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57-66
마태복음 27:57-66 십자가와 부활의 길 9 : 무덤을 지킨 사람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저물었을 때에 아라마대의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자신의 새 무덤에 장사한 후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둡니다. 두 여인은 이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습니다. 이튿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에게 경비병을 요청하여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합니다. 이는 제자들이 거짓 증언할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마 27:57~28:20의 구조(R.T. 프랜스)
27:57-61 예수님의 죽음 및 장사
27:62-66 경비병이 지킴
28:1-10 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
28:11-15 경비병의 보고
28:16-20 살아계신 주권자 예수님
# 57-60절 예수님의 무덤을 만든 사람 :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
저물었을 때 아비마대의 부자이며 예수님의 제자라 하는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합니다.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여 요셉이 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자신이 판 바위속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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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 때 등장한 요셉이라는 이름이 장사할 때에도 등장합니다. 요셉이라는 이름이 흔해서도 그렇겠지만 이름의 뜻이 ‘그(여호와)가 더하신다’(창 30:24)는 뜻으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요셉이나, 아리마대 요셉에게 용기와 믿음을 더하셔서 어려운 결단을 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혼한 여인 마리아의 잉태에도 불구하고 모든 명예와 지위와 권위를 잃을수 있는 상황에서 마리아를 데려오고 메시아 탄생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하는 일을 단행한 요셉이라는 인물도 동일한 위험의 요소들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와 결단을 통해 예수님을 자신의 무덤에 장사 지내게 됩니다.
요셉은 지금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그리고 부자요, 예수님의 제자로도 소개됩니다. 앞서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음해하려 한 일에 반대한 사람입니다(눅 23:51; 막 15:43). 본문에서는 부자요 제자라고 소개합니다. 마태는 요셉이라는 인물의 권위를 이용하여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증인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저주받은 자의 시신을 장례한다는 것은 그것도 유대인들에게는 성전과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그리고 로마에게는 반역죄의 죄목으로 죽게 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다고 하는 것은 결국 같은 무리로 오해받을 수 있기에, 지금까지 쌓아온 공회원으로서의 부와 명예를 다 잃을 수 있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은 부자로 소개하고 제자로 소개하면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빌라도가 내어줍니다. 아무리 지역 유지라 하더라도 신성모독과 반란의 죄목으로 죽은 이에 대한 시신마저도 쉽게 내어 줄 수 없는 엄혹한 때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모든 것을 감수하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빌라도가 내어 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내어 준 것으로 보이지만 요셉의 용기있는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신의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문에 놓고 갑니다. 마태는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상세하게 예수님을 장사하는 내용을 요약해서 기록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도 분명한 증인을 세우고 싶은 것이고, 더군다나 이 때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게 믿게 하기 위해 이렇게 기본적인 부분들을 상세하게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깨끗한 세마포는 처음 쓰는 것으로 보이고, 새 무덤이라 했으니 예수님께서 지금 부자의 새 무덤에 처음으로 장사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태가 줄곧 메시아 곧 왕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계속 증언해 왔고 이제 마지막 장례도 왕으로서의 장례의 요소들을 부자, 공회원, 제자등의 표현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편 ‘저물었을 때’라는 표현은 아직 안식일이 되기 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고 저녁 6시가 되기 전 약 3시간 가량 이런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법에 따르면 나무에 달려 저주 받은 자의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신 21:22-23). 율법은 해가 지기 전에 매장을 명령하는데, 처형당한 범죄자의 시체도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참조. 신 21:22-23). 결국 예수님의 장례가 안식일 전에 진행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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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쌓은 모든 것을 잃을 것을 염려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팔았고,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제자들은 주님 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더 소중한 것 곧 하나님나라를 추구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모든 것을 잃더라도 주님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그는 메시아 예수님을 장사지내준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도 좋을 만큼, 그러한 것들을 감수하고서라도 결행할만한 가치를 하나님나라에 둘 수 있는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아서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귀한 것은 설령 지금까지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믿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무런 기적도 없는 상태, 곧 저물어 어두워지는 날처럼 모든 기대가 무너진 것 같은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잃어버릴 것을 감수하고 결행한 데 있습니다. 믿음은 끝까지 믿고 또 믿는 대로 행동하고 그리고 그 이후의 결과까지도 감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믿음 더욱 굳세게 우리게 있도록 천국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길 원합니다.
# 61절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앉은 사람들 :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하는 곳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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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에서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던 여인들이(55-56절) 이제 예수님의 장사 현장에도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마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확실한 죽음에 대한 중인으로 그리고 이후에 부활의 동일한 증인으로 세워집니다.
결국 이 여인들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하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앞서 요셉과 더불어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버리고 떠난 저주받은 십자가에서 기적없이 죽으신 예수님을 이 여인들은 끝까지 바라보고 있고, 이제 마지막 장사된 무덤의 돌문이 닫히는 것까지 보고 그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끝까지 어떤 기적을 바란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인지, 다른 목적이 있어서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안식일 이후에 장례 부분을 보완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는 부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이유 보다도 하루동안 긴박하게 진행된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그 어떤 이해와 해석도 감당하기 어려운 망연자실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하여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믿을 수 없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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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는 얻게 되는 부산물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인한 헌신과 결단의 모습들은 성경에 대부분 소외된 여성들에게서 먼저 보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포기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녀를 향하여서도 기대에 못미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갑작스럽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 같고, 그런 주님을 향하여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 있는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의 원대로 응답되거나 일이 진행될 때는 주님을 향하여 있지만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 버리고 떠나는 모습이 어쩌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알량한 믿음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신실하신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의 약속을 기대하며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굳게 닫힌 돌문만 보이고 그 안에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주님이 부재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여전히 신뢰하며 기다릴 수 있는 믿음 갖기 원합니다.
# 62-66절 예수님의 무덤을 인봉하고 지킨 사람들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경비병
다음날 곧 안식일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예수님께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 속이던 자라는 것을 기억하며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시체를 도둑질 하여 부활했다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를 허락하여 경비병을 보내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합니다. 이에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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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은 끝까지 율법을 어깁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아직도 여전히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메시아 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도 그것을 막고 가리기 위함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니라 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더군다나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계속 이 말이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믿지 않았기에 결국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도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될까 싶어 두려워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가리려고 합니다. 심지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 하여 백성들에게 부활했다 선동할 것에 대해서도 우려합니다. 이러한 우려에 대한 마태의 기록은 마태복음을 기록한 시기를 고려해 보면 이미 3-40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여러가지 의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거나, 그의 시신을 도둑맞았다거나 하는 등의 의심이 제기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아리마데 요셉의 장사와 여인들의 증언 그리고 여기 종교지도자들의 대화등은 모두 이러한 의심에 대한 담변 증거들의 형태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빌라도로서는 이러한 제안이 별로 달갑지 않았지만 본문은 종교지도자들의 제안에 대해 경비병을 허락하고 힘대로 굳게 지키라 명합니다. 그리고 인봉하기까지 하면서 무덤을 굳게 지키라는 말이 몇번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무덤을 경비병이 인봉하면서까지 굳게 지켰다고 강조되면 강조될 수록 앞선 의심 곧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고 하는 의심을 종식하고 또 시체를 훔쳐서 거짓으로 부활을 선동한다고 하는 의심이 불가능하다는 증거들로 제시되어서 예수님의 부활이 오히려 더 분명해 지는 역설적인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장사 되었다가 인봉된 무덤의 굳게 닫힌 돌문 앞에 경비병들이 밤새 힘대로 지킨 그곳에서 분명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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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자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의 죽음과 무덤앞에 있던 이들의 모습 속에서 부활의 증인들이 됨과 동시에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같은 사건, 같은 장소, 같은 무덤을 바라보는 자들의 자세에 따라서 십자가에 대한 반응과 그 결과는 너무도 달라집니다.
아무리 무덤을 막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부인하고 또한 그 사실을 왜곡한다 하더라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고 소생하는 생명의 발아를 통해 굳은 땅을 열고 올라오는 새순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그리고 얼어붙은 동토와 같은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주님이 허락하시고 심어주신 생명의 부활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혹독한 현실과 믿을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도 우리 주님은 생명을 살리실 수 있음을 믿고 이 어둠의 현실을 인내로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무덤같은 현실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아침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립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통해 기꺼이 십자가의 잔을 마시게 하시고
이를 통해 이루실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 구원을 통해 하나님나라 세워가실
주님의 뜻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붙잡아야 할 가치가
우리 주님께 있음을 알고 순종한
아리마대 요셉에게 허락하신 그
용기 있는 믿음을 제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천국의 보화의 가치를 발견케 하옵소서.
망연자실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던
그 여인들의 포기하지 않는 믿음도 주옵소서.
암울한 현실과 굳게 닫힌 돌문
그리고 인봉된 무덤처럼 도무지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주님은 능히 생명의 발아
곧 부활의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음으로 기대하며 인내할 수 있는 믿음도 주옵소서.
기대할 수 없는 무덤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
믿음을 잃지 않을만큼
포기하지 않을 만큼
소망을 버리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허락하시되
곧 주님의 회복케 하심과 부활의 능력으로
더 성숙한 믿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