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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05. 2022

요한복음 11:17-27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 11:17-27  

요한복음 11:17-27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 만에 베다니에 방문하여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를 만나 오라비가 살아날 것과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선포하시고 마르다를 위로하십니다. 이에 마르다는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과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 17-19절 예수님은 우리 삶이 고통과 눈물로 얼룩져 위로가 필요한 인생임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라는 언급과 그곳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위로 조문을 왔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고, 베다니라는 지명,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위문하로 온 사실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그곳에는 큰 슬픔과 상심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와보신 베다니 나사로의 집은 모든 소망이 끊긴 상태입니다.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의 시간은 이미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며, ‘평화의 집’이라는 ‘예루살렘’에 가깝지만 ‘베다니’는 ‘고통과 빈민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곳으로 상대적으로 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위문하러 온 이들이 많을 수록 그 절망은 더욱 확실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공간에 주님이 오셨고, 보셨으니 이제 주님이 일하실 시간입니다. 

우리 삶에도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 현실을 고스란히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죽음은 그렇게 우리의 모든 희망이 멈춰버린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환경에 있다고 하여 그런 절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문하여 온다 할지라도 공허할 뿐입니다. 오랜 시간 그런 아픔들을 고스란히 안아야 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 20-22절 주님을 아는 믿는만큼 의뢰하는 간구의 제목은 달라집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곧 나아가 맞이하며, 주님의 부재가 아니었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아쉬워하면서, 이제라도 주님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면 이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르다는 치유하시는 주님은 알았으나, 죽은 이를 살리실 수 있는 부활이요 생명되신 주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오라비를 살려 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에둘러 의뢰합니다. 이는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아직 하나되지 못한 부족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대로 이루어 주실 줄 안다고 말하긴 하지만 신뢰가 담긴 말이기보다는 자포자기적인 뉘앙스가 더 강합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믿는 만큼만 주님께 구할 수 있고 의뢰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기도를 통해 누리는 위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지혜와 능력과 섭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뛰어넘는 분이심을 온전히 알고 믿을 때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간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간구가 무엇인지 돌아보면 우리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의 분량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23-24절 삶의 변혁과 결단 그리고 행동하지 않는 신앙 고백은 진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라비가 다시 살아 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줄 안다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간 많은 이들을 치유하는 역사적인 현장을 경험하긴 했지만 죽은 이가 살아나는 것은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죽은지 4일이나 지나 무덤에 있는 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얘기를 서슴없이 선언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통상적인 위로의 말씀 정도로 듣고 있습니다. 지금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는 말씀을 습관적으로 대하며 자포자기하듯 역사 없는 앎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상적인 위로의 말로만 들었을 뿐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 우리 삶을 변혁 시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그런 삶의 기대 없이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 신앙을 진부하게 하고 퇴보와 고착으로 귀결 시킵니다. 그래서 매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고 있으면서도 그 성경이 우리를 빚고 읽고 살리는 것에 대한 믿음은 마르다의 수준을 벗어나진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우리의 상식과 이성과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내게는 그런 일은 없을거야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어느 것 하나 우리가 생각한 것들 이상으로 그리고 매일 우리는 기적을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묵상은 그런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기고 오늘을 바라보며 다시 주님이 살리실 일을 기대하고 나아가게 하는 그 능력을 덧입는 다시 사는 시간임을 믿습니다. 


# 25-27절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며,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부활하실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직설법으로 ‘나는 부활이라’ 말씀하십니다. 죽음의 지배는 끝이 났고 지금 생명과 부활과 살림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며, 생명을 주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이것을 인정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이 우리 삶이 끝난 후의 가상현실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실제 현실이 되는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지배가 끝난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하고 극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이제 다시 회복시키고 연결하고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이고 부활이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죽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시기에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의 고백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오늘 선 그 자리에서 부활과 생명의 삶을 실제로 누릴 수 있길 원합니다. 이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과 상응합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관념과 먼 미래의 일로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실제적 삶의 이유와 목적과 내용으로 경험되고 실현되는 신앙으로 살 수 있길 또한 원합니다. 


# 거둠의 기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부활에 대한 산 믿음과 생명의 믿음을 

오늘 우리가 선 자리에서 

실제 현실로 고백하고 살고 믿고 누리고 증거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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