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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고향

쉴만한 물가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20141108 _ 가을의 고향


여느 때보다 일찍 서둘렀습니다. 오늘은 아이들도 다 챙겨가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젯밤 오래간만에 엄마 곁에 잠을 자던 중3 큰 딸은 엄마가 깨워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요지부동이고, 아빠가 챙기며 깨워도 요지부동입니다. 틀림없이 안 가려고 수를 쓰고 있는 걸 진즉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꼭 데려갈 것입니다. 중1 둘째 딸 하고 막내는 뒤적거리며 벌써 챙기고 있습니다. 고깃집에 예약시간이 다가오자 아내는 벌써 출발해서 그곳에서 기다린다 합니다. 그런 엄마에게 SOS를 보낸 딸아이가 아빠 폰이 꺼진 줄도 모르고 문자를 보냈나 봅니다. 엄마에게 허락받아 안 가겠다고. 그래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가끔은 웃어른들 찾아뵙고 인사도 드리는 거라고 그래서 그간 이 핑계 저 핑계로 못 갔지만 담주 시험이든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든, 오늘은 미루고 함께 가야 한다고 훈계와 협박(?)을 통해 기어이 큰 딸까지 태웠습니다. 흘끔 차에 오르는 딸을 보니 입에 또바리(물건을 머리에 이고 갈 때 쓰는 도구) 석 죽은 걸게 튀어나와 있습니다.


장모님이 구해 오라던 빈 박스들을 아내는 어디서 구해다 놓았는지 현관 앞에 가득 쌓아 둔 것을 차에 싣고(나중에 결국 고향 농산물 가득 이 박스에 다 담아 왔습니다), 함께 가기로 한 처제도 태우고 벌써 고기를 사고, 마트에 이것저것 간식도 챙긴 아내를 태우느라 본의 아니게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빙빙 도는 기간 내내 큰 딸은 내려 달라고 자긴 끌려 가는 거라 툴툴거렸습니다. 이모가 거들며 즐겁게 가자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뒤늦게 탄 아내는 큰 딸이 탔다고 좋아하면서도 뭔 일인고 하다 금세 분위기를 파악합니다. 이미 출발한 차에서 내릴 방도는 없고, 사온 간식도 마다하며 마지못해 먹느라고 말이 없습니다. 돌아올 때까지도 아마 툴툴거릴 거라 아예 생각했기에 아무리 투정을 부려도 부지런히 갔습니다. 일주일 내내 함께 있는 시간들이 별로 없기에 오늘은 아빠가 일부러 욕심을 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하간 그런 이유도 있고, 찬바람 불어대니 고향의 부모님들이 적적해하실 적에 아이들이라도 잠시 가서 분대를 치면서 조금이라도 위로라도 되어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있었습니다.


먼저 간 처남 가족은 장인어른과 아이들을 데리고 벌써 논 가에 있는 대봉시를 따고 있었습니다. 우르르 승합차에서 내린 우릴 보는 장인어른은 평소처럼 말씀은 없으시지만 반가운 눈빛입니다. 따 놓은 감홍시 하나를 먼저 먹고서 벌써 담아둔 박스 하나를 메고 차 있는 곳으로 왔는데 큰 딸은 아직도 차에 있습니다. 추운데 옷을 얇게 입고 온 이유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시위 중이라는 거 알고 일부러 짐을 내리는 일을 도와 달라 급하게 말했더니 부랴부랴 내려와 도와줍니다. 잘 익는 감 하나 먹으라 했더니 안 먹는 답니다. 하긴 초콜릿이나 과자에 익숙한 입맛이 이런 자연의 맛을 좋아할 리 만무하겠지요. 다시 짐을 가지러 갔습니다.


장소를 옮겨 고향집 근처에 있는 감을 따고 다 옮길 때에도 둘째와 막내는 오며 가며 일손을 돕는데 도무지 냇가 건너에 주차해 둔 차에서 내릴 생각을 안 합니다. 아마 그곳 창문을 통해서 부모님이 일하는 모습들을 보았을 터인데 풀리지 않는 억울함에 잠도 못 자고 있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감을 다 따고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갔는데 녀석은 짐 하나도 안 들고 훌쩍 들어갑니다. 밥을 차릴 때에도 뒹굴거리는 녀석에게 숟가락이라도 챙겨라 했더니 나무늘보처럼 느지렁 거리며 거들고 있습니다. 속이 터져도 참고 옆에 앉아 밥을 먹는 녀석에게 많이 먹으라 했더니 오히려 밥을 한 숟갈 자기 밥그릇에서 덜어 아빠 밥그릇에 꾹 눌러 답습니다(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더니…). 점심 후 비가 조금씩 오는 가운데 부랴부랴 고구마까지 캐고 돌아올 때에도 녀석은 계속 방에만 있었나 봅니다.


팔순이 훌쩍 넘으신 친할머니와, 칠순 중반을 넘으신 외조부가 큰 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면 한번 찾아뵙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억울한 마음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수성이 민감한 청소년기를 보내는 녀석에게 가족이 무엇인지, 그리고 떨어져 있으면서 이렇게 한 번 찾아뵙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농사지으신 것들 하나하나 얼마나 소중하게 보내주신 것인지 정말 다는 아니어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 가끔은 필요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오는 길 일부러 아이들만 친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오라 했습니다. 홀로 반기시는 할머니의 말씀에 뭔가 느끼는 게 있었던지 돌아오는 큰 딸 모습이 조금 누그러져 있습니다. 책이나 여타 그 무엇으로도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마음 한 켠에라도 담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돌아온 집에서 영화 같은 극적 반전은 없었지만 저녁을 함께 먹는 것 만으로 오늘 아이들과 함께 한 고향 여정이 감사했습니다. 풍성한 가을의 고향은 가족의 사랑을 경험케 할 수 있는 최고의 학교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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