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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18. 2021

누가복음 15:11-32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예수

누가복음 15:11-32  

누가복음 15:11-32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예수님 2


회개는 자신이 소외된 자 곧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절박한 맘으로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소외된 자였음을 늘 기억하고, 그런 나를 주께서 은혜로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며, 그런 우리를 구원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외된 자라는 인간 실존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더욱 회개의 길은 멀어집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형제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소외된 자(세리, 죄인, 가난한 자,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압제당하는 자, 고아, 과부, 나그네, 이방인)를 찾아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하시며 그들을 위해 잔치까지 베푸시며 기뻐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잃은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계시는 주님을 향한 수군거림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 세 가지 비유 중에서 앞의 두 가지 비유(15:1-10)에서 보여준 주님은 잃은 자를 찾으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으로 소개했습니다(15장의 세 가지 비유는 상호 긴밀하게 연결, 점층, 보완적인 비유입니다). 

세 번째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역시 잃은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유비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큰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다시금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과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11-16절 우리는 주님 앞에 스스로 소외된 자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자유케 하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거하길 원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각기 제 길로 가서(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은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분깃을 요구한 무례한 자였고, 또한 그것을 매매해서는 안되는데도 팔아 재물을 모아 먼나라로 가서 탕진하고 모든 것이 다 없어진 후에야 자신의 궁핍한 실존을 깨닫게 됩니다. 급기야 돼지를 치는 부정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떠난 우리의 실존은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쓰고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궁핍한 자요 부정한 자요 아무도 돌볼 자가 없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수 없는 소외된 자였고, 소외된 자임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17-19절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어야 비로소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들은 한계에 봉착한 현실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세례 요한도 주님도 모두 회개하라 명하셨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한계에 봉착해서 자신의 소유와 다른 무엇으로도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고 살아 있으나 죽은 인생과도 같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돌아가서 품꾼의 하나로라도 영접해 주시길 바라면서 돌아갑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두 손 들고 아버지께 나아간 것입니다.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어야만, 주님이 허락지 않으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는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두 손 들고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러나 가장 절박한 일은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 20-24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지 알아야 합니다. 

과거를 묻지 아니하고 돌아온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미리 알아보고 달려가서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추어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아들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좋은 옷, 가락지, 신을 신기고(모두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상징) 역시 잃은 양과 드라크마의 여주인처럼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을 대접합니다. 그래서 잃은 영과 드라크마를 찾은 목자와 여인처럼 함께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회개하며 돌아온 우리를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지만 분명 예수님은 그렇게 나를 찾아 구원하시며 기뻐하신 것입니다. 


# 25-30절 우리는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서 그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한 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열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큰 아들은 오히려 아버지에게 큰 무례를 범하고 맙니다. 

제일 먼저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까지 초청한 잔치에서 이와 같은 아들의 행동은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로서, 명예의 문화권에서는 참으로 무례한 행동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초청을 거절하고 밭에 있다고 돌아옵니다. 왕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거절했던 이들과 같습니다. 밭에서 돌아와서도 들어가지도 않고 노하면서 완고한 태도를 보이므로 종 앞에서 다시한번 아버지의 권위를 무너뜨립니다. 

둘째 아버지를 향해 시작한 말이 ‘이보시오!’라는 표현을 통해 아버지를 부르지 않는 무례를 범합니다. 또한 동생을 향하여서도 ‘이 아들’이라는 말로 인정하지 않는 무례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상식과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행동, 그리고 자신의 기준으로 허용하거나 인정할 수 없는 동생을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표현으로 거부하면서 무례를 범한 것입니다. 

셋째 29-30절에서 아버지의 권함에 대한 응답에 ‘내가’라는 말을 통해서 그는 아버지의 뜻과 주권과 권위가 중심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되는 기준을 가지고 살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또한 무례를 범합니다. 

첫째 아들은 15장 초두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신학과 기주 안에 갖혀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하고 오히려 정죄하며 마침내 거부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 소외된 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무지로 인함 때문입니다. 

오늘 나도 누군가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리가 아닌 여전히 주님앞에 소외된 자였다가 구원받은 자임을 기억하며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향해 감사하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뜻을 따라 소외된 이들을 향해 겸손히 인애를 행하는 것이 마땅한 바라는 것을 되새깁니다. 


# 31-32절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누림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의 것을 다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대리 통치자,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이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에게 허락하신 특권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소유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허락하신 것들을 그분의. 뜻대로 다스리며 사용하고 누리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다만 참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늘 기억하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그 사실을 모른채 종이 아니면서 종처럼 기쁨을 누리지 못한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향해 이 사실을 주지 시키고, 동생도 ‘네 동생’이라 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동생은 죽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이라는 사실을 상기 시키면서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말합니다. 죄인들과 소외된 자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천국의 가족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못마땅해 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을 향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원수도 사랑하라 하신데까지 생각해 보면 사람은 미움도 경배도 통치의 대상도 아닌 사랑의 대상임을 다시 확인합니다. 주님이 소외된 죄인된 나를 사랑하셨다면 소외된 이웃 또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우리. 또한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줄 믿습니다. 


# 거둠의 기도 

늘 가르치는 자의 자리에서 

말하고 설교하고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 내가 소외된 자였음을 망각하고 

주님의 자리에 서는 무례를 범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실존을 깨닫고 

이 하루도 허랑방탕하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 아니하며,

나의 실존이 소외된 자였음을 기억하고, 

그런 나를 간절히 기다리시며

마침내 먼저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 앞에 감사하고,

주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온전히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 저도 소외된 자였지만 

구원받아 천국 백성되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하면서 

겸손히 부르심 가운데 허락하신 것들을 누리며, 

소외된 이웃을 향한 긍휼과 인애를 

잊지 않는 삶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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