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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04. 2022

요한복음 11:01-16 예수님은 영광 받으실 하나님의

요한복음 11:01-16  

요한복음 11:01-16 예수님은 영광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지만 예수님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하십니다. 요한은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 소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다 유대로 가자 하실 때 제자들이 말립니다. 이에 예수님은 지금 일할 때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사로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제자들을 위해 기쁜이라 하시며 가자 하시니 도마도 함께 죽으러 가자고 동행합니다. 

*

향유를 부은 마리아(12장)의 이야기와 나사로 사건,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과 흩어졌던 제자들의 일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겐 본문의 이야기에 깔린 복선과 암시들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순서대로 처음 이 말씀을 읽는 이들에게는 본문의  전개들을 납득하기가 쉽진 않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그 의미와 상징을 해석하는 일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간 진행된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사건들 위에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는 원인이 되는 사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 1-6절 예수님은 연약한 이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베다니에 살고 있고, 그의 병든 오라버니 나사로를 소개하면서 마리아가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이라고 언급합니다. 이에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방문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에 대해 말하고, 그럼에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주께 붓기 전에, 그리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이미 나사로의 누이들도 예수님께 사랑하시는 나사로라 말하고 있고, 저자 요한도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오래도록 중병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의 상태에 따라 도움을 요청하는 주체가 당시 소외받던 여인들로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부모가 보이지 않으니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부모가 없는 상태로 보입니다. 

그런 이들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소외된 자(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 등)에 대한 애정, 잃은 자를 찾으러 오시고,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 고통당하는 자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살 수 없는 이들을 향한 긍휼을 가지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그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그와 같이 주님도 부활하심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에 대한 언급들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소외된 이들, 연약한 이들을 사랑하시는 분,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 그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시므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다니’의 뜻이 히브리어로는 ‘빈민의 집’이고, 아람어로는 ‘고통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눈물의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모두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당하며 어둠가운데 있는 실존적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시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고,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주님은 그런 소외된 이들을 찾아 아버지께 인도하시므로 영광을 드러내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한없는 연민으로 세상의 고통을 부둥켜 안으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영광을 위하려, 그리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묵묵히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궁핍과 고통과 소외와 가난과 벼랑 끝에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주님은 그런 우리를 기억하시고 찾아 오시며 마침내 이 모든 끝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회복시키시며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 주님은 부요하시고,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은 하시며, 우리는 내일을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예비하고 계시고,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떤 처지에 있던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안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 7-10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틀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잡아 돌로 치려 했던 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하시는 예수님을 말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은 낮이니 빛을 보고 실족지 않고, 이제 곧 밤이 되면 실족케 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틀이나 더 유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곳과 나사로가 살고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150킬로정도). 그러니 걸어서 다니는 당시의 시간상으로 요청이 오가는 과정에서 이미 수일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아팠다는 소식에도 부구하고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가도 그의 중병을 어찌 할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들도 또한 영광 받으실 것이란 얘기 속에, 그리고 앞서 향유를 붓는 이야기 등은 나사로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틀이나 지체한 것은 이후로 결국 그가 죽어 다시 살아났을 때 죽음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을 미리 알고 게신 주님이 감수하신 시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때와 뜻을 따라 일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를 사라가시는 분이십니다. 혹자는 나사로의 죽음이 얼마 안될 때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시면, 죽지도 않은 이를 살렸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어서 이틀을 유하시고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흘이나 지났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태도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랍비’입니다. 이는 그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 되심에 대해서 믿고 있는데 제자들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 예수님을 ‘랍비’정도로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역과 방식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는 믿음없는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와 다른 행보를 진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호칭입니다. 한편으로 돌로 치려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유대 땅으로 스스로 가시겠다는 예수님을 강력하게 자신들의 생각대로 판단하여 하나님의 때를 따라 일하시는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방해하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지금은 세상에 빛이 있으니 낮이고 이 때는 일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밤에 되면 사람들은 실족할 수밖에 없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당에 생명의 빛으로 오셨기에 많은 이들이 빛되신 주님으로 인하여 다시 살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때입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부지런히 이러한 사역들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낮과 밤에 처해진 사람들을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실족하지 않도록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은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며,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족하다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복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주님이 이외에 다른 무언가(욕망)를 더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족함을 보일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가야 할 믿음의 길이 멀었습니다. 

더불어 주님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상식과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우리 주님의 시간 앞에서는 주님 뜻이 우선입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실족하지 않고 주님의 함께하심과 예비하심과 계획하심과 그 뜻을 바라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 11-16절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의 성숙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깨우러 간다고 하니 제자들은 잠들면 곧 낫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제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면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거기 있지 않은 것을 제자들을 위해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시며 이는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합니다. 

죽음을 잠으로 표현합니다. 우선 잠은 우리가 죽는 연습을 하는것과 같습니다. 아침마다 우리는 눈을 뜨면서 다시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사로의 죽음을 잠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의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사람의 생사화복이 우리 주님께 달려 있기에 우리의 매인 것을 벗어버리고 주님이 허락하신 자유 안에서 그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그곳에 있지 않은 것을 제자들을 위해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기뻐한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을 위해선느 기뻐하신다고 했을까요? 아마도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의 믿음의 성숙이 있을 것에 대한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두모라 하는 도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하는데 이 또한 온전하진 않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에 동참하자는 의미로도 읽히고, 유대인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행보일수도 있습니다. 이후에도 도마가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데, 지금 여기서는 중의적으로 디도의 개인적 고백일 수도 있고, 제자들과 교회의 보편적인 지향점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만이 온전하게 사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 거둠의 기도

영광받으신 하나님 아버지

연약한 중에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가장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되

소외되고 버림받고 연약한 우리네 삶의 자리에

세밀하게 역사하시고 함께하시고 인도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고통을 기억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따라 회복과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그러면서도 더욱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은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도 그 영광을 회복하고 유지하고 나눌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바르게 알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우선으로 이루게 하옵소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을 따라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우리도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매일 주님과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를 지고

따를 수 있는 믿음도 주옵소서. 

그래서 주님께 영광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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