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09. 2022

요한복음 12:01-11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의 날을

요한복음 12:01-11 

요한복음 12:01-11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의 날을 준비하십니다


유월절 엿새전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잔치가 있고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가룟 유다의 반응과 무리들의 반응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 1-2절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삶이 잔치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일주일 남았습니다. 이 일주일의 시간동안 예수님의 정체성이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베다니 곧 고통과 눈물의 땅이 생명과 빛되신 주님께서 살리시는 일로 말미암아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마르다는 여전히 일하고 나사로는 예수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대접을 위해서 일하는 마르다, 살려주신 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있는 나사로 모두 이전에 경험한 놀라운 표적을 통해서 주님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삶에 함께 하시면 우리 삶은 축제가 됩니다. 감사는 대접을 통해서도 드려지고, 주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일들로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함께하심만으로 내 삶이 축제인지, 그리고 그런 생명의 삶을 허락하신 주님으로 만족하며 누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은혜에 합당하게 감사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 3절 사랑은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값진 향유를 한꺼번에 쏟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습니다. 이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맞아 잔치를 벌이던 아버지처럼, 마리아는 오라버니 나사로의 소생을 기뻐하며 그 은혜에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와 생명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결코 아깝지 아니하며 그러한 아낌없는 헌신은 향기가 되어 주께 열납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다시 살려주신 그 은혜에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은 자라야 참으로 주님을 믿는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가장 최우선 순위에 주님을 모시고 모든 소유 모든 시간의 제일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주님과의 관계와 예배와 교제에 두는 것입니다. 이 가치관의 변화가 있는 자라야 참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아직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나는 아직 주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 4-6절 신앙을 빙자한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헌신을 돈으로 환산하여 주님께 한꺼번에 드리는 것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주지 않았다고 역정을 냅니다. 요한은 그가 참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삯꾼목자처럼 도둑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메시아로 알고 따르기는 커녕 신앙을 빙자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워가는 자의 전형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마저 갈취하던 이들과 다르지 않은 이입니다. 

특히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더더욱 성도들의 헌금에 대하여 신앙의 척도로 삼으며 갈취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과 탐욕을 비전으로 둔갑시켜 거대한 건물과 은행을 배불리는 행위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에겐 주님과 가난한 이들도 보이지 않고 오직 이기적인 자신의 주린배만 보일 뿐입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필요한 우상일 뿐입니다. 


# 7-8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전한 나드를 부은 마리아의 행위를 자신의 장례를 위한 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소중한 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부은 기름은 예수님께서 기름부은 메시아, 고난받아 죽으실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행위였고, 이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주님께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일을 미리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장례를 준비하는 것을 통해서 마리아는 주님을 메시아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바로 지금 여기서 행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 곧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동시에 주님을 사랑하는 일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때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주님사랑과 이웃사랑 모두 중요한 일이기에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우선순위에 있어서 때를 분변하고 행해야 할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행하면 그제서야 온전한 사랑,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여기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때, 곳이며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곁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랑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참된 일이란 멀리서 구할 것도 없고, 각별한 때에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부족하나마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함석헌 “이제 여기 이대로”


# 9-11절 생명의 증인이 될 것인가? 죽음의 통로가 될 것인가?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나사로를 보러 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가지 죽이려 모의하고,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게 됩니다.

똑같이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정 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살려주신 나사로는 유대인들에게 생명의 증인이 되어서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오히려 죽음의 통로가 되려고 모의합니다. 어둠가운데 오랫동안 왜곡된 전통과 잘못된 신앙과 본질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표적은 다만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는 존재일 뿐입니다. 어느새 자신들이 주인의 자리에 서서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악한 농부들과 같습니다. 

지금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나라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르게 갖지 못한다면 우리도 신앙을 빙자하여 생명의 증인이 되기보다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오는데 방해물이 되거나 심지어 그들을 죽이는 일을 우리도 모르게 행할 지도 모릅니다. 생명의 증인, 축복의 통로가 되고 싶습니다. 


# 거둠의 기도

우리 삶을 축제로 만들어 주시는 주님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합당한 제물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으로 만족하지 못해 욕심의 포로가 되지 않길 원하오며

주의 은혜로 족함을 누리길 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온전한 자이길 원하오며

세상에서 생명과 축복의 통로이게 하옵소서

매거진의 이전글 요한복음 11:47-57 예수님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