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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02. 2021

누가복음 10:25-42 영생의 길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10:25-42  

누가복음 10:25-42 영생의 길이신 예수님


한 율법교사가 영생의 길을 묻자 예수님은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라 교훈하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것이라는 것도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 통해 교훈하십니다. 


# 25-28절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을 행하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 하십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율법에서 이미 영생의 길이 있음을 상기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는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제적으로 행하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율법교사로서 주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경도 하나님도 온전히 알았더라면 이와 같은 무례한 도전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가 아는 율법과 하나님은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메시아 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 말씀을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해석하여 만들어낸 우상과 같은 신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가 이미 알고 있는 영생의 길을 행하고 있지 못한 것을 알고 계셨기에 그가 미처 놓치고 있는 부분을 자각하도록 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당대 율법이 기록된 성경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위 그것을 읽고 가르친다고 하는 교사는 그래도 이 율법이 기록된 성경을 볼 수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이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문자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것, 그리고 그 말씀의 뜻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전제한 질문입니다. 율법교사는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율법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이해하고 해석한 대로 그것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율법 읽기는 결정적인 부분이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읽고 해석한대로 행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아는대로 해석한대로 가르친대로 행하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그 말씀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그 말씀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성경을 읽지만 영생의 길은 그 성경이 나를 읽어내도록 다시 말해서 그 성경이 나를 빚어가고 이끌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경읽기가 온전한 성경읽기, 묵상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 곧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영생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허다한 말씀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홍수 중에 마실 물이 없다 하지만 그 분별도 결국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 위에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문제되지 않습니다. 성경 읽기도 통독도 묵상도 가르침도 강좌도 세미나도 영상도 책도 참으로 많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온전함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는 것과, 믿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 곧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마음으로 말하고, 그 말씀의 통치를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이 온전한 성경읽기이면서, 말씀을 아는 것이며, 영생을 얻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길을 온전히 걸어가길 원합니다. 

*

참고로 율법의 가르침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로 말하는 것은 모든 율법이 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계명들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함께 포함된 것은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 가르치신 이유가 사람들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도 다 포함되어 있으며, 그 모두가 하나님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악한 우리로서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의 맹목성을 바로 잡아주고,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은 죄인된 우리로서는 채우려야 채울 수 없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공허함을 해소해 줍니다.  

예수님은 새로 주신 계명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을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합해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고, 목적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온전한 사람, 곧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부으시고 그 길로 온전히 행하셨습니다. 그러니 영생의 길도 사랑이고, 영생도 사랑이며, 그렇게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행하신 예수님을 보내사 그 길을 내시고 완성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영생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 길로 행하게 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합당한 길로 행하길 원합니다. 


# 29-37절 예수님은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 하십니다. 

율법교사가 이번에는 누가 자신의 이웃인지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자를 보고 피해 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가서 돌보고, 주막 주인에게 물질을 주면서 그의 치료 비용을 지불하고 부족한 것은 돌아오면 더 주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이렇게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라는 것을 율법교사로 고백하게 한 후에 예수님은 가서 이렇게 자비를 행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율법교사가 이웃이 누구인지 질문한 데에는 그가 사람들을 구별하고 차별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해야 할 이웃을 구별했고, 차별했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사랑하고, 정작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들은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먼저 되어야 했을 처지를 애써 외면하면서 율법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가르치고 있으면서 자신은 그 말씀을 잘 따르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의 앎은 삶으로 증명되지 않은 온전하지 못한 앎이었습니다. 

더불어 이웃을 사랑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도 참 많습니다. 종교적인 이유, 전통과 문화적인 이유등등 사랑해야 할 일보다 그렇지 않을 이유와 회피하고 외면할 방법도 많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들이 성전에서 봉사해야 할 상황에서 부정한 자와의 접촉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이기에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위해서 사람을 살려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잃어 버리고 죽은 신앙적 전통과 문화로 인하여 결국 이웃을 외면하고 가장 중요한 자비를 행해야 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사마리아 사람이 행한 자비는 차고 넘칩니다. 차별도, 외면도, 전통도 다른 이유들도 그의 자비를 지체하지 않고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왼뺨을 치는 자에게 오른 뺨도 대고,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리를 가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는 맘입니다. 자신의 것을 챙기고 남는 것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절실하고 부족하지만 그것을 떼어 목숨을 나누는 것과 같은 나눔이 자비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는것을 넘어서 이후로 예상되는 필요까지 챙겨서 희생을 나누는 자비입니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누구보다 차별과 배제의 아픔을 당한 이들이지만 그는 죽어가는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 뿐 아니라 넉넉하게 차고 넘칠만큼 자신을 희생하여 자비를 베풀만큼 사랑할 줄 아는 이웃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웃을 차별했던 율법학자와 대조되는 사람입니다. 온전한 이웃 사랑의 본이 되어서 심지어 이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은 죄인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참된 자비와 사랑을 온몸으로 베풀어주신 우리 주님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영생의 길이 되신 분이십니다. 


# 38-42절 예수님은 분주함 속에서도 말씀을 듣는 일이 영생의 길이라 하십니다. 

한 마을에서 마르다라 이름하는 자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들입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분주하여 예수님께 마리아가 자신을 돕도록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는 말씀을 하시고,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고 그것은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선 문화적인 충격이 있다. 당대 음식을 만들고 집안 일을 하는 일은 당연히 여성들의 몫이라고 여기고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에 있어서는 소외된 것이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르다의 당연한 요청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행위에 대해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잃어버리지 않는 좋은 편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을 깨뜨리시는 일입니다. 

본 사건은 보통 교회에서의 봉사와 예배 혹은 말씀을 듣는 일이나 교제에 대해 그 중요성에 대한 논쟁에 많이 다뤄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나누기도 합니다. 마음이 분주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결국 우선순위에 대한 혼돈과 잘못된 욕심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으로도 해석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택한 좋은 편과 빼앗기지 않는다는 부분과 봉사로 인해 마음이 분주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보면 단순하게 참된 섬김이 무엇인가?, 무엇이 더 중요한 섬김인가? 라는 부분으로도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이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와 본 사건은 서로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문맥적으로는 이어지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사이에 있는 이 사건은 아마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중에서 앞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로 이웃사랑에 대해서 교훈해 주신 것이라면 이 사건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것을 교훈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일들 보다 가장 우선적으로 주님을 듣고 보고 순종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해야 할 일들로 몸과 마음이 분주하고 급기야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하게 되어 정작 주님을 뵙고,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멀리 떠난 자녀들이 부모를 찾아 왔을때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은 맛난 음식과 선물들이 아닙니다. 보고 싶은 얼굴을 대면하면서 못다한 얘기들을 나누며 함께 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우리가 뭔가를 해야 주님이 영생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도 주님에게 뭔가를 대접해야 사랑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당연한 의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당대 문화에서는 환대를 제대로 못하면 명예와도 연관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르다의 집을 찾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대면하여 얘기하고 나누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어떤 책임과 의무와 일들을 감당하는 것보다 대면하여 뵙고 교제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형식적인 제의 행위와 화려한 제물과 여타의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고 듣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셨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 했습니다. 그렇게 먼저 듣고 순종하는 이가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자요,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나무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야 할 일들, 감당해야 할 책임들, 하고싶은 일들로 인하여 마음이 분주하고 또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염려하고 근심하다가 보고 싶어하시는 주님을 뵙고 예배하며 묵상하고 교제하고 인도를 받는 가장 소중한 시간을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 그 일이 종교적 의무와 습관적인 행위로 변질되어 아무런 감정도 감흥도 감동도 없는 만남으로 사랑이 식어버린 것은 아닌가요? 복있는 사람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야로 그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종일토록 보고, 곁에 있어도 보고싶은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그렇게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편에서서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 거둠의 기도

우리에게 영생을 하락하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그렇게 사랑이신 하나님과

사랑하며 사랑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먼저 좋은 이웃이 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신 것처럼

내가 먼저 사랑하고

그 사랑이 참사랑으로 실천되도록 하겠습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혼돈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그 일을

온전히 잘 감당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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