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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Sep 18. 2017

예레미야 03:01-05 음행으로 온 땅을 더럽히고도

렘 03:01-05

예레미야 03:01-05 음행으로 온 땅을 더럽히고도 수치를 모르는 죄


예레미야 2장은 이제 유다의 죄악(혼합주의와 우상숭배)에 대해 고발하는데 3장은 그런 유다가 회복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율법적으로는 이스라엘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명기합니다. 또한 그들의 행음이 온 땅을 더럽혔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교리적 신앙에 갇혀 왜곡된 적용으로 탐욕과 죄악을 정당화합니다. 


1절 오직 신랑되신 여호와만 사랑해야 하는 것이 신부된 교회가 지켜야 할 정결규례입니다. 

신명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이혼한 아내는 타인의 아내가 된 후에 다시 원래의 남편에게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신명기 24:1-4).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스라엘이 돌아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규정하십니다. 그만큼 친밀하면서도 보호와 책임을 수반하는 관계이면서, 서로 사랑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한분 하나님만을 사랑하도록 계약하고 맺어진 관계를 깨고서 하나님과 이혼하여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지금까지 고발된 혼합주의 신앙은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것입니다. 부부관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혼합주의 신앙도 가졌지만 여기서는 아예 남편과 이혼하고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러 가버린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떠나 다른 많은 무리(우상들)와 행음한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법규정을 알고 있는데 돌아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이것은 계약 파기입니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서도 극도로 여성을 보호하는 쪽으로 말씀하셨지만 음행한 연고에 대하여서는 단호하셨습니다(5:32; 19:9). 이제 이스라엘이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과 결합할 길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만큼 또한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는 계약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 약속을 신뢰하는 것도, 그 약속을 지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신부로서 교회된 우리가 과연 이 약속에 신실한지, 그리고 거룩한 신부로서 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음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이후에 말씀이나 호세아서를 통해서 우리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희망을 보게됩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는 것은 더 심각한 죄악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3절 우리의 영적 간음으로 더럽혀진 땅에 대한 수치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행음은 방방곳곳에서 행해집니다. 워낙 많이 찾고 밟고 다녀서 산이 헐벗어질 정도입니다. 창녀처럼 길가에서 몸을 팔듯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습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그쳤고, 하나님의 징게로도 비가 그쳤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수치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 더럽혀진 것은 풍요제의의 성적 의식에 빠진 이스라엘의 죄악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혼합주의 신앙과 우상숭배는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자행 했습니다(2:20).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일부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임을 보여줍니다. 바울에게 풍요 제의를 기원한 성창은 모든 산들을 더럽혔습니다. 더욱 이들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우상울 숭배합니다. 몸을 파는 창녀처럼 정욕에 사로잡힌 자처럼 욕성을 만족시켜 줄 자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 행위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창녀가 저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것처럼 공개적으로 길가에 앉아서 즐겼습니다. 그렇게 약속의 땅을 우상숭배로 철저하게 더럽힌 것입니다. ‘헐벗은 산’은 조롱과 풍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푸른나무로 덮여야 할 산이 우상숭배로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땅으로 황폐하게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상숭배를 쫓다가 모든 것을 잃고 헐벗은 신세가 된 이스라엘의 비참한 운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결과는 하나님의 징계로 가나안 땅에 비가 그치고 가뭄이 찾아 오게 됩니다. 풍요를 기대하며 우상을 숭배하였으나 결과는 반대로 열매 없는 재앙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또 비는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알은 농사의 신으로 남신 바알의  정액(비)이 땅의 여신과 성적으로 결합하여 결실을 맺게된다는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땅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비와 땅의 결실이 바알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데도 수치를 모르는 이스라엘은 여호와게 돌아가기를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자신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수치를 알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하는 땅과 공동체가 부정하게 되고 더럽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를 민감하게 깨닫고 합당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주권을 믿는다면 자연현상이나 일상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민감하게 깨달을 수 있는 영적 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사인에 둔하면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는 일도 무디어지고, 급기야는 수치를 모르는 상태로 감각이 무디어지고 맙니다. 말씀앞에 서는 일은 이러한 영적 감각을 날마다 연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조그마한 하나님의 사인에도 민감한 감각이 그것을 깨닫고 즉시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음행으로 더럽혀진 나와 가정과 공동체의 부정을 말씀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들과, 깨닫게 된 죄악에 대해 수치를 아는 일들과, 이러한 모든 일에서 속히 돌아서는 민감한 순종의 모습을 갖길 원합니다. 



4-5절 말로 고백하는 신앙에서 삶으로 고백하는 신앙이어야 온전한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또한 청년 시절의 보호자(친구)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진노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풀어진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악행하면서 욕심을 이뤄갔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드물게 나옵니다. 바알과 풍요제의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어비지와 보호자(친구)로 친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요 친구이신 여호와께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배반했따고 고발하시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계약도 파기되었는데 이스라엘은 계약관계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급기야 이스라엘의 배반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보호해주셔야 하는 아버지로, 처음 사랑에 매여서 맹목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어 주셔야 하는 보호자(친구)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아버지와 보호자로 믿어버리면서 하나님의 진노또한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일시적 현상이고 시간이 지나면 풀어지는 분노였기에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만 이해하고 믿고, 진노하고 심판하시는 분으로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부탁만 하면 용서해주시는 분이라고 믿기에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아무때라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삶의 내용과 신앙의 색깔을 완전히 다르게 갖게 합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심각한 우상숭배와 위선의 죄악에 빠진 것인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바알과의 음행에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고 말하고, 심지어 회개마저도 입술로만 하지 진실한 회개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통과 교리로만 알고 있을 뿐 실제 삶의 내용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악용하고 이기적으로 적용하고 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도 힘써야 하고,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되도록 힘써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앎도 문제이지만, 알고 있는 바를 잘못 적용하고 오용하고 남용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모르고 지은죄도 문제이지만 알고 교묘하게 범죄하는 일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고, 그에 다라 자신들의 신앙을 합리화하면서 한편으로는 음행하면서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알량한 지식과 얕은 신학과 무게없는 믿음과 경망스러운 말씀의 오용과 남용의 사례들과 아전인수격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여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일탈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우리의 공동체는 안팎으로 비난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 결국 성경을 바로 알아가는 일이 이러한 문제와 위기에서 우리가 지금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행동양식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기도

우리를 거룩한 신부된 교회로 택하시고 

사랑과 은혜 속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친구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거룩한 신부로 

온전히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행음에도 큰 용서로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성령을 근심케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게 지켜 주옵소서

우리 삶의 자리에 자행되는 죄악을

말씀의 거울앞에 속히 발견하게 하시고

지금도 미혹되는 음행에 관하여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주옵소서. 

수치를 아는 신앙 갖게 하옵소서. 

나의 아버지요 친구로 허락해 주신 주의 은혜 앞에

믿음의 오용과 남용을 막고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사이에서

하나님이 선을 오용하고 악행하지 않도록

또한 탐욕의 종이 되지 않도록

무릇 마음을 더욱 지켜 주옵소서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사랑하고 신앙하는

믿음 갖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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