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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Sep 15. 2017

예레미야 02:09-19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렘 02:09-19

예레미야 02:09-19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죄


여호와를 버리고 헛된 것을 따라 행한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법대로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신을 바꾼일이 있는지 보라 하십니다. 그렇게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결과는 그들이 자취(스스로 취함)한 것으로 결국 그 행한 악이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9-13절 일상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여호와가 아닌 바알을 따르게 됩니다(신앙적 범죄).  

여호와께서 싸우자고(법대로 하자) 말씀하십니다. 깃딤(키프로스 또는 지중해 동쪽 지역을 의미함) 섬에도 게달(시리아에서아라비아-팔레스틴 북동쪽에 사는 아랍족속)에도 이스라엘처럼 자신들이 믿는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꾼 일이 없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무익한 것으로 바꿨습니다. 이에 증인된 하늘을 향해 놀라고 심히 떨고 두려워하라 말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행악한 두가지는 생수의 근원된 여호와를 버린 것과, 스스로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만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송을 걸어서 따져보면 지금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이방나라들도 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지금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신들을 섬기는 이들도 자신들의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꾼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다른 신이 있다는 것도 아니고, 이방나라들이 실제로 신을 바꾸는 일이 없다는 것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의 잘못이 무엇인지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즉 여호와와 바알을 같이 섬기는, 여호와를 바알처럼 섬기는 신앙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증인된 하늘을 향해 놀라고 떨고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죄악의 심각성을 표현합니다. 결국 ‘내 백성(11, 13)’ 이스라엘이 행한 악은 생수의 근원된 여호와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입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죄악은 가나안에서 바알을 숭배하는 것에 대한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바알을 숭배하게 된 이유, 광야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웅덩이의 물 곧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을  선택한 이유는 농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서는 농사가 중요한데 당대 바알 종교는 계절의 변화와 건기와 우기에 내리는 비가 바알이 알아서 때가 되면 당연히 내리는 것으로 이해한 가나안의 신화를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일년이 순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는 자동적으로 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달라고 해야 합니다. 또한 이른비와 늦은 비를 주관하시는데 이스라엘이 기대한 것처럼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향한 신앙을 바알을 섬기는 신앙처럼 당연히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고 의당 그렇게 당연히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여호와가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바알이 자기들 마음대로 원하는대로 당연하게 내리는 쪽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섬기되 바알을 섬기듯 주권을 여호와가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에 맡겨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수의 근원된 여호와를 버리고, 제대로 물 곧 생명을 주관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한편 당대 물을 저장해서 농업용수로 관리하는데 웅덩이의 관리가 중요합니다. 잘 관리하지 못하면 물이 새거나 이물질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선택한 바알이 웅덩이에 있는 고인 물과 같습니다. 마시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여호와를 버리고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마시면 생명을 잃게 되는 웅덩이의 물과 같은 바알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영광을 무익한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자동으로 당연히 의당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관하심 가운데 진행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분처럼 섬기면서 여호와를 우상처럼 우리 욕망의 산물로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때에 주시는 분 정도로 믿는 신앙도 결국 같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를 기억하시고 채우시며 허락하시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공급하심과 채우심 그리고 허락하심 속에 진행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날마다 그분 앞에서 간구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뢰하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지금 내 삶의 주권이 주님께 있음과 내 삶의 모든 것을 주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오넌히 믿고 있는건가요?



14-17절 우리가 대를 이어 종살이하고 포로된 이유는 여호와를 떠나 자취(스스로 취한)한 결과입니다(정치적 범죄).

이스라엘이 씨종(대를 이어 종이 되는 것, 집에서 태어난 종)과 포로가 되고, 어린 사자들(주변의 어리석은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땅을 황폐하게 하고 폭행하며 상하게하는 참담한 결과는 결국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주관하시고 인도해 가시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그런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반역하여 떠난 결과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을 말할 수도 있고, 망해가는 남유다에 계속되는 이방의 침입과 포로되는 상황을 본다면 남북 이스라엘 모두를 포함하는 이스라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어리석은 이방 나라의 종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전쟁과 여러 폭행에 노출되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한 이유가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유민이 되게했고, 기업을 허락하여 거할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므로 낳은 결과는 하나님 아닌 것들에 종노릇하고 있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보호로부터 벗어난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탐욕에 그대로 노출되어서 참략당하고 약탈당해 포로로 끌려가고 땅은 황폐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가고 만 것입니다. 16절의 놉(애굽을 상징)과 다바네스(애굽으로 여행할 때 제일 먼저 만나는 성읍)는 모두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의지하던 나라들인데 그런 애굽조차도 오히려 유다의 정수리를 치는 것입니다. 믿는 나라에 뒤통수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관심하고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자초한 재앙인 것입니다. 여호와와 맺은 계약을 파기하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면서 주변의 강대국을 의존한 결과가 지금 이렇게 된 것입니다. 축복의 길을 거절한 이스라엘은 계약 파기의 결과를 고스란히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을 여호와께서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 아닌 것들이 더 우리를 살려줄 것처럼, 우리를 부요케하고 온전케 하며 행복하게 해 줄 것처럼 더 힘있어 보여서 여호와를 떠나 그들의 정치력을 기대하고 살아가려 하지만 그 말로는 이와 같이 속는 것입니다. 역사속에서 수없이 이러한 사레들을 접하면서도 여전히 여호와가 아니라 다른 정치, 경제 그리고 여타의 다른 손들을 의지하고 속고 또 속으면서도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없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뒤이어 이러한 부조리한 신앙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18-19절 여호와를 버림이 악이요, 여호와 경외함 없는 것(반역)의 결과는 고통입니다. 

생수의 근원된 여호와를 버리고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고 있고, 앗수르로 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어찌 된 것이냐고 여호와께서 외칩니다. 그런 악의 결과로 오는 징계, 반역으로 인한 책망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린 것이 악이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결과는 결국 고통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부조리한 행위는 강대국을 의지하다가 결국 파국적인 위험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굽(과 앗수르) 그리고 신흥 강국으로 부상중인 바벨론등을 의존하여 생존을 모색하려 합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수많은 시간동안 이러한 길이 사는 길이 아님을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 즉 이스라엘의 실존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를 버리고 신앙적으로는 우상을 섬기고, 정치적으로는 강대국에 의존하면서 터진 웅덩이같은 물을 마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시홀의 강(나일 강)과 그 강(유브라데 강)이 아니라 생수의 근원되신 여호와를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이러한 경고와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고 악을 행하고 맙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악과, 여호와가 아닌 다른 강대국을 의존한 결과는 결국 국가적인 파멸로 고통을 가져오는 심판을 당하게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이유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계약을 어기고, 가르침과 계명들을 소홀히 여기면서 여호와를버리고, 불순종하고 다른 것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향한 두려움 곧 경외심이 없는 신앙은 형식적이고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한 부분입니다. 사랑과 위로와 은혜와 복주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온전히 알지 못하고 내가 편한대로만 알고 믿는 것이 결국 다른 편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다시금 회복하기 원합니다. 



* 기도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때를 따라 이른비와 늦은 비와 같은 은혜 베푸시고

우리 삶을 주관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의 영광을 무익한 것들과 바꾸고

여호와의 섭리하심을 당연히 여기며

주님의 통치에 둔감하여지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닌 것들에 현혹되지 않는

굳건한 믿음 갖게 하옵소서. 

지금 우리의 행악과 고통의 원인이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것임을 알고서

여전히 주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쏟고

주님 아닌 사람과 돈과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잃어버린 신앙에서 벗어나

주님을 온전히 알고 경외하게 하옵소서. 

혼돈의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다른 샘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생수의 근원 되시는 주님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서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주님으로 해갈하며

주를 경외하는 신앙으로 굳건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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