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21-28
마태복음 16:21-28 천국 백성이 가야 할 길
새로운 전환점에서 이제 예수님께서 앞으로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시자 베드로가 항변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고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것과 각오를 말씀하시고 마침내 주님이 다시오실 때에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을 것이고, 심지어 여기 있는 이들 중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 21-23절 천국 백성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4:17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던 전환점에서, 이제 십자가의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때가 도래 했다는 전환점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사건을 예언하시며 나타내십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 죽음을 당하고 삼일만에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 베드로는 강력하게 항변하며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하시면서 단호하게 사탄이 하는 짓과 같다고 물러가라고 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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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과업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십니다. 우선 이 일이 일어나는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이면서 가장 거룩한 성이고 하나님의 집이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라 여겨지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성에서는 지금 하나님 아닌 것들이 하나님 노릇하고 있으며 그 선봉에 소위 종교지도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잘못된 신앙과 전통이 결국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때리고 조롱하고 심문하며 급기야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합니다. 진짜 주인이 오셨지만 오히려 그를 배척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과 신조 안에 갇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의 길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는 단순히 세 가지 사건만 특징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전생애 모든 삶을 다 포함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여기서는 향후에 있을 고난과 죽음과 부활만으로 이해해도 되지만 그 이후의 승천과 여타 주님의 행하신 모든 사건들을 다 포함해야 주님의 모든 과업이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을 읽어 오면서 보았듯이 주님의 지난 삶의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엇고, 많은 이들의 비난과 조롱속에서 죽음같은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모든 것들의 결정적인 사건이 십자가에서 최종 종결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역 가운데서 많은 이들이 회복되고 온전케 되는 부활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여정은 이 땅에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고 마침내 부활 승천하셔서 모든 일을 완성하시는 전 생애 모든 사역(이를 ‘예수 사건’이라고도 표현합니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결국 베드로를 통해 모든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간의 여정에서도 주님이 비록 많은 기적과 가르침과 이적들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지만, 주님이 행하신 방식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거짓된 왕들과 기득권자들은 건재하고, 로마의 지배는 현재 진행중이며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상황이 여전했던 현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 베드로의 성에는 차지 않습니다. 일련의 기적 사건들을 통해서 이제 사람들이 조금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시점에서 정작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메시아 곧 로마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다윗의 왕위를 회복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국을 이뤘던 그 시대를 회복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일의 선봉에 서시는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있어서는 안될 이야기이고, 그간 3년을 주님을 따르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던 베드로에게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두었다가는 자신을 비롯하여 주님을 따른 모든 이들이 헛물만 켜는게 아닌가 하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극단적 행동을 취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곧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유혹하고 걸림이 되는 심각한 행위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 일이 결코 주님에게 있어서는 안되고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좀 전에 주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칭찬을 받고 천국의 열쇠까지 준다고 할 때만해도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뭔가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베드로에게 청천병력같은 주님의 예언은 그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따지듯 주님을 향하여 항변한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고,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이런 일이 결코 주님께 있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결국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행위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들을 방해하고 걸림이 되는 사탄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 물러가라 호통을 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시던 주님을 시험한 사단이 주님을 넘어지게 하려고 시험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며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 곧 사람의 생각과 방법과 욕심을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반석이었던 사람이고 천국의 열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에서 사탄의 하수인과 같은 행동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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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배후에 있는 사탄을 향한 말이든 베드로를 향한 말이든 중요한 것은 결국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결국 사단만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뜻하시고 계획하신 일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욕망과 방식으로 꿰어 맞추다 결국 하나님의 계획과 방식과 섭리를 따르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기대와 욕망과 방법을 따라 주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시고 진행해야 한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하나님의 꿈이 아니라 지도자의 욕망을 따라 미혹된 줄도 모르고 분별력없이 휩쓸려 맹인이 인도하는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고민되는 것은 우리의 언행심사를 비롯하여 나와 우리. 가정 공동체와 거룩한 주님의 몸된 공동체가 과연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으며, 사람들의 유전과 방식과 방향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해 가고 있는지, 잘 살고 있는지 하루에도 열두번 이상 문득문득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부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님의 뜻을 생각(묵상)하며 주님의 때, 주님의 방식, 주님의 생각을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잘 분별하고 깨달아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 24-26절 천국 백성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을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제 목숨을 걸고 따를 정도여야 한다고 그래서 주님을 위해 모든 주권을 이전할 때 참된 목숨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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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길은 천국 백성의 길이요, 성도의 길이요,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결국 주님을 믿는 모든 자들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주님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에 예외는 없습니다. 제자훈련 받은 사람만, 리더들만, 특별한 사람들만 가는 길이 아니라 천국 백성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다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여전한 특권과 왜곡과 편법이 동원되어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 자칫 사람의 일(방식, 방법)을 하는 그것이 내용이든 방법과 방향이든 타협적인 변질과 왜곡이든지 심각한 지경에 있는 부분들이 알곡과 가라지처럼 혼재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같은 의미의 말씀을 두번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것은 고난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이들이 ‘자기’ 부인이라 하지 않고 ‘자아’를 부인하고 죽여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아니 어떻게 자아를 죽일 수 있으며, 자아를 죽이면 그럼 나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표현을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기 부인과 자아를 죽이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자기 부인은 주님의 방법과 때와 뜻(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곧 자신의 생각, 방식, 처세 등등의 모든 방식들을 부인하는 것이며,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었던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힘으로 되긴 힘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되면 주님은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해 주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살게 해주시고, 새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나는 것을 거듭난다고도 하고 결국 그렇게 다시 새롭게 된 자아, 곧 새 생명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를 죽인다고 하는 표현을 자칫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옛 사람의 방식들은 부인하고 새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순종하는 백성으로서 주님이 가신 길을 충성되이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새 백성, 천국 백성의 삶의 길입니다.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고, 잃으면 찾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말한대로 제 목숨은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새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올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으로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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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나의 욕망과 욕심을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일도 내 방식 내 생각 내 맘대로 하는 것은 마치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통해서 천국의 백성이 되었기에 우리는 이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로 옷입은 새 사람에 합당한 언행심사와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백성의 삶이겠지요? 아직도 부인하지 못한 우리의 언행심사가 있다면 지금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걸림이 되어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럼 부질없는 그것을 얻으려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무엇보다 천국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27-28절 천국 백성은 행한대로 보응을 받고 마침내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자가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각 사람이 행한대로 보응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듣고 있는 이들 중에는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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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와 무리들 중에서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다는 선언을 두고 보면 인자가 그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대한 해석을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재림이나, 최후의 종말의 그림을 연상하게 되면 지금 현실을 부인하게 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극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인자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는 것은 재림과 유사하지만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AD70년의 예루살렘 파괴 모두에도 해당되는 사건입니다. 이러한 예수 사건의 완성이 부활 승천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왕권 회복, 곧 왕으로 등극하여 천하를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재판은 공정하게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공의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28절의 말씀은 ‘인자가 올 때’, ‘인자가 그의 왕권을 가지고 올 때’가 바로 재림을 말한다기보다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에 이후 왕위 등극에 대한 그림 언어입니다. 심지어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살아 생전에 주님이 오신다(재림)는 얘기인데 그런 형태로 이해했다면 누가 오신 주님을 보았을까요? 그러니 재림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과 승천 그리고 AD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이 예수님의 예언대로 무너진 것을 본 이들 모두 예수님의 왕권, 그리고 메시아 되심을 깨닫고 확인되는 것이기에 이것을 인자의 임함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인자의 임함에 대해서도 하늘에서 땅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왕적 권위를 부여받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타나는 것’을 온다 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도 재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영광과 권위를 부여받아 그 권위가 세상 가운데 드러나게 되는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예수님 당대 사람들의 생전에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성전파되 등이 일어날 때 모두다 성취된 것입니다.
한편 인자의 오심에 대한 이해를 본문에서는 이렇게 해야겠지만, 최종적인 완성은 재림 때에 그 절정에 도달할 것이고 이에 대한 설명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다시 다뤄지게 됩니다. 여 여기 본문은 너무 재림으로 단정지어서 번역하지 않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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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의 영광을 우리는 하다한 증인들의 증언과 성경을 통해 들었고, 믿음으로 그 영광을 보았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깨닫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님이 인자로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하는 것을 보았고,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시는 원리에 대해서도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주님의 왕권을 가지고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 주님을 말씀을 통해 날마다 만나고 듣고 순종하는 삶의 여정이 천국 백성의 삶의 여정입니다.
# 기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사람의 일을 생각하여
주님의 일에 걸림이되고 오해하고 왜곡했던
지난 날의 과오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묵상해 보니
우리를 향한 한량없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다 하나님의 일을 거스리는
어리석은 자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의 내용들이
우리 주님께 노출되어 마침내 그날에
행한대로 보응할 때에
주님의 기쁨이 되길 소망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주님의 역사를 통해
더욱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뢰하고 따를
큰 믿음 주시길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