임해야 하는 절박한 일입니다. 



1-3절 광야학교가 오히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귀에 외치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청년의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한다고 하는데 그때는 씨도 뿌리지 못하는 광야의 때를 말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따랐다고 회상하십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이들이며 첫열매로서 하나님의 소유였기에 그들을 괴롭히면 벌을 받아 재앙이 닥칠 것이라 경고하면서 지키고 보호하셨습니다. 


오래도록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듣지 않기에 이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보내서 그들의 귀에 외치라고 합니다. 그냥 말해도 들을 수 있고, 기억만해도 알 수 있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관계였거늘 들어도 순종하지 않고, 아무리외쳐고 바뀌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니 그렇게 눈과 귀와 마음을 닫은 이스라엘의 귀에 대고 외치라고 말합니다. 지금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의 절박함과 긴박함과 간절함이 담긴 표현입니다. 또한 우리 귀청을 울릴만큼 그렇게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지만 오늘 말씀의 우리의 가슴에 우리의 귀에 우리의 심령에 나팔소리처럼 크게 들려야 합니다. 주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그 음성 듣기를 기대하고 귀 기울이고 세미한 중에라도 들리는 그 음성을 듣는 일이 가장 우선되어 있는지요?


여호와께서는 광야를 씨 뿌리지 못하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희망이 없는 땅,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런 땅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랐고, 청년의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이라고 표현하면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시간이 청년과 신혼의 때였으며, 하나님이 인애와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대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 인애(헤세드; 성실함, 신실함, 지속성, 빗나가지 않는 사랑)와 사랑을 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민수기를 통해서 본 이스라엘의 광야는 불평과 불만 가득한 불신의 모습으로서 이스라엘의 인애와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하나님의 인애와 사랑이 그들을 광야에서 살게 하셨는데 지금 여기서는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저지른 패역한 모습들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광야의 이스라엘의 모습이 훨씬 더 하나님을 사랑한 것처럼, 훨씬 더 좋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광야는 예측불허요 의지할 데가 없기에 위로 하늘밖에 의지할 바가 없으니 지금 풍요의 땅 가나안에서처럼 미혹될 일들이 적었기에 비교적 나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호세아서와 더불어 예레미야는 광야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그립니다). 얼핏 학교 다닐 때가 더 좋은 때라고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도 광야학교같은, 광야같은 그 시간들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난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척박하고 앞이 보이지 않고 힘들어도 어쩌면 그래서 더욱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서 더 감사할 수 있는 때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없는 것, 부족한 것, 의지할 데 없는 것이 더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첫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구별되어 여호와께 드려진 여호와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지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성물로 첫 열매로 삼으신 뜻이 바로 사명입니다. 열방을 주께로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에게 그런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며, 지키고 보호하심 때문이요, 통로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나라’라는 표현도 같은 의미입니다. 지금 구원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요 거룩한 백성된 우리들이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사명이며 제사장 나라 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된 우리들이 바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물로 구별되고 택함 받은 새 이스라엘이요, 새 백성이요, 새 인류요, 새 피조물이요, 새 사람 된 성도요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를구원하신 주님의 뜻을 알고 있고 또 아는 대로 살고 있나요?



4-5절 여호와에게서 어떤 불의함을 보았기에 여호와를 멀리하고 헛된 것을 따라 행하는가?

여호와께서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을 향하여 질문합니다. 조상들의 대체 여호와에게서 어떤 불의함을 보았기에 여호와를 멀리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르고 행하는냐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떠나 헛된 우상을 따르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살아가는 이들이 지금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 집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지금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유다만 있지만 가나안과 광야의 세대들을 대조하시면서 이스라엘 전체 지파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택하시고 세우시며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신 족속(집)들이 지금은 그 모든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 아닌 헛된 것들을 따르고 행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불의하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불의한 일을 행하고 있으며, 마치 여호와께서 불의하신 것처럼 행동했기에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어떤 불의가 있었는지 되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신앙적 행동이 결국은 여호와를 불신하는 것 뿐 아니라 여호와를 불의한 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심각한 죄악일 수 있습니다. 어떤 변명으로도 우리의 죄악에 대하여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하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참된 여호와를 버리고 헛된 것을 따른 이스라엘의 문제는 여호와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이제 헛된 것을 따르고 헛되이 행하였기에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상이 무가치하듯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도 무가치한 것이 된 것입니다. 의로우신 주님을 따르면 의로운 자가 되지만, 헛된 우상을 따르고 행하면 헛되고 무가치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따르는 것,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의로우신 하나님이신가요? 불의하고 무가치하고 헛된 것들인가요?



6-7a절 척박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고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풍성한 것을 먹게 하였더니 왜  너희는 여호와를 찾지 않는 것인가?

5절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광야(척박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땅)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그 여호와를 찾지 않습니다. 또한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고 열매와 아름다운 것들을 먹게 하였더니 역시나 여호와를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애굽의 종되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척박한 광야에서도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 하셨으며, 마침내 약속의 땅에서 부요케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았는데, 그만 그 풍성한 선물을 받고서는 그것을 허락하신 여호와를 망각하고 더이상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7a절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구속사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늘 기억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기억한다면 주님을 찾고, 사귀며 순종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텐데 과연 그런가요?


망각은 배은이며 무지는 패역입니다. 기억은 믿음이며, 회상은 은혜입니다. 역사(歷史)는 신앙이며, 역사(役事)는 축복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함께하심과 구원하신 은혜를 망각한다는 것은 결국 그 구원을 허락하신 여호와를 부인하는 것이요 불신하는 것입니다. 척박한 땅에서는 여호와를 의지하더니, 이제 풍요의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눈이 어두워 그것을 주신 여호와를 더욱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가 여호와를 대체하고, 망각하게하고, 불필요하게 하여 마침내 더이상 여호와를 찾지도 구하지도 만나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받아 누리는 것이거늘 그 선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너머에 모든 만물의 주재이신 여호와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어쩌면 황금만능,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불신앙을 조장하는 것들이 아닐까요? 기름진 땅과 열매와 아름다운 것을 먹기 전에 그것을 주신 분을 먼저 기억하고 감사하며 누릴 수 있길 원합니다. 



7b-8절 여호와를 찾지 않고 알지 못하고 반역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약속의 땅을 더럽히고 역겨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인도하신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은 각각 기업으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살아가면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더럽히고 역겨운 땅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를 찾지 않았고,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관리들(왕들)은 여호와를 반역했으며, 선지자들은 바을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헛된 것을 따름으로 그렇게 더럽힌 것입니다. 


죄악은 여호와와의 관계를 망각하고 왜곡하며 반역 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전적으로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로 말미암고 여호와와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을 때 이른비와 늦은비로 그리고 허락하신 열매들로 아름다운 소산들로 이스라엘은 배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고 관계가 깨어져 스스로 살겠다하고, 여호와 아닌 것을 찾고 의지하고, 심지어 다른 우상과 사람의 힘을 의지하게 되면 더이상 땅은 소출을 내지 않고 역겨운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파괴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이 여호와를 찾지도 않았고, 율법을 가르치고 지키도록 지도해야 하는 이들이 여호와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도 부족하였으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대리통치자요 청지기인 왕들(관리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신들이 왕인것처럼 행세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고 하는 선지자들, 하늘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석하지 않고 오히려 바알의 이르므로 예언하고 영원한 하나님이 아닌 무익한 것들을 따라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를 담당하던 이들이 모두다 제 역할을 감당하지 아니하니 백성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무지하고, 그러므로 여호와를 찾지 않고 여호와의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지도 않고, 여호와의 뜻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세상의 가치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제사장, 율법을 다루는 자, 지도자, 선지자들 모두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바른 믿음과 삶으로 인도해야 할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 본분을 망각하는 순간, 자신들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헛된 삶, 사망과 죽음으로 이끄는 영적 소경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정체성을 잃고, 삶의 내용은 부정과 역겨움을고 가득차고, 삶의 방향을 잃어 버리니 표류하는 인생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백성 곧 구원받은 이들이라면 모두가 다 말씀을 맡은 자들, 말씀을 듣는 자들, 말씀을 읽는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호와를 찾고 알아가고 순종하며 주의 이르므로 듣고 소망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러한 일들에 관심이 없이 오직 헛된 것들을 위해서 우리의모든 것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세월을 아끼고 가장 소중한 것이 여호와께 있음을 깨닫는 지혜 있길 구합니다. 



* 기도

우리의 무지몽매함을 긍휼이 여기시고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를 깨워주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인애와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하나님

광야학교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이 세대에 헛된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고

주님만 바라며 의뢰하는 믿음 주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세우신 은혜를 기억하며

부르신 그 뜻을 헤아리는 성숙한 믿음 갖게 하옵소서.

의로우신 주를 가까이하며

주를 따라 순종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지나온 삶의 여정이 모두다

구원의 은혜 베푸신 주님의 허락하심인 줄 믿으며

지금 허락하신 기름진 땅과 열매와 아름다운 것을 먹을 때마다

늘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하옵소서

주께서 허락하신 그 땅을 순종으로 정결케하옵시며

허락하신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주를 알아가는 일들에 순종하며 따르는 일에

더 힘써 행하게 하옵시고

말씀을 맡은 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종이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을 허락하시고 대언케 하시고

살게하시고 증거케하시고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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