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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Dec 16. 2016

희생양과 영웅

쉴만한 물가

20141214 - 희생양과 영웅


글과 삶으로 지혜를 전하는 선배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낚시와 사냥 좋아하는 사람은 되도록 가까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의외로 주변에 많을 터인데 왜 그럴까? 했다. 강태공의 유유자적과 세상을 배우는 지혜가 그 오랜 기다림에서 나오고, 많은 영웅들이 강태공 시절을 거쳐서 등용될 정도로 낚시의 도(道)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의아해했다. 또한 사극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왕들의 사냥은 어떤 용맹함과 생각의 전환에서 잠시 현실을 벗어나는 그런 시간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업무의 스트레스를 풀기에 적절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낚시에서 바다와 강변의 풍경 속에서 힐링을 하기보다는 ‘손 맛’이라는 표현하는 그 쾌감을 즐긴다는 것이다. 사냥하는 이들도 산과 숲의 정경에서 힐링도 하겠지만 결국엔 활과 총으로 어떤 동물을 맞추는 그 쾌감을 즐긴다. 둘 다 죽어가는 이의 그 퍼덕임을 즐기며 쾌감을 느끼는 데 그런 마음이 일상화되면 해소보다는 전이되어 어느새 다른 이의 아픔에 무디어질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이 부분에서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기분이었다). 극단적으로 일반화하고 여러 변명의 여지는 있으나 생각해보면 생업이 아닌 취미생활에서 뭔가를 희생시키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즐기는 일임은 부인할 수 없다. 


영웅이 되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말과 무기로 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이들이 있다. 특히나 전쟁의 상황에는 늘 이 딜레마에 대하여 살인과 희생을 정당화하며 엄청난  죽임을 자행한다. 적과 대치하는 직접적인 현장에 있는 사병과 멀리서 지휘하는 이들과 그런 이들을 파병하는 정치 지도자와 국민은 비록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진 않았으나 결국은 암묵적으로 그 살인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이들의 희생이 있기에 지금 당신이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고상한 척하지 말라 당신도 살인자다 하는 말로 다른 이의 죽음은 결국 누군가를 살리는 결과를 낳기에 정당하다 애써 자인한다. 허나 사람의 목숨 값을 누가 정하는가? 누구의 목숨이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하다고 그렇게 죽어 마땅하다 생각하는가?


인터넷의 발달은 정보 소통의 속도를 높여주었고, 이전에 얻을 수 없는 많은 정보들을 빠르게 확산하는 효과도 생기게 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했는데, 이젠 천 리만 가는 것이 아니라 더 넓고 더 많은 양의 정보를 다양하게 확대 재생산시킨다. 그래서 선동이 더 쉬워진다. 그러다 보니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일도 쉬워지고, 그런 희생양이 생기면 퍼덕이는 그를 낚아 올려 재잘거리고 확대 재생산하며,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한다. 그러기 위해서 철저하게 그 희생양이 비난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샅샅이 뒤져서 곱씹어 드러 내야 한다. 비난의 이유가 더 크면 클수록 모두가 폭력에 대한 자각보다 비난의 정당성에 더 올인하게 되며 비윤리로 윤리를 희생시키면서도 애써 스스로를 정당화시킨다. 오래전 서양에서의 마녀사냥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재현되는 형세다. 흔히 그렇듯 이러한 희생양을 마녀 사냥하는 배후에는 반드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발생한 희생을 통해 반사이익을 얻는 개인과 집단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서 자신들의 치부와 실정 내지 문제들에 관심을 멀리하게 하여 호도하고 속이며 희생양을 통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력과 이익을 유지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난 일 년 내내 자행된 현상들이다. 얼마나 많은 희생양들이 있었는가? 대표적으로 대학생들의 오리엔테이션 장소의 건축물과 관련된 이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 종북 좌빨로 몰려진 한 정치인, 최근 땅콩 회항으로 여전히 사냥이 진행 중인 어느 여식이 그렇다. 이런 이들은 모두 하루아침에 양산된 것은 아니다. 오랜 부정과 부패 그리고 잘못된 여러 가지 실타래들이 꼬여낸 결과로 삐져나온 희생물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네들을 향한 비난의 이유가 너무도 분명해서 더더욱 그들을 희생시키는 강도의 정당성이 확보되었기에 모두가 그들을 비난하는 일에 죄책감을 애써 묻어 버리고 비난받아 마땅한 그들을 향한 비판의 강도를 더해 간다. 근본 원인은 손도 못 대고 불거진 현상만 가지고 난리다. 돌아보면 우리 모두 그런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내게 있는 그것들을 애써 감추려고 더 몸부림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배후에 있는 누군가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든지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하든 희생양을 통한 손익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그 비난의 화살이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어느 때에 우린 좀 더 지혜로워질 수 있을까? 집단의 지성은 이토록 우매한가? 그 가운데 살아가며 보이는 현상과 그 이면의 역사들을 왜 이다지도 쉬이 망각하고 마는가? 희생양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그런 이들의 희생으로 영웅이 된 수많은 이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알고 보는 것의 한계에 맞닥뜨리며 우매와 무지에 한탄한다. 한 인간으로 더불어 살고, 살리며, 함께 살아가야 할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삶이 진행된 세상을 어찌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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