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08:01-18
에스겔 08:01-18 이스라엘이 행한 가증한 일들
그발 강 가의 환상 이후 14개월만에(주전 592년 9월경) 유다 장로들이 보는 가운데 에스겔은 공개적인 환상을 경험합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바벨론에 있는 에스겔을 환상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이끌어가서 북문의 우상 숭배, 뜰문에서의 칠십인 장로들의 우상숭배, 여인들의 담무스 숭배, 제사장들의 태양신 숭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들이 행한 가증한 일에 대해 진노하시며 긍휼을 거두시고 더이상 듣지 않겠노라 말씀하십니다.
# 1-6절 우상숭배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내쫓는 행위입니다.
에스겔의 집에 유다 장로들이 함께 했을 때에 여호와의 권능이 임하여 에스겔을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고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북향한 문에 있는 질투를 일으키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 제단 문 어귀에 질투의 우상이 있으므로 그들의 가증한 행위는 결국 야웨를 성소에서 떠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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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에스겔의 위치가 어느정도인지는 알수 없지만 포로된 상황에서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과 함께 있습니다. 이전에 행한 예언 퍼포먼스등에 대한 반응인지 알 수 없으나 현재로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소식이 궁금했고 포로된 땅에 임한 야훼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에스겔은 여호와의 권능이 임하여 진행된 환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 같은 형상, 불같은 모양과 광채는 이미 그발강 가의 환상과 이어집니다(1:17). 주의 영이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도 오셨고 예루살렘에도 계십니다.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성전과 연결되어 그곳에 계실 뿐 부정한 이방땅에 오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에스겔의 환상은 성전신학에 갖힌 이들의 생각을 깨는 사건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환상가운데 경험하지만(4절), 정작 야웨의 영광이 가득해야 할 자리에 질투의 우상(율법이 엄격히 금하는 제의적 형상들로 보입니다)을 세우는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야웨께서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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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된 땅에 모인 유다의 장로들, 그곳에 임한 여호와의 권능의 불과 광채,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이끄심, 북향한 문에 서 있는 질투의 우상, 야웨께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결과의 초래와 더불어 더욱 가증한 일이 있다는 선언으로 이어지는 본 단락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내쫓고 거절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 아닌 것을 세워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지만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다만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고, 외면하고, 거역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고 내쫓고 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다, 계시지 않는다합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연합할 수 없고,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조화될 수 없으며(고후 6:15,16),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마 6:24). 우리 삶에 우선순위를 두고서, 온전히 의지하며 신앙하고 예배할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의 욕망의 화신으로 세운 질투의 우상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 7-16절 우상숭배는 가증한 일이며 하나님을 등지는 행위입니다.
주의 영이 에스겔을 이끌고 간 뜰 문 안 은밀한 곳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칠십 명이 가증하고 악한 일 곧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을 벽에 그리고 그 앞에서 향연을 피우고(분향) 있습니다. 사반(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적극 참여한 가문)의 아들 야아사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돌보지 않고 버리셨기 때문에 다른 신에게 갔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북문에서는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고 있고, 성전 안 뜰에서는 제사장들 약 스물 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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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은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이들입니다. 결국 이들 지도자들의 타락과 우상숭배는 이스라엘 전체에 이러한 우상숭배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사반의 아들도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총체적으로 이들이 타락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섬기는 것들은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들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애굽의 신들과 유사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보지도 않고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도와주셔야 할 야웨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지 않았기에 이제 자신들과 상관 없고 능력이 없는 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야웨가 아닌 애굽의 신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대 친바벨론과 친애굽간의 외교정쟁 속에서 상당수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친 바벨론이 아닌 애굽이 자신들을 도울 나라며 그 나라의 신들이 자신들을 지켜줄 신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인들은 담무스를 위해 애곡합니다. 담무스는 목자의 신으로 자연의 순환주기를 따라 식물의 성장과 죽음을 연관되어 식물들이 죽은 기간 그의 소생을 기원하며 애도하는 것을 통해서 풍요를 기원했습니다. 결국 여인들의 가증한 행위는 이스라엘의 부요 내지 생산(풍요와 자식생산)이 야웨가 아니라 담무스의 손 달려 있다고 믿고 야웨가 아닌 담무스에게 예배한 것입니다.
성전 안뜰 성전 문(현관)과 제단 사이에 있는 약 스물다섯 명의 사람들은 제사장들로 보입니다. 이들은 성전 안뜰에 있으면서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고 있습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제사장들이 누구보다 야웨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바르게 지도하고 선도해야 할 제사장들이 노골적으로 성전을 등지고 그 낯을 여호와가 아닌 동쪽 태양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야웨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우상숭배를 야웨의 탓으로 돌리는 가증한 일을 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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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고서도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발생한 절망적 현실과 맞닥드렸을 때 다시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뜻과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은밀한 곳에서부터 공개적인 곳까지 노골적으로 하나님 아닌 다른 현실적 대안들을 모색하고 하나님께서 더이상 도우시지 않고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죄악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행위들은 가증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생사화복은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고, 부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며 그것들이 자신들을 살릴 것이라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중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헛된 것들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길흉을 점치는 일들 모두 이와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이들을 선도해야 할 제사장들도 헛된 우상을 향하여 예배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과 신학과 신념을 갖는 종교지도자는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망이 투여된 하나님 아닌 욕망의 화신, 질투의 우상, 헛된 우상, 가증한 우상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일반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성전 안뜰에서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행하는 이들의 모습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은밀한 죄악 곧 돈과 권력과 명예를 탐하며 살아가는 죄악에 대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 17-18절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진노케 하며 긍휼을 거두게 하는 행위입니다.
이제 에스겔에게 일반 사람들과 장로들과 여인들과 제사장들의 가증한 우상숭배의 모습들을 보았으니 어찌 적다 하겠는가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거룩한 땅을 폭행으로 채우고 또 다시 야웨의 노여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듣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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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람들이 북향한 문에서 우상숭배하고 일반 사람뿐 아니라 유다의 정치나 사회에 있어서 기둥적인 역할을 해야할 장로들이 애굽의 신에게 분향합니다. 예루 살렘의 보호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야훼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담무스 곧 풍요신에게 빠져 있습니다.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어야 할 이들 곧 야훼 신앙을 지켜야할 제사장이 야웨의 전에서 야웨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야웨를 등지고 태양신을 섬기고 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거룩한 성전에 가득한 우상숭배가 얼마나 총체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질투의 우상은 야웨를 진노케 합니다. 우상은 결국 욕망의 화신이기에 이러한 것들이 만연될 수록 사람들은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이웃의 것을 약탈하고 착취와 폭력을 행하게 됩니다. 힘없는 이들, 보호받아야 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은 이 폭력 앞에 고스란히 노출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들에 대한 멸시는 결국 하나님께서 가장 실어하는 공의와 정의가 무너져 버린 모습이기에 분노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불쌍히 여겨야 할 이들 곧 소외된 이들을 향하여 긍휼을 베풀고 있지 않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노하시며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약자들의 고통에 자비를 베풀지 않고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짖을 지라도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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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숭배와 종교적 부패의 초래한 것은 결국 윤리적으로 타락하고 사회적으로 부패한 모습으로 폭행으로 드러납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서 더 폭력적으로 약자들을 정죄하고 폭행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우리 현대사의 기독교 흑역사에는 이와 같은 모습들이 많습니다. 친일파들이 그랬고, 해방 이후 제주 4.3사건때도 그랬고, 한국 전쟁 상황과 이후에도 그랬으며, 독재정권 하에서도 그랬고, 부패한 정권하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사회적 약자들을 향하여 정죄하는 일이 백주대낮에 버젓이 자행되고 있으며, 세상의 지탄을 받으며 자정능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이미 드러난 부정 부패한 모습들을 애써 가리면서 아니라고 말하는 모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사건들의 선봉과 한복판에 서 있던 자들이 상당수 기독교인들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지금도 우리 시대에 폭력적인 언행으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고 정치적 입지를 굳혀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이들이 보입니다. 지도자이건 아니건 총체적으로 그런 모습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타락한 세상을 선도하기 전에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가증한 일들, 질투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탐욕의 수단으로 삼고도 신앙인이라고 자칭하고 자위하면서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하는 모습들이 결코 우리와 멀지 않음을 안다면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부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거두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시면 더이상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 공동체가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모습에서 멀어져 있음을 진단, 직시 한다면 그래서 아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때에 돌이키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오늘 돌이켜야 합니다.
# 거둠의 기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속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계시하시고 인도하시며
함께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의 말씀에 귀기울이게 하시고
우리로 주께서 허락하신 말씀으로
주님과 소통하며 주의 뜻으로 채우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주의 영으로 충만케 하시니 또한 감사합니다.
우리의 논이 우리 가운데 있는 헛된 우상의 요소들을
바로 직시하게 하시고
은밀한 중에 행하는 가증한 일들을 드러내고
오래전에 버렸어야 했던 헛된 것들을
다시 의지하는 어리석음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않으시고 돌보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듣지 않고 거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변명과 합리화와 거절의 명분들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부정할 것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의 부요와 생사화복이 오직 주께 있음을 믿으며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주의 허락하심 가운데 있음을
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의뢰하며 자족하며 살게 하옵소서.
가장 거룩한 백성이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낯이 항상 주를 향하게 하옵소서.
혹여 우리의 언행심사에
주님을 가증하게 여기며 분노케 하는 일들이 있거든
이 모든 죄악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갖게해 주옵소서.
주께서 들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며 오래참으심을 기억하여
나와 우리 그리고 공동체의 총체적인 죄악에
내가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며
날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고
주의 말씀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날마다 거듭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