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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Sep 28. 2017

예레미야 07:01-15 유다 백성이 쫓겨나게 된 이유

렘 07:01-15

예레미야 07:01-15 유다 백성이 쫓겨나게 된 이유(성전 설교)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성전 문에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합니다. 그것은 성전을 찾는 이들에게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요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구원해 줄 것을 믿었지만 이를 거짓말이라 하고 길과 행위를 바르게(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일) 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기만이며 결국 실로와 북이스라엘처럼 쫓겨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설교합니다. 

*

본문은 소위 ‘성전 설교(7장, 26장)’로서 성전과 관련한 유다의 기만적 신앙, 왜곡된 신앙, 껍데기 신앙을 고발하며 참된 예배와 신앙 그리고 구원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의) 그 자체가 아니라 바른 길과 행위 곧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삶(과 공동체의 형성)이 수반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와 같은 것이 없는 성전은 하나님과 거리가 멀고 거짓이며 도둑의 소굴일 뿐이며 결국 실로와 벧엘처럼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지금 남유다의 신앙이 삶의 변화 없는 곧 정의와 공의의 실현이 없는 제의적 신앙으로 전락하고 여호와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행하지 않는 신앙으로 전락한 원인은, 잘못된 성전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탐욕적 이해(혼합주의로 흐른)에 갖힌 무지와 어리석음에 근거합니다. 유다의 이러한 기만적 신앙을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역설적인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예레미야로서는 지금 이 성전 설교는 당대 굳건한 성전 신학의 전통위에 서 있는 종교 기득권을 가진 이들과 이러한 신앙에 부화뇌동하는 백성들로부터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행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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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분의 뜻 곧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입니다(미가서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바꿔 말하면 이와 같은 삶의 변화가 없는 믿음과 예배는 결국 기만이며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존재의 변화, 그리고 믿음의 벗들이 ‘함께 함’을 통해 누리는 기쁨이 없다면 성전 혹은 교회는 이미 그 존재 의미를 잃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_김기석 <끙끙앓는 하나님> 중에서



1-2절 예배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성전 문에 서서 예언하라 합니다. 그것은 예배하러 가는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끝까지 기만적 신앙 곧 삶의 변화 없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삶을 변화되지 않고, 선지자를 통한 선포에 눈과 귀를 막고 살아가는 근본적인 원인은 성전에 대한 잘못된 신앙에 기인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유다의 기만적 신앙에 경종을 울리고 왜곡된 신학이 고착된 성전에서 제의 종교를 통해 종교적으로 안일한 만족에 빠진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된 성전 신학을 깨기 위한 장소로 예루살렘 성문 앞에 아닌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서 외치도록 한 것입니다. 그 앞에 서서 예배하러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는 일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기름진 제물과 화려한 예배, 웅장한 성전, 탐욕에 물든 제사장과 이들을 통해 거짓 평안을 보장받으며 나름대로의 종교심을 충족하고, 성전 그 자체만 있으면 만사형통이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부지런히 성전을 들락거리는 이들을 향해 외치는 이야기가 예배보다 먼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은(5:30-31) 선지자와 제사장과 백성들이 모두가 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어리석음, 그리고 왜곡된 성전 신학, 탐욕에 기인한 우상숭배, 하나님에 대한 무지등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결국 제의 종교 곧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와 제물을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드릴  뿐 삶의 변화와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일과는 상관없는 제의 중심적 신앙, 제의만 강조하는 신앙으로(예레미야는 이를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의가 아니라 삶이 문제이고, 성전이 문제가 아니라 성전 밖에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제의 곧 예배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의 삶 곧 하나님이 말씀을 순종하는 선한 일을 이루는 그 삶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3-7절 성전이 아니라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사는 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 살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과 구원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데 이는 거짓말이니 믿지 말라 합니다. 오히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정의, 소외된 자들을 압제하지 않음, 무죄한 피 흘리지 않음, 다른 신들을 따르지 않음)이 약속의 땅에서 사는 길이라고 역설합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원하시는 것은 성전을 화려하게 짓고, 예배를 웅장하고 멋지게 드리고, 제물과 여타의 헌물을 많이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미 앞서 여호와의 (선한)길은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6:16,19)으로 설명했습니다. 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말을 세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면서 그것은 거짓말이라 합니다. 성전이 성전 되는 것은 그곳에서 예배드리는 이들의 삶에 달려 있는 것이지 화려한 성전 그 자체는 다만 건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건물 성전을 보면서 그 성전이 거룩한 성전, 하나님이 함께하는 성전, 구원의 성전으로서 자신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살게 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를 거짓말이라 하면서 믿지 말라 합니다. 


이어서 바른 길과 행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사항들((정의, 소외된 자들을 압제하지 않음, 무죄한 피 흘리지 않음)은 모두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결국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 빠진 제의와 종교와 신앙은 다른 신 곧 우상을 따르는 우상숭배(공의와 정의를 행함이 없이 지극히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행위에만 치중하는 신앙)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결국 정말로 다른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는 것은 탐욕에 기인한 우상숭배의 대상이 결국 ‘돈’과 연관이 있습니다. 제의를 드리는 이유도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배만 불리는 그런 신앙이 결국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이며,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우상숭배가 바로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없는 돈의 우상입니다. 


성전은 특정 공간 혹은 건물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삶을 통하여 이 땅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내안에 사신 그리스도로 사는 것, 성령의 인도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뜻인 정의와 공의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거룩한 삶이고 왕같은 제사장의 삶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미 이 땅에서 세우고 살고 누리며 증거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8-11절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함이 없는 성전은 구원과 거리가 먼 가증한 일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함이 없는 성전 신학을 무익한 거짓말이라고 선언하고 십계명(1,6,7,8,9)을 어기는 행위를 하면서도 성전에 와서는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데, 결국 가증 한 일 곧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길과 행위를 굽게하여 삶이 없는 제의적 신앙을 고수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알고 계시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보며 모독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실상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삶’과는 정반대입니다. 


존재와 행실의 변화가 없는 종교 행위는 기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제의적 종교에 몰두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죄악을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더 화려하고 많은 제물들을 드리는 것을 통해서 더 많은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제의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앙으로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지만 결국 이러한 확신도 자신들의 탐욕적 행위를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음을 꼬집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와 잘못된 구원관에는 정의와 공의를 버리고 소외된 이들을 짓밟고 군림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행위를 서슴지 않으면서도 성전에 들어와서는 용서받고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서 제사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도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제사에만 힘쓰는 백성을 향해 성전을 “도둑의소굴”로 만든다고 책망하시면서 가난한 자에 대한 행동의 근본에는 재물 욕망이 놓여 있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것은 재물로 구체화된 우리의 욕망입니다. 


일주일 내내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삶 곧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거룩한 삶과는 거리가 먼 탐욕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주일에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에 와서는 헌물과 예배한번으로 자신들의 죄가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위안을 받으면서 또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탐욕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신앙이 우리의 자화상이며,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고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을 기만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교리적으로 오직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면서 길과 행위 곧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일은 기껏 선택사항 정도로 돌려서 구원과 무관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면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은 좋고 삶이 약한 정도로 표현할 문제가 아니라 그의 믿음 자체가 문제이며, 예레미야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떠난 것이며 다른 신 곧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값싼 사죄 선포와 은혜로 전락한 복음이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신앙고백이나, 성전과 제사를 의지하는 것은 그들의길과 행위가 올바르지 않을 경우 우상을 섬기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문제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느냐이다. 달리 말해 그가 사는 삶을 보면 그가 믿는 신이 누구인지 드러난다.” “성경 구절들을 틀림없이 암송하고 인용하면서 오직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에 취한 오늘이 우리 교회는 예레미야의이 고발 앞에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싸구려 사죄 선포, 싸구려 은혜의 약속이 난무한다.” _김근주 <특강 예레미야> 중에서 



12-15절 성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성전 제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시킨 유다 백성에게 심판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실로에서 행한 이스라엘이 악에 심판을 언급하십니다. 지금 유다는 그들과 같은 일을 행하였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며, 여호와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선고합니다. 그래서 실로에 행한 것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행할 것이며, 에브라임(북이스라엘)에 행한 것처럼 약속의 땅에 사는 너희를  쫓아낼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기만적 신앙과 잘못된 성전 신학에 사로잡힌 유다는 실로와 북이스라엘(에브라임)처럼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이스라엘의 중앙성소였던 실로는 제사장직을 맡고 있던 엘리가문의 부패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여호와의 심판에 넘겨졌습니다(삼상 1-4장). 예루살렘도 그렇게 될 수 있는데 유다 백성은 깨닫지 못합니다. 성소 자체가 이스라엘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악을 행하면 성소가 있는 도성과 나라라도 하나님을 멸망에 넘기십니다. 앗수르를 통해 실로를 멸망시키고 에브라임 자손(북이스라엘)을 고향 땅에서 쫓아내신 것처럼 이제 동일한 전철을 밟고 있는 예루살렘 성소를 멸망시키고 유다 백성을 쫓아내실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오늘 우리가 믿는 교리와 신앙에 대해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바른 가르침에 기초한 신앙이 아니라 전통을 따라서 알게된 하나님과 구원의 길등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상당 부분 왜곡되거나 편중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우리에게 형성된 교회의 모습이 결국 하나님이 찾으실 만한 신앙과는 거리가 말고, 교회는 믿음과 삶이 분리되었으면서도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강조하면서 구원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정죄하고 가두는 일에 서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신앙이 좋은 것처럼 착각합니다. 공의와 정의에는 무관심하면서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나도 손해 보지 않으려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세상에 힘으로 저항하려 합니다. 돈이 최고의 숭배의 자리에 있어서 교회의 운영과 여타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고 있으면서도 축복된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이것이 고착화된 교리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안일한 신앙과 말씀에 대한 오판의 결과라고 한다면 다시 말씀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찾으시는 그 신앙인지, 성경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요청하시는 길이 무엇인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간다면 실로와 벧엘과 예루살렘의 전철을 따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신앙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은 역설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신앙이 몰상식이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일상적 관계나 삶을 파괴하는 가르침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 영성에 가깝습니다.” - 김기석 목사님의 <끙끙앓는 하나님>중에서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 이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도아니고, 복을더 얻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구원과 생존 여부를 결정 지을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길과 행위 곧 정의와 공의 곧 선을 행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능력으로 사랑하며 선을 행하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길로 행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 기도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주님의 나라 이루도록 택하사 

주님의 몸된 교회로 성전으로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먼저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게 하옵소서. 

주께서 제시해 주신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일에

열심을 품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것과

성전은 우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온전하게 세워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행하게 하옵소서. 

예배에 앞서 소외된 이들을 돌아보며

기꺼이 사랑을 실천하여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비로서 주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의 삶임을 분명히 알게 하옵소서. 

왜곡되고 고착된 교리를 바로잡고

삶의 변화 없는 예배에만 치중하고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예배를 추구하는 탐욕에서 벗어나고

모든 가증한 일들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실로와 벧엘 그리고 예루살렘에 행하신 

여호와의 일을 깊이 새기고

역사적 전철을 밟지 않는 교회와 신앙이게 하옵소서.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한 교회 안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믿음의 사람, 예배자로

부족한 종도 세워지고, 그런 이들을 세우는 목회로

내용과 방향을 흔들림 없이 채우고 행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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