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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Apr 19. 2019

마태복음 27:45-56 십자가와 부활의 길 8 : 기

마태복음 27:45-56

마태복음 27:45-56 십자가와 부활의 길 8 : 기적(奇跡)없는 이변(異變)


예수님께서 제구시 즈음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마침내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본 사람들의 불신적인 행동을 기록합니다. 이어서 성전과 백부장 그리고 여인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언급됩니다. 


# 마태는 십자가 형벌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그 의미를 구약의 성취와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서술합니다. 이제 그 성취된 그 의미를 오늘 우리는 되새겨 보면서 오늘 나와 우리에게 이 십자가가 전해 주는 의미를 깨닫고 누리며, 더불어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이뤄가시는 역사를 바라보고 더불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 45-50절 순종을 위한 기도와 불신을 의한 행동 사이에서

제육시(정오)로부터 어둠이 임하고 제구시까지 계속됩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 엘리야를 부른다하고, 신 포도주를 마시게하고, 조롱하며 엘리야가 구원하나 보자 합니다. 결국 기적 없이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지르시고 죽으십니다. 

*

어두움은 유대인들에서 애통과 슬픔을 상징하기도 하고 심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세 시간 가량의 어두움은 주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이들에게는 슬픔과 애통의 시간이었고,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시간이었음을 상징한 것입니다. 

오전 9시가량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세 시간 가량 조롱당하시고 이제 어둠이 시작된 후에 또 세 시간 동안 주님의 십자가 고통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 상세한 언급이 없이 그 앞에 선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더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반응을 통해 이미 예언된 구약의 말씀들이 성취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의미의 부르짖음을 마태는 언급합니다. 이 잔을 마시지 않기 위해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부르짖음이기 보다는 이 잔을 마실 수 있기 위한 부르짖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나의 하나님’으로 여전히 고백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나의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 잔을 마실 수 있길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 모든 고통의 시간들이 다하였을 때에 마지막으로 소리 지르시고 운명하십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주로 이들은 유대인들로 보입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엘리야를 부른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고통중에 있는 이들은 엘리야가 도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지금 예수님께서 그렇게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표현으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분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중의 한 사람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합니다. 마취의 효과인지 아니면 좀 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행동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예수님의 고통을 연장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결국 이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고 이러한 십자가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는 부류로 볼 수 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가만 구라고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라고 말합니다. 정말로 종말에 올 엘리야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어가면서 처절하게 죽어가는 주님을 보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메시아일리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주님을 바로 알아가려 한 것이 아니라 이들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최후까지 애써 그것을 부인하려하고 혹여 있을 기적에 대해서 대비하며 한 발만 담구고 언제든지 불신앙에 대한 반을 빼려고 하는 자세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세 부류의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하십니다. 다른 성경에서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등의 말씀들을 비롯한 십자가상의 7언등이 있는데 마태는 한 마디 기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역사성의 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사건이 갖는 신학적 의미들에 더 집중하고 그런 예수님 앞에 있었던 이들의 반응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믿어야 하는지 반면교사 삼도록 한 것입니다. 

*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의 십자가, 아버지와의 단절을 경험해야 했을 십자가의 죽음, 이 모든 잔을 끝까지 마시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주님의 그 순종이 온 인류를 비롯하여 여기 예정과 선택을 통해 새이스라엘이요 교회된 우리들이 천국의 백성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회복하고 온전케 하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 좋고 포기하고 내어놓고 죽으심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는 기적이 없었습니다. 제물로 드려져서 여느 십자가 처형과 마찬가지로 고통가운데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내려오는 일도, 그리고 고통이 경감되는 일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기적도 없습니다. 고스란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주님과 다른 것은 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님의 성령을 통해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잔을 끝까지 감당하시기 위해서 나의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고 주님께 부르짖으며 도우심을 구할 때에 마침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이 십자가의 여정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 십자가가 면제되진 않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이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물론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의 여정 매 순간이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리의 일상은 세상과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더 가중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와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배우라 하십니다. 내게 주어진 이 십자가를 피하고 외면하고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감당해 나아갈지 주님과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며 나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이러한 우리네 삶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결코 곱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비난하고 조롱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나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통해서 받는 것이라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 제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상이 우리를 불편해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심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감당하고 살아가는 여정이 십자가의 좁은 길이 아닌 시류에 영합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 죄와 사망의 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51-56절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성전과 백부장과 여인들의 반응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집니다. 그리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면서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이들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두꺼운 휘장이 찢어진 일은 많은 의미를 담습니다. 우선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차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외에 누구든 그곳에 들어가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휘장으로 지성소 앞을 가려 두었습니다. 마치 에덴에 타락한 인간이 들어갈 수 없도록 화염검을 둘러 놓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막힌 담이 허물어진 져서 이제는 누구든지 지성소 곧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인된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으로 이 일은 성전에 대한 심판(24장)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예시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결국 심판받은 이 성전이 AD 70년에 파괴되었습니다.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는 표현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새롭고 산 길로 말미암아 사망의 종노릇 하던 이들이 이제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일인지 해석이 분분합니다. 이어서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는 표현은 이 사건이 부활 후에 일어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역사적으로 실제 무덤이 열리는 형태로 이해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대속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망아래 있는 이간이 이제는 새 생명을 얻어서 거룩한 성 곧 하나님나라의 새백성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며, 이 일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 많은 이들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만일 이 사건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이 부활 이전에 먼저 부활한 사람들이 있고, 또 그렇게 부활한 이들이 영원히 살아야 하는데 이러한 부분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난제로 남습니다. 마태는 이 기록을 통해서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갖는 의미를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므로 말미암아 새롭게 열린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은 일어난 모든 일들을 보고서 심히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누구보다 유대인들이 알았어야하고 고백했어야 될 말을 이방인이 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처럼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고백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에서도 항상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은 늘 유대인보다 이방인들이 먼저였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그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도 이방인 여인 라합이 그랬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기간에도 소외된 이들이 먼저 주님을 고백하고, 그리고 사도행전의 역사 가운데서도 유대인은 바울의 선교를 방해하지만 늘 이방인들이 먼저 주님을 영접하고 선교에 동참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성경과 하나님을 잘 알고 믿고 있다고 하는 우리들이 정작 주님을 제대로 알고 고백하고 믿고 따르며 열매맺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봐야 할 말씀입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입니다. 이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다른 제자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호언장담하면서 목숨을 잃을 지언정 주님을 따르겠다던 제자들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하지만 묵묵히 주님을 따르며 섬겼던 소외된 여인들이 여전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이후에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도 이 여인들이었습니다. 당대에 증인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여인들을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증인으로 오히려 언급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

주님이 열어 두신 새롭고 산 길로 오늘 우리는 언제든지 지성소의 주님을 뵙습니다. 사망가운데 살아가던 우리를 살리사 영생을 허락하셔서 천국백성으로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함께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주님의 핏값으로 산 보배로운 소유로, 사망 가운데 세상의 시류를 따르지 않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축복의 통로가 되게할 제사장 나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이루신 이 놀라운 은혜를 기억합니다. 주님이 먼저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백부장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그리고 묵묵히 주님을 바라보며 증인된 여인들이 갔던 그 길로 우리도 따르길 원합니다. 언행심사가 일치된 믿음으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고백하고, 따르는 신자 되길 원합니다. 


# 기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단절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십자가를 지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롭고 산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적 없는 십자가 여정에서

주님이 부재한다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살아가지 않게 하옵소서. 

기적 없는 삶의 자리에 변함없이

동행하고 먼저 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주님이 열어 두신 그 생명의 길을 따라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 여정을 누려가게 하옵소서. 

진실로 메시아 주님을 고백하면서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끝까지 이 길을 따르게 하옵소서. 

주님의 성령의 지혜와 능력의 

도우심과 충만함을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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