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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06. 2022

요한복음 11:28-37 예수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

요한복음 11:28-37 

요한복음 11:28-37 예수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는 분이십니다. 


마르다는 주님에 대한 고백 이후 마리아를 가만히 부릅니다.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 앞에 나아간 마리아의 슬픔에 예수님도 함께 비통해 하시며 눈물 흘리십니다. 유대인들은 나사로에 대한 사랑때문이가 하고, 어떤 이는 왜 예수님이 다른 이는 고치면서 이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는가 하며 의심합니다. 


# 28-30절 슬픔 중에도 목자의 음성에 바로 반응하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마르다가 가만히 마리아를 불러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자신을 기다리시는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지금도 세미한 음성 가운데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이며, 바로 반응해야 할 때입니다. 아직 마르다의 믿음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정말 주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다면, 그래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줄을 제대로 알고 믿었다면 그는 마리아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마르다의 마음을 아시고 마리아 또한 불러 참된 위로를 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급히 일어나 가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그래도 주님을 향한 이들의 믿음이 전혀 없진 않음을 알 수 있고, 또한 그런 반응들이 이들이 성숙해 가는 생명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들어야 할 때 듣고,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고,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는 믿음이 마침내 주님을 면전에서 뵐 수 있는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설 때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반응하며, 말씀대로 일어나 나아가는 역사가 있는 묵상을 기대합니다.


# 31-32절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덤 앞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가는 줄도 모르고 위문하던 무리들은 그가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며 따라 갑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서 그 발 앞에 엎드리며 주님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호소합니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좋은 이웃들이 주는 위로도 있습니다. 하지만 온전하다 할 순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그런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현장으로 우리를 불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부르심을 듣거든 그곳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 앞에 우리의 처지를 토설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고, 주님이 우리게 주시는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무덤 앞 곧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참 생명과 위로가 있는 주님앞이 우리가 엎드려야 할 곳입니다. 절망적인 현실, 사방이 막힌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열린 하늘을 바라보며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리가 우리가 날마다 달려갈 곳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고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며, 바라보길 원하시며, 간절히 찾고 구하길 원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오직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자 되십니다 .


# 33-35절 우리의 아픈 현실에 긍휼과 눈물로 함께 아파하시며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신 앞에 와서 엎드려 우는 마리아와 그들을 위문하러 온 이들이 곡하는 것을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시면서 또 눈물을 흘리십니다. 

마리아는 되돌이킬 수 없는 현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하며 울고 있습니다. 마르다처럼 주님이 조금 더 일찍 오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살았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에서도 울었을 것입니다. 가장 슬플 때 그 슬픔을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줄 이가 있을 때 토설하며 오열하게 됩니다. 함께 온 유대인들은 이들의 아픈 현실을 인해 불쌍한 맘으로 울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의 전개 속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부모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들만 구성된 상태에서, 이제 한 사람 있는 오라비마저 운명을 달리한다면 그들만 있어 살아갈 세상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불쌍히 여긴 듯 합니다. 이들의 슬픔에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마리아는 그에 응답합니다. 

주님의 눈물은 나사로를 사랑하시기에 흘린 눈물이며,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기에 흘린 눈물이며, 아직 자신을 제대로 알고 믿지 못하는 이들의 무지몽매함으로 인해 안타까워하시는 눈물이며, 그런 실존 가운데 있는 인류를 향해 괴로워서 흘린 눈물이며, 죽음에 대한 분노의 눈물이며, 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입니다. 주님의 눈물이 우리에겐 기쁨과 희망, 영생과 영광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대 지금 주님의 눈물을 보았는가?


# 36-37절 주님의 사랑을 직면하고도 우리의 굳어진 앎이 왜곡된 반응을 낳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통한 눈물을 보고서 무리들은 둘로 나뉩니다.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아는 사람과 왜 그를 죽게 두었느냐고 힐난하는 사람들로 말입니다. 

주님에 대한 무지는 피리 소리에도 춤추지 않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지 못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지 못합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위문하러 왔으면서도 참된 위로자를 오히려 비난하면서 정작 위로 받아야 할 이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불의와 부패와 부정으로 아파하는 많은 이들의 절규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은 자와 사랑을 바로 아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참된 위로를 전해야 할 곳을 돌아봅니다. 


# 거둠의 기도

참된 위로자 되시는 주님, 

슬픔 중에도 주님의 부르심에 속히 응답하고,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눈물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도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줄 아는

그런 가슴을 갖는 이가 되게 하옵시며

복음의 공공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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