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14-27
마태복음 17:14-27 믿음 없는 세대로 인해 고통 당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 간질에 고생하는 아들을 둔 사람이 찾아와 제자들이 고치지 못함을 호소하시자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한탄하시면서 꾸짖어 귀신을 쫓아내 아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능치 못할 것이 없다 하시고 이후 갈릴리에서 다시금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니 제자들이 근심합니다. 가버나움에서는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는 이들의 실족을 막기 위해 아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성전세를 내십니다.
# 14-18절 믿음 없는 제자들로 인해 고통 당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무리들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둔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호소합니다.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능히 고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물불을 안가리고 넘어지는 바람에 치유를 위해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을 패역이라 안타까워하시면서 언제까지 주님이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믿음 없음을 참겠느냐고 한탄하십니다. 그리고 아이들 데려오게하여 꾸짖어 귀신을 쫓아내니 아이가 그 때로부터 나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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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산 아래에서는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패역한 이스라엘 무리가 있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제 변화산에서 내려온 예수님 앞에는 역시나 믿음 없는 패역한 제자들로 인하여 간질에 걸려 물불 안가리고 넘어지는 아들을 치유하지 못해 한 아들이 고통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과 아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안타까워하시면서 축귀하시면서 아이를 치유하십니다.
패역이라는 말은 ‘길에서 빗나간’의미입니다. 즉 믿음이 있다가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간 주님을 따르면서 제자들에게 있었던 믿음은 주님을 바르게 알지 못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받았고(10:1) 그런 역사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자신들이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과 달라지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인지 믿음이 없어지고, 자꾸만 빗나가는 것을 쫓아가는 상태로 전락해 졌습니다. 자연 그들에게 주어진 권세가 약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광야의 패역한 세대를 연상하게 됩니다(신 32:20).
예수님은 간질에 걸린 아이를 치료하시는데 먼저 귀신을 쫓아내시자 그 아이의 간질이 나았습니다. 당대 간질이 신탁을 받는 이들의 현상과 유사하여 하늘이 내린 벌이라 생각하고 다른 귀신이 역사하여 걸린 병으로 이해하던 터라 예수님은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 그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십니다. 놀랍게도 축귀한 이후에 아이가 치료됩니다. 귀신들림과 질병이 상호 연관된 케이스입니다. 그런다고 모든 질병을 귀신의 역사로 보는 것은 본문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모든 질병이 귀신의 역사임을 증명하는 본무이 아닙니다. 때로 귀신의 역사로 육신의 질병이 있는 경우도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이러한 귀신의 역사와 질병의 관계가 아니라,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인 제자들의 불신앙입니다. 어느새 오랜 시간동안 주님을 따르면서 천국복음을 비롯하여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면서 배웠을 터인데 그들의 믿음은 자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하는데, 어찌하여 제자들은 믿음의 근본이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따라 다니며 가르침을 듣고, 역사를 체험하고,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믿음을 잃고, 패역한 세대가 되어버린 것인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곧 십자가를 지러 가기 위한 주님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근심케 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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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을 믿는 새 백성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믿음은 이제 더 성숙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일순위로 필요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과 나눔을 통해 믿는 것과 아는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고, 큰 믿음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주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라 개인의 신념을 따라 세워져 가는 것이라면 결국엔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빗나간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있는 것마저 잃게 되는 결과로 귀결됩니다. 주님이 함께하시고 주님이 도우시고 주님이 이끄시며 믿음 주심을 바라고 오늘도 날마다 주님을 만나고 듣고 알아가고 살아내는 과정이라야 우리의 믿음의 자라고 믿음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 19-23절 믿음 없는 세대들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고통 당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나아와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답하십니다. 만일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으며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갈릴리에서 주님은 다시금 제자들에게 인자가 장차 사람들에게 넘겨져 죽임 당하고 부활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매우 근심(슬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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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무능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일만큼 자라는 천국의 능력이 있을진데, 제자들은 그런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전에 받은 축귀의 권세를 경허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과 더불어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행보를 보면서 이들은 믿음을 잃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믿음은 능치 못함이 없을진대 이들이 그런 작은 믿음마저 갖고 있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면서도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그리고 믿음이 자라가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따르는 것이 부족한 상태로 여기까지 온 것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다시한번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에 대해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심히 근심 곧 슬퍼했다고 말합니다. 근심은 본문에서는 슬픔에 더 가깝습니다. 제자들의 기대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벗어난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자신들이 믿고 싶은 주님이 점점 자신들의 믿음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에 이들은 하나님의 믿음에서 거리가 점점 멀어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마저도 없이, 그 믿음의 방향이 변질되고 왜곡되고 빗나가면서 점점 그 믿음의 능력을 잃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들을 책망하시면서도 계속 예루살렘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이 작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마침내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우리의 엇나간 믿음 없음의 죄를 대속하시고 참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역사를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없는 우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신 것은 우리로 믿는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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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양(量)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가장 작은 믿음에 대해서까지도 열려 있는데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한 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길 바라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임을 안다면, 이제 우리 믿음이 자라는 주님을 바라고 듣는 그 자리에 나아가는 일을 결코 멈추거나 쉬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의 말씀을 통해 우리 주님을 만나고 알아가고 소통하는 과정 속에서 더 든든히 채워지고 자라고 성장할 수 있음을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 24-27절 믿음 없는 세대들을 위해 주님은 아들의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성전세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베드로의 생각을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일반 세금의 원리를 통해서 임금은 아들은 면제하고 타인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예로 들어서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하지만 믿음 없는 세대의 실족함을 막기 위해서 베드로를 바다로 보내 고기 입 속에 있는 한 세겔을 얻어 예수님과 베드로를 위해 성전세를 내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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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0:13-16에서 성전세는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들로 노예나 자유를 얻은 종이나 거지라도 신분고하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모두다 반드시 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전 기구의 유지 보수에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징수하는 집행관은 큰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심지어 재산 몰수와 강제집행의 권한도 있었습니다. 또한 일년에 한차례 성전세를 걷기 위해서 유월절 한 달 전 즈음에 전지역에 징수하는 곳을 세우고 징수원을 보내 반 세겔(두 드라크마)을 내도록 독려합니다. 로마지배하에서 이 성전세는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주후 70년 이후에는 로마의 쥬피터 신전을 위한 세금으로 바뀌면서 민족적 수치로 작용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전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래서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12:6).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없는 세대가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성전세를 내고 계십니다. 이제 예루살렘을 올라가는 여정에서 주님은 불필요한 논쟁거리가 될 요소들을 최소화 하시기 위해서 또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마땅한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하십니다.
성전세와 연관된 본문은 결국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고, 더불어 예수님께서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권리를 희생하신 분이시고, 이 일을 위해서 베드로를 통해 또 놀라운 기적을 경험케 하여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바다에서 낚시해온 물고기의 입에 세겔을 얻게 한 사건) 진행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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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는 고난을 당하시고, 아들은 영광을 얻으시는 패턴이 계속 반복됩니다. 믿음 없는 세대 곧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를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여정이 십자가의 길이고, 사명입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은 믿음없는 제자들을 계속 가르치시고 직접 믿음을 갖도록 일하시고, 자신의 권리를 희생하시면서까지 믿는 백성으로 세워가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안타까워하시면도 버리지 않으시고 택하신 이들을 끝까지 세워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는 그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 기도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 믿음이 또한 빗나가고 있는 것을
바로 발견할 수 있는 분별력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우리 믿음의 주께서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고
우리를 빗나간 죄에서 돌이켜서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는
그 믿음이 날마다 자라 든든하게 서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믿음의 능치 못함이 없음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믿음 없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여정을 감내하신
주님의 은혜를 따라서
이제 우리가 믿는 자가 되었음을 감사하며
날마다 믿음에 믿음을 더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그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기꺼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희생하신
그 놀라우신 사랑을 기억하고서
우리를 위해 대속제물 되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