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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Sep 21. 2017

예레미야 04:05-18 임박한 심판은 너희의 악행 때

렘 04:05-18 

예레미야 04:05-18 임박한 심판은 너희의 악행 때문이다


돌아오라는 여호와의 부름에 끝내 응답하지 않으면 마침내 비극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나 모든 것을 사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루살렘은 마음의 악을 씻어야 했지만 결국 악한 생각으로 여호와를 거역하는 길로 행했기 때문에 이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5-8절 임박한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에 나팔을 불어 재난과 큰 멸망 곧 하나님의 심판의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라하고, 유다 백성은 애곡하며 지체하지 말고 피하라고 합니다. 


나팔은 전쟁과 심판의 신호입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면서 긴박하게 처신해야 할 것들을 여러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외치라, 모이라, 들어가자,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말라). 신호를 보내는 것은 적어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경고하는 소리에 결국 여호와께로 돌이키지 않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은 결국 심판의 도구를 들어서 진행하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다시한번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이스라엘이 돌이키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늘 진노중에도 궁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강퍅한 이스라엘 패역한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의 긍휼을 외면합니다. 북방, 사자, 재난, 큰 멸망, 나라들을 멸하는 자, 황폐, 맹렬한 노 등의 표현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인 북방에서 온 대적의 무자비함을 짐작케 하는 표현들입니다.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이스라엘의 악행은 결국 스스로 길을 굽게하여 심판을 자초한 결과입니다. 


몰라서 돌이키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패역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외침에도 깨닫지도 듣지도 돌이키지도 않는다면 더이산 하나님이 주신 기회마저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그리고 오래참으심의 끝을 마침내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긴박함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 나팔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이 세대를(이 민족의 교회를) 향한 나팔소리가 곳곳에서 들립니다. 지금 우리가 긴박하게 피하고 세우며 모이고 지체없이 들어가서 외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회개하려거든 여호와께 돌아와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흔들리지 말고,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깨어나는 성도가 있다면 그것이 이 민족 교회의 희망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미 지도자들은 강퍅하여 이러한 나팔소리는 듣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고 볼 수 있기엔 그 눈이 너무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9-10절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는 때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 날에 왕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낙심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슬퍼하여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속였다고 탄식합니다(이 부분에 대한 이해는 맨 마지막 부분에 도움글을 첨부했으니 참고하세요)


지도자는 위기의 상황에 대하여 신앙(학)적인 대응책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어야하고, 위기의 상황들에 대한 문제들과, 삶의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것이 주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 부지런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두드리고 구하고 찾아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평소에 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감이 진행되어야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평소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닥쳐오고 나서야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찾다가 이해할 수 없어서 놀라고 맙니다. 도무지 싸울 수 없는 대적들을 보고 두려워하고 낙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신학으로 예루살렘이 있는 성전이 결코 망할 수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상황이 된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놀라고, 선지자는 자신들이 예언한 대로 평강이 아니라 재앙이 닥친 현실에 깜작 놀라는 것입니다. 


에레미야는 탄식하면서 이렇게 된데는 여호와께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다고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시켜서 평강을 말하게 했는데 결국 칼(전쟁)로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표현이며,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예레미야의 신앙고백이 담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참으시면서 계속적으로 말씀하시고 깨우시고 돌이키도록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충격적인 선포를 통해서도 깨우길 원하시는데 예레미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여호와를 향하여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분의 통치방식과 내용들을 성경이 말하는 부분까지 주님이 계시해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데까지만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영역을 넘어서는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섭리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부분입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신다는 것과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시며 우리를 향한 계획이 생명 곧 살리시고 회복 시키시려는 것임을 믿습니다. 



11-12절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심판하시지만 여전히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계십니다.  

심판의 때에는 광야 헐벗은 산에서 뜨거운 바람이 백성에게 불어 올 것입니다. 이것은 키질하기 위함도, 정결을 위함도 아닌 심판을 위한 강한 바람입니다. 대적은 구름같이, 회오리 바람같이, 독수리보다 빠르게 와서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악을 씻고 악한 생각을 버린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진행하는 심판은 단순하게 이스라엘 가운데서 알곡과 가라지를 골라내는 키질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을 잠깐 징계하여 음행을 버리고 정결하게 하려는 정도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서 강한 바람(군사적 위협)으로 쓸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심판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지금 여호와께서 직접 행하실 일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다면 그것이 멸망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직감하면서 그제서야 탄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름같이 회리바람같이 독수리같이 빠르게 멸망의 날은 다가옵니다. 


여호와의 심판이 이미 임박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적 심판의 날과, 공동체와 민족적 심판의 날, 그리고 세상의 심판의 날은 결국 개인의 심판의 날(일차적 죽음)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다 가까운 시일내에 우리 모두는 이생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연장이 언제인지는 주님의 주권하에 달려 있습니다. 세월은 살같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누구나 임박한 심판 앞에서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오늘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그 날들을 입박한 심판앞에 설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날이 죄인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날이 오는 것을 어떤 삶의 내용으로 채우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니 악한 생각을 오래 마음에 오래 머물게 말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이렇게 마음을 지켜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품지 못하고 여전히 악한 생각을 오래도록 품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그 날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기를 소망가운데 바라보면서 오늘의 삶을 무엇으로 채워갈지  우리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고 악한 생각을 버리고 어떻게 말씀을 품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15-18절 예루살렘이 선택한 길과 행위가 이 쓰라린 재앙을 초래한 것입니다. 

단에서부터 에브라임까지 재앙을 공포합니다(15). 적의 공격이 전령의 보고보다 더 빨리 다가올 것이며, 유다 성읍들을 공격하는 적의 외침이 들리자 마자(16) 곧 예루살렘이 적에 의해 포위를 당할 것입니다(17a). 이렇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행한 길과 행위가 자초한 이 일은 그 재앙의 고통에 마음 깊숙한 곳까지 아프게 할 것입니다. 


북에서부터 이스라엘 전역에 재앙이 임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이 행한 길과 행위가 적의 침략을 초래한 것입니다. 죄의 결과(열매)는 이와 같이 재앙입니다. 예루살렘이 선택한 길과 행위가 심장까지 파고드는 쓰라린 재앙을 초래합니다. 그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왕되신 주님을 거역하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만날 수도 없고 도움을 얻을 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그 길과 행위가 이와 같은 재앙을 초래한 것입니다. 결국 자초한 이 일로 말미암아 마음에 미치는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어려움들을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전에 스스로 범죄한 행위아 초래한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길과 행위가 어떤 방향과 목적과 뜻을 가지고 하는지 주의 말씀앞에서 인도와 조명과 조율을 받아야 합니다. 그 길과 행위가 악함이 아니라 선함을, 고통이 아니라 평강을 지키고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 기도

심판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나의 주 하나님 아버지

임박한 심판, 유한한 우리의 생명의 한계 앞에서

겸손히 주님이 긍휼하심을 구합니다. 

부디 지도자로서 위기와 문제들을

말씀으로 잘 깨닫고 이해하여 잘 나눌 수 있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에는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음을 알고

늘 겸손하게 행하게 하옵소서. 

심판의 때에라도 긍휼을 베추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인내로 거룩한 길 가게 하옵시며

살같이 빠른 광음을 아끼며 소중하게 여기며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고, 악한 생각들을 버리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게 하옵소서. 

주께 온전히 순종하는 길과 행위로

삶을 채워가는 마음과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속였다’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김필회교수(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구원예언자들에게 평강을 외치게 해서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까? 라고 예레미야는 지금 하나님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본문만으로는 잘 이해하기 어렵다. 

   왕상 22:19-23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언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참/거짓 예언자로 쉽게 나누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스라엘도 그렇게 간단하게 나눴을까?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은 예언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아합이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하러 갈 때 신탁을 의뢰한다. 그때 예언자들이 한 입으로 승리를 예언한다. 미가야 예언자만 반대 되는 예언을 한다. 그러면서 미가야는 자신이 본 환상을 아합과 아합의 예언자들에게 알려준다. 왜 아합의 예언자들이 그처럼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에 나가면 승리를 하리라는 예언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보여준다. 아합의 예언자들의 예언은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예언이다. 아합을 꼬셔 내서 전쟁에서 죽게 만들려는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가운데 하나를 보내 그가 거짓 예언자가 되어 거짓말을 전하게 했다. 여기서 거짓말을 전하는 주체가 여호와가 된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예언을 이해한다.

   구약시대의 예언은 선한 것, 악한 것, 좋은 것, 나쁜 것, 이해할 수 없지만 모두 하나님이 결정권자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한다. 유일하게 세계 역사를 결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아합의 운명도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그래서 아합의 죽음의 음모에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신구약 중간기에 신학적으로 걸림돌이 된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 거짓을 조장하실 수 있는가? 그래서 중간기에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악은 사탄으로부터라는 사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구약에는 사탄이 등장하지 않는다(고유명사로). 역대기에 유일하게 등장한다. 대부분은 “대적자”로 나온다.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악한 것은 사탄이 주관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럼 이 세상이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장이 되다. 하나님이 낮아지고 사탄이 하나님과 동급이 되는 신학적 가르침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너무 사탄을 강조하지 말라. 사탄을 자꾸 높이면 하나님과 맞서는 또 하나의 신이 되어버린다. 

   구약은 한 분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멸망을 결정하셨기 때문에 예언자들에게 구원 선포하게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길로 가게 해서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책임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명쾌하게 해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또 무시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속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는 데까지만 나가야지 그 이상은 이해 하기 어렵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부분’이 있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단지 알고 있는 부분은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한가지만 분명히 알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분의 계획 아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되는 지는 다 모른다.

   결국 예레미야는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여호와께서 속였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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