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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14. 2019

마태복음 12:31-37 성령 모독죄와 심판

마태복음 12:31-37 

마태복음 12:31-37 성령 모독죄와 심판


사람과 인자에 대한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됩니다.


# 31-32절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 말로 인자를 거역하는 죄는 사함을 얻지만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죄는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우선 사람을 향한 죄와 모독은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죄에 대한 오용과 남용을 허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을 향하여 죄를 범하는 일에 대하여 용납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의도를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사람을 향한 죄에 대하여 용서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수용하고 적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합니다. 인자를 거역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아직은 오해와 잘못된 기대가 교정될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용서받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거나 거역하는 죄는 무엇일까요? 우선 문맥상으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축귀사역 곧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한 사역들을 바알세불의 사역으로 정죄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사탄의 사역으로 매도하는 것은 뒤이어 나오는 말에 대한 심판의 내용에서 보면 결국 바리새인들이 단순한 내뱉은 말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사상에 깊숙히 뿌리내린 인식이기에 용서받을 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가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로 앞서 말한대로 성령의 일을 사탄의 일로 매도한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나라의 일에 대한 거역 내지는 반역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할이 하나님나라가 드러나게 하는 것인데 이를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죄에 대한 용서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데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일은 죄 용서의 통로를 스스로 차단하는 것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넷째로 인간, 인자 곧 사람에 대한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성령(하나님)에 대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 죄가 단회적인 죄가 아니라 지속적이며 고질적인 죄, 반복되는 죄로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말에 대한 심판의 문맥을 보면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죄가 단 한번의 실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반복된 죄, 고질적으로 품은 것들이 드러나는 행위이기에 하나님의 오래참의 한계, 기회를 결국 수용하지 못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기에 용서받을 수 없다고 그것도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훼방한 죄와 인자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에 대한 분별과 판단을 우리가 명확하게 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판단과 정죄의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

우리를 구원하시며,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통치와 인도하심에 대한 부분들을 한번 용서함을 받고도 지속적, 반복적으로 동일한 죄에 거하는 것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그것이 사람을 향한 것이든 하나님을 향한 것이든 동일한 죄를 반복적으로 범하는 죄에 대해서는 분명 속히 떨치고 회개하며 용서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게 해주시는 것이 첫번째이고, 그렇게 알게 된 주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을 행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능력을 주시는 것이 성령님의 일입니다. 그런다면 주님을 알아가는 것을 게을리 하거나 거역하는 일들 그리고 깨달은 말씀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제 소견대로 살아가는 일들에 대해서도 그 심각성을 알고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 33-35절 말은 그 마음에 든 것에 대한 열매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좋은 나무와 좋지 않은 나무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악하니 결국 그 악한 것을 말로 드러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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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품은 보이지 않는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결국 표현한 것이니 마치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지의 여부를 따라 호불호를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은 오래도록 배우고 익히고 품은 것이 자리한 것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식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거룩하다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주님은 그들의 마음에 품은 것이 악하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앞서 예수님의 사역을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한 것이라는 매도한 것은 이들의 영적 무지를 드러내며 더 나아가 영적 분별력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기에 결국 말과 행위로 그 열매가 드러난 것입니다. 우선 앞서 주님을 향해 함부로 말했던 이들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바리새인들 전체를 다 그렇게 정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

결국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말과 행의 열매들을 보게 됩니다. 속에 품은 것을 결국 말하고 행동한다고 볼 때 결국 우리의 말과 행동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심히 부패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직 정결케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면 날마다 우리 마음의 묵상이 주님이 받으실 만한 정결한 제물이 되도록 부단히 주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주님의 씻으심 입길 원합니다. 나의 말과 마음을 그리고 몸이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질 수 있도록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주님 우리를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 36-37절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심문을 받아서 의롭다 함과 정죄함을 받은다고 경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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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말은 아마도 사람에게 상처를 준 말로 우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앞서 언급된 성령을 훼방한 죄에 더하여 마음에 품은 것이 좋지 않은 열매로 드러난 것과 연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은 바리새인만 대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 볼 때 이전에 그리고 이후로도 우리의 말에 대한 관리 곧 마음에 품은 것에 대한 것들을 주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길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말만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행한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각자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깊이 고려하며 우리의 언행심사를 주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산제사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주님과의 관계에서, 교회 공동체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거룩한 나라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언행심사가 천국 복음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데 합당한 것이어야겠습니다. 정결케 하는 성령의 능력이 나의 말과 마음을 온전히 주장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 기도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언행심사에 심각함들을 잘 분별하여

성령을 거역하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님 붙잡아 주옵소서.

마음에 정한 것을 품을 수 있도록

바르게 보고 듣고 먹게 하옵소서.

무익한 말을 부지불식간에도 쏟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고

상처를 준 이들을 향해 용서를 구하고

살리는 말, 유익한 말

격려와 위로와 사랑의 말로

가정과 공동체를 세워가게 하옵소서.

오직 성령의 정결케 하심과

온전케 하심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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