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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19. 2021

누가복음 16:01-13 하나님께 충성된 자가 되라하신

누가복음 16:01-13 

누가복음 16:01-13 하나님께 충성된 자가 되라하신 예수님


재물에 대한 불의함은 어떤 형태로든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

이 구절은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8절의 ‘옳지 않은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함 때문인가? 빚을 탕감함에 대한 평가인가?

둘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는 부분이 과연 그리스도인도 그렇게 하라는 이야기인가?(8절)

셋째,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재물이 없어질 때 그 친구들이 영주할 처소(?)로 영접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넷째, 11절의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상의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문맥을 살펴보면 16장은 전체적으로 재물과 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위험들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모두 부정적인 축제나 소유를 가진 이들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가 없기에 부자된 자체를 모두 부정적으로 볼수 없습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소유는 한정된 자원에서 다른 누군가는 결핍으로 다가 오기에 축적 이전에 나눠야 하는데 이들은 계속 축적하고 나누지 않기 때문에 이를 탐욕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 부자들은 제자들과 대조적인 이들이며 이들의 행동과 생각은 결코 따라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삶의 자세라는 것을 알고 접근해야 합니다. 

*

한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도 또한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 이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주인에게 들려 직무를 셈한다는 통보를 받고 해고될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청지기가 취한 태도가 채무자들의 빚을 임의로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에 대해서 ‘옳지 않은 청지기’(8절)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1절에서 언급된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 부분에 대한 평가로 보입니다. 그런데 ‘일’을 지혜 있게 했다고 칭찬하는데 이는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결국 주인의 돈은 손해를 봤어도 명예를 높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세상 사람들’은 나름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빛의 아들들(그리스도인)보다 더 지혜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8절이 비유의 결론이라면 오해가 생깁니다. 그래서 9절까지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9절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재물이 없어질 때 친구들이 ‘영주할 처소’로 영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만 떼어서 보면 대번에 (구원과 영생을 얻는 길의)교리적으로도 이해가 안되고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도덕적으로도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신 말씀이기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뒤에 나오는 10절에서 불의함을 책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데 이 친구들이 소외된 자 곧 가난한 자라고 하기에는 그들이 빌려간 것이 상당히 큰 액면가로 보입니다(기름 백 말, 밀 백 석 - 이자가 늘어서일 수도 있으나). 그래서 이 친구들은 결국 불의한 재물로 사귄 불의한 친구일 뿐입니다. 그런 이들이 재물이 없어질 때 영주할 처소로 영접한다는 것은 불의한 이들에게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15장에 나온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보통은 배반하는 일이 보편적입니다(이러한 연결은 개인적인 추론입니다).

결국 이 부자와 불의한 청지기를 지혜롭다 칭찬하는 일은 ‘재물’을 섬기고 자신의 명예를 중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그렇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이어서 등장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권면은 정 반대의 태도를 말씀 하시기 때문입니다(3절의 청지기의 생각과 모습에서도 게으른 자의 약삭빠른 행동으로 보이기에 그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의 ‘불의한 청지기’도 저렇게 지혜롭게 셈할 날(종말)을 준비하거늘, 하나님 나라의 ‘선한 청지기’인 너희들는 더더욱 그래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의미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10절에서 주님은 먼저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 곧 ‘신실’해야 하고, ‘불의’하면 곧 ‘신실’하지 못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앞의 비유에 나온 부자와 청지기도 다 작은 것과 큰 것에 불의한 이들로 평가됩니다. 

11절의 ‘‘불의한 재물’은 세상의 재물을 말하며 세상에서 재물에 대해서 신실하지 못하면 결코 참된 것(복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을 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세상에서도 특히 재물에 관해서는 더더욱 신실해야 합니다. 12절의 ‘남의 것’도 역시 재물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11절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절은 1-12절의 비유와 가르침의 결론에 해당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하여 불의함은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 탐욕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런 불의함을 가진 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히 여긴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주님은 재물의 노예가 된 이들이 그것을 섬기며 나름의 살 방도를 마련하지만 모두다 헛된 일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은 투명하게 쓰고 신실하며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 거둠의 기도

주님 

지극히 작은 재물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재물의 노예 되지 않고,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중히 여기며 

선한 청지기로 지혜롭게 하옵소서.   


    지금 나는 재물 사용에 있어 작은 것에든 큰 것에든 깨끗한가? 정직한가? 투명한가? 신실한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 앞에서 과연 무엇을 더 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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