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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Mar 19. 2019

마태복음 18:01-10 천국에서 큰 자와 작은 자

마태복음 18:01-10

마태복음 18:01-10 천국에서 큰 자와 작은 자


제자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라고 답하시면서 그런 이를 영접하는 것과 실족하게 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십니다. (17장은 예수님의 정체성, 18장은 천국 공동체의 삶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 1-4절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입니다. 

천국의 자녀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이후에 제자들은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가 비중이 있는 자인가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

천국에서 큰 자라는 표현은 물리적인 크기 보다는 의미적으로 중요하고 비중이 있다는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제자들의 정치적인 기대가 들어 있는 질문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면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정치적인 독립과 더불어 새로운 왕국이 건설되고 그곳에서 개국공신처럼 제자들은 한 자리씩 차지할 것이라고 들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불러 세웁니다. 당대 어린아이는 순진 무구함의 대명사보다는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소외된 이들의 대명사나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스스로 설 수 없는 의존적 존재의 의미가 큽니다. 결국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들을 높이거나 교만한 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이들 곧 절대의존과 자기부인이 되는 이들이 결국 천국에서 비중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더 나아가 아이들의 특징이 자기들이 본 것을 가감없이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대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해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가감 없이 전파합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본 것들을 가감없이 전파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제자들은 그런 용기와 사명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이것 저것을 계산하고 오해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

우리는 자주 우리의 한계를 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여정 속에서도 불쑥 불쑥 지나온 업적을 과시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망각하고 마치 우리의 힘으로 된 것으로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기대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칫 그런 대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심하거나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임직자 선거 후에 시험에 드는 성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들에게 망각된 것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공동체를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들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까지 경고하십니다. 천국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며 따르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기억한다면, 또한 우리가 천국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우리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알면 알 수록 겸손히 임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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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철 님의 <기다림은 희망입니다>의 책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것”

다른 교회의 교인수나 예배당 크기에 주녹들지 마십시오

그런 교회에 속한 교우들도 그것들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숫자가 많다고 해서 큰 교회는 아닙니다.

교인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을 작게 여기면 별 볼 일 없는 교회입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부유한 교회는 아닙니다.

철저히 나눔을 실천하지 않으면 작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화려함에만 치중하면 하찮은 교회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믿음이 성장하여 

영적 거장들이 늘어날 때 진정한 대형교회가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의 믿음이 크다면

그 교회는 이미 자랑스러운 교회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크게 여기느냐에 달렸습니다


# 5-7절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나 실족케 하는 일은 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이런 어린아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그런 어린 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심각한 화를 자초하는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

천국 공동체의 구성원에는 섬겨야 할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돕고 위로하며 격려하며 함께 세워져 가는 공동체입니다. 마치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다녀온 이후에 다시금 정리, 정돈, 유지하는 일을 통해서 공동체를 정비할 때처럼 서로 돌봄과 더불어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에 대해 소홀함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공동체는 서로 세워가야 제대로 설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지체 가운데에는 어린 아이처럼 누군가 돕지 않으면 스스로 설 수 없는 연약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잘 돌보고 양육하며 세워가는 것이 결국 주님의 몸된 공동체를 온전히 세워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는데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미 앞서 주님은 유대 지도자들을 향하여서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어린 아이들은 스스로 설 수 없고,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들을 말하는데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돌보고 세워가야 할 이들이 오히려 이들을 실족하게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은 결국 함께 망하게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경멸과 무시하는 것 이상으로 양육의 과정에서도 오랜 인내와 섬김이 필요한 것인데 이는 바른 신앙과 신학에 기인한 인도여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마음과 신앙에 기인한 것이라면 심각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

우리 주위에 연약한 이들을 붙이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기회이면서 축복의 통로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런 연약한 이들을 바라보면서 불평하거나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일은 책임과 사명을 외면하는 일이며 사랑할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잘못된 자세로 연약한 이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은 심각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주님을 반역하고 외면하고 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결국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는 것이기에 결국 천국의 공동체에 합당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연약한 이들을 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만큼은 아니어도 적어도 우리에게 붙여주신 지체를 겸손히 섬겨서 주님 앞에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런 이들만 보내 주시는 것이냐고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주님을 거역하기 보다는 그런 이들을 통해서 사랑할 기회과 성숙 그리고 천국 공동체를 든든히 세워가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자 되길 원합니다. 


# 8-10절 우리로 범죄케 하는 것들에 대해 단호하고, 작은 자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만일 손과 발과 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심지어 그러한 것들을 찍고 빼어 버리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모든 것을 가지고 영원한 불(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시한번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

우리의 손과 발은 우리가 행하는 일들과 서야 할 자리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섬김과 직분 또는 책임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하는 과정에서 결국 주님의 뜻을 거역하게 되는 일이 있고, 무엇보다 연약한 이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차라리 그러한 이들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일을 하다가 사람을 잃는 경우들이 이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우리 눈이 자꾸만 연약한 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수용하지 못하고 비교하고 시기하고 불평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또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정작 바라봐야 할 것들은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하는 일들, 연약한 이들을 실족하게 하는 이들 모두 사소한 것 같지만 방치한다면  공동체를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하고 이는 결국 구성원들과 개개인까지 망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 더 드는 데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오는 천사가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수호천사의 개념으로 보입니다. 히브리서(1:14)에서는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은 상속자들을 위해 섬기라고 보냄 받은 것이라 설명합니다. 이로서 당시에는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천사가 있는 것으로 사고했는데 여기서는 결국 소외된 이들의 수호천사들이 그들의 아픔을 하나님께 직접 직고하기에 이들을 잘 배려해야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이 본문을 근거로 수호천사에 대한 개념들을 너무 확대 해석해 가는 일은 본문의 의도를 벗어나 비본질 적인 것으로 인하여 중요한 강조점들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자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분명히 알고 계신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의 삶의 여정이 늘 하나님의 면전에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

공동체 속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감당하면서 함께 살아가다 보면 많은 일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떤 성과보다도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어그러지거나 실족하게 되는 경우들 그래서 시험에 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을 잘 돌보고 또한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을 사랑으로 권면하고 치유하고 바로잡아 가는 일들이 참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인내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방치하거나 외면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때로는 단호함도 필요하고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이른 잘 분별하는 지혜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바울서신의 수많은 교회를 향한 권면에는 이렇게 실족하게 하는 이들을 어떻게 치리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워 갈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많습니다. 바른 가르침, 사랑의 돌봄, 오래 참음, 그리고 공정한 치리들을 지혜롭게 처신하도록 언급합니다. 단호함도 있어야하고, 지혜도 있어야 하며, 오래 참는 사랑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그런 연약한 우리들을 오래 참으시면서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으로 돌봐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죄를 향하여서는 단호하고 연약한 이들의 죄에 대해서는 오랜 사랑과 돌봄을 통해 온전한 길로 행하도록 하는 자세가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늘 하나님의 면전에(코람데오) 살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언행심사를 공동체안의 연약한 이들을 세워가는 데에 분별과 지혜 그리고 사랑으로 행할 수 있길 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연약한 우리를 택하시고 돌보시며

천국백성 삼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붙여주신 연약한 지체들을 향하여

불평하고 외면하고 소홀했던 일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나누고 섬기며 

사랑해야 하는 일을 외면하지 않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축복의 통로로서의 일

곧 사랑할 때라는 것을 기억하며 실행케 하옵소서. 

지금 나의 언행심사로 

연약한 이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단호하게 멈추고 버릴 수 있는 분별력과 결단도 

실행하게 하옵소서. 

나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을 향하여서는 너그럽게 행하면서

더욱 연약한 이들을 향하여서는

오래 참는 사랑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매일의 삶이 주님의 면전에 있음을 기억하여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지켜 보고 계심을

축복으로 알고 신실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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