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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12. 2022

요한복음 12:34-43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빛이

요한복음 12:34-43  

요한복음 12:34-43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빛이십니다.


많은 표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죽음에 대해 예고하시자 무리들과 유대인 그리고 관원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의아해 한다. 요한은 이것이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는 근거구절들을 언급합니다. 관리 중에서 믿는자가 있으나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므로 두려워 드러내지 못합니다. 

*

믿음은 수용이며 긍정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동안 자신이 붙잡고 있던 것들에 대한 자기부인(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게 되면 기존의 삶의 방향과 가치와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또한 믿음은 인습에 찌든 자아를 여의고 더 큰 생명을 향해 자기를 내던지는 모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인되시는 그 나라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함께 춤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결단과 모험입니다. 


# 34절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안에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들은 무리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메시아) 관과 충돌하게 되자 인자가 누구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 인자에 대해서도 자신이라고 밝히셨고, 고난받는 메시아와 왕적 메시아에 대한 예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표적과, 에고에이미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또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도 계속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눈은 정작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듣고, 예수님께서 계시 하고자 하는 부분은 제대로 보고 듣지 못했습니다. 아니 눈과 귀를 닫고 들으려 하지 않았고, 애써 자신들에게 들려지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서 부인하고 외면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바른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세워가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쌓아가는 신앙은 사상 누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을 모른다 하든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하지 않든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또는 우상처럼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더우기 이러한 신앙은 결국 금송아지를 만들어 내는 데로 전락하게 됩니다. 


# 35-36절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빛이 있는 동안에는 실족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11:9-10). 이제 무리들을 향하여서는 빛이 있는 동안에 어둠에 붙잡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둠에 붙잡히면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가는 방향과 그 끝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왜곡되고 무지한 상태로 가는 신앙은 그 끝이 무엇인지 모른채 그냥 습관처럼 끌려갑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밝히 보여주시는 빛되신 주님께 나아와 보고 듣고 배우고 수용해야 빛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요한복음 서두에서 이 빛이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급기야 빛되신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들까지 생겨 났습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신앙하던 그 주님이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어둠에 붙잡혀서 참빛을 보지 못하고 급기야 죽이려 드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숨으셨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아버지의 때를 따르기 위함입니다. 

지금 빛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어둠이 덮쳐서 영원히 사로잡힐 것입니다. 무엇에 붙들려 살고 있나요?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등불로 삼고 살아야 할 빛의 자녀인줄 믿습니다. 


# 37-41절 인간은 심연의 바닥까지 떨어진 후에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무리들이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기대와 생각과 다르기에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신이 깊어지자 마침내 애굽의 바로왕처럼 그들의 마음이 강퍅해 집니다. 주님이 그들을 눈멀고 마음을 완고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된 후라야 가까스로 깨닫는 자가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노예이기에 못보고, 왜곡된 안경을 쓰고 있기에 흐릿하고,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에 선회하기가 귀찮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부인할 만큼의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니 주의 영광을 보고 주님을 보면서도 결국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고 빛되신 주님을 영접하지도 따르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야 깨닫지 말고 지금 붙잡은 것을 내려 놓고 겸손히 주님앞에 나아가 말씀을 통해 계시된 주님을 만나고 알고 영접하며 전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직 말씀 앞에 떨리고, 말씀이 나의 양심을 찌르고, 말씀이 나를 빚는 아픔을 느낀다면 살아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내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때는 위험한 것입니다. 


# 42-43절 사람의 영광을 구할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것인가?

관리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하고 출교를 두려워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합니다. 요한은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왕이 바뀌는 것이고,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라가 바뀌고 모든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결국 세상과는 정 반대로 역류하는 인생이 됩니다. 그만큼 내려놓고 버리고 끊어야 할 것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밥줄이고 오래도록 쌓은 지위이고, 쌓은 것이 많고 높고 클 수록 더욱 내려 놓기는 힘든 법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오래지 않아 썩어 없어질 영광인데, 우리는 그것들을 붙잡다가 정작 영원한 영광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갖고 있습니다. 한치 앞도 못보는데도 불구하고 그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인도를 신뢰하지 못하고 썩은 동아줄을 붙잡는 인생입니다. 

인식이 모두다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식이 넘지 못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빛되신 주님, 진리되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의 결단과 모험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의 나라에 영원한 영광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 비애를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데...


# 거둠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미 허락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 주님을 바르게 알아가고

인식된 그 지식에 자기부인을 통해 온전히 영접하고 수용하여서

내 눈을 열어 주의 영광을 보게 하옵시며, 

빛의 자녀로 온전히 살아갈 믿음 주시옵소서.

세상의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을 경외하는 믿음도 주시옵소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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