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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04. 2021

누가복음 11:14-26 하나님나라의 구주(救主)이신

누가복음 11:14-26 

누가복음 11:14-26 하나님나라의 구주(救主)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축귀하자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놀라는 사람이 있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쫓아낸다하고, 하늘로서 온 표적을 보이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집이 무너진다는 것을 예로 그들의 이치가 맞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들 중에도 축귀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면서, 축귀는 하나님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하나님나라의 편에 서지 않으면 결국 나중 형편이 더 심한 압제 속에 거하게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 14-16절 예수님은 우리를 귀신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 내어 한 사람의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도록  치료해주셨습니다. 무리들의 반응은 놀랍게 여긴 이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축귀한다고 하는 이들로 나뉩니다. 또 예수님을 시험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분별력은 믿음과 지혜와 지식이 필요합니다. 사람과 사건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그것에 대한 믿음과, 사전 지식과, 이해도에 따라서 달리 해석됩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행하신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 하나님을 아는 지혜, 그리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사를 아는 지식등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그에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는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지혜와 지식이 없이 불신과 어리석음과 무지로 산다면 결국 놀라기만 할 뿐 믿음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고, 심지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고, 자신들도 잘 알지 못하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축귀하는 것이라고 불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는 것도,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과 사건들을 바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 곧 믿음과 지혜와 지식이 온전하게 세워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바르게 해석하거나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하고 의심하고 불신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덧입지 못하고 여전히 구원받아 자유케 됨을 누리지도 못하고,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의 어리석음을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을 받기를 간구합니다(11:13). 성령님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하여 영적 분별력을 갖고 바로보고 말하고 행동하며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17-20절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구원자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십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스스로 분쟁하여 말하는 것이기에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론하십니다. 또한 그들 중에서도 귀신을 쫓아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에 그들의 말대로라면 그들 또한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축귀한 것이냐고 반문하시며 그들이 재판관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축귀는 하나님의 손(능력)으로 행한 것이기에 이는 곧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불신앙과 의심이 결국 자신들의 행위마저 모순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전형적인 내로남불로서 믿음없는 패역한 세대가 보이는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오해하고, 눈과 귀가 어둡고 둔하여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잘못된 전통과 관습 위에서 거짓의 아비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해방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셔서 지금 그렇게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죄와 악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을 거역한 죄(롬 1:18-23 하나님에 대한 불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음, 우상숭배등)로 말미암아 단절된 관계의 회복이면서, 흑암의 권세(악)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이들은 이제 의인으로, 자녀로, 거룩한 나라의 백성으로, 신부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는 왕과 나라가 바뀐 것이며,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와 통치의 의미로 이해할 때 결국 하나님의 왕권을 위임받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 자체이신 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신하며 의심하는 이들을 향하여 이미 너희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했다고 하는 것은 심령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자체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그들 앞에 있고, 그런 하나님나라의 통치가 이미 시작되므로 인하여 대적하는 귀신들이 떠나고, 치유와 회복과 해방과 자유케 됨의 역사들을 통해서 증명되고 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흑암의 권세에 종노릇하던 우리를 하나님의 통치아래 살며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사랑의 능력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는 사랑과 자유를 누리지만 거역하고 불신하고 대적하는 이들에게는 그에 따른 심판과 멸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나라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로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사 하나님나라를 살고 누리게 하신 그 은혜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를 온전히 순종하며 살기 원합니다. 


# 21-26절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가 참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과의 영적 싸움을 말씀하시면서 이미 축귀의 역사등을 통해서 사단이 결박되고 패배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의 전리품처럼 인간들을 사로잡고 있었으나, 패배했기에 이제는 내어 놓을 수 밖에 없고 예수님은 그렇게 구원받은 백성들을 모으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의 편에 함께할 때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나갔던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형편이 더 심해 질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을 가치관의 변화로도 표현하고, 왕이 바뀐 것으로도 표현합니다. 삶의 이유와 목적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또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했을 때 하나님을 불신하고, 다른 우상을 왕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않던 삶에서 돌이켜 온전히 주님께 주권을 이전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영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에서 용서함 받은 것은 알고 믿고 감사한데, 정작 주권 이전과 우선순위는 바꾸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서 살아야 할 이들이 외형은 그 나라에 사는 것 같은데 정작 두 마음을 품거나 하나님께 주권을 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하나님 아닌 또 다른 주인들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두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모습이 아닙니다. 죄사함의 구원을 감사한 후에 바뀐 왕에 대한 순종이 병행 되어야하고, 왜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셨는지에 대해서도 묻고 그 뜻(사명)을 또한 따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여정을 여전히 허락하신 이유이고 또 계속 묻고 알아야 할 일입니다.

비움의 영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자기부인을 자비비움이라고도 얘기합니다. 그래서 내려 놓아야 하고 비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회개를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내려놓고 비우고 청소해서 돌아선 인간은 이제 제대로 된 것을 올려두고, 채우고 살아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권을 주님께 두고, 주의 뜻 곧 주님의 말씀으로 채우고(이것이 우리가 당연히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길이기에), 이는 성령충만과도 연결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우리의 언행심사들을 행하는 것이 선한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와 인도와 보호하심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와서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해 진 것을 위의 예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비우기만 하고 채우지 않으면 잘못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채우게 됩니다. 다른 것들을 주로 삼아 중독되어 또 다른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온전하고 선한 것으로 채워가야 할 우리 삶이 또 다시 우리를 사로잡아 자유케 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이렇게 주님을 구주(救主) 곧 구원자요 왕으로 영접하고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이는 곧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 편에 있다면 패배한 악한 귀신이 공격한다 하더라도 능히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편에 서지 않고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주님을 믿지 못하고,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다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온전한 믿음과 지혜와 지식으로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 편에서서 함께 모으는 자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 거둠의 기도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신 하나님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 충만하며

성령의 내주하심과 깨닫게하심과 순종케 하심을 따라

거룩한 주의 백성과 자녀로 

온전한 자유와 해방을 누리며

사랑의 통치에 즐거이 순종하며 

주님 편에 서서 주님과 함께 살기 원합니다. 

바로 보게 하시고, 바로 듣게 하시고

바로 깨닫게 하시고, 바로 순종케 하시며

바로 서서, 바로 걸으며

바른 길 가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미 이루신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자로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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