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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Dec 16. 2016

지록위마(指鹿爲馬)

쉴만한 물가

20131213 - 지록위마(指鹿爲馬)


옛날 중국 진나라의 시황제가 죽자, 환관인 조고는 거짓 조서로 태자 부소를 죽게 하고, 어린 호해를 왕으로 앉혔다. 조고는 어리석고 국정에는 관심이 없는 호해를 조종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어느 날, 그는 자기편과 반대편을 가려내기로 하고,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한다. 그러자 호해는 “어째서 이것을 말이라고 합니까?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그러자 조고는 신하들에게 물어 보라 한다. 호해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러나 조고를 두려워한 신하들은 말이라고 대답했고 몇몇 신하들은 그래도 사슴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신하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 뒤로는 조고가 무서워 그가 하는 일에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孀)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다(B.C. 207). 그러나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3족이 함께 처벌되었다. 


지록위마(指鹿爲馬)는 그래서 윗사람을 농락하여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위압적으로 남에게 잘못을 밀어붙여 끝까지 속이려 할때 쓰는 말이다. 진시황제의 그 진나라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불과 15년 만에 망한다. 진나라가 왜 망했을까? 멀쩡한 사실이 뒤집어지니 나라의 기틀이 흔들린다. 백주에 사슴을 말이라 하면서 황제를 기만하고 조정을 우롱하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모친은 일제강점기와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을 고스란히 겪으셨다. 그 시절 구례와 피아골에 거하시던 모친이 겪으신 이야기 중에서 제일 난감했던 부분이 있다. 태백산맥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그려졌다. 낮에는 군인들이 와서 밤에 빨치산에 협력한 자들을 잡아가고,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낮에 군인들을 도운 사람을 재판하는 일들이다. 말한마디에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시간들을 지내신 것이다. 서로에게 조금만 앙심이 있어도 위험하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물어야 하는 그런 상황들을 지내신 것이다. 그런 세대에게 여전히 색깔논쟁은 잊고 싶은 트라우마를 자꾸 떠올리게 하는 것이기에 여전히 치가 떨리는 것이다. 


지록위마의 고사가 어찌 2,200년 전 진나라만의 이야기이겠는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태산같이 큰 일들은 안개 속에 가려지고 내일이면 잊혀질 하찮은 일들은 거대하게 포장되어 뉴스를 장식되는 세상이다. 바른 말을 하고, 버젓이 드러난 증거만으로 충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음이도, 어처구니 없게도 탄핵소추권을 가지고 있고, 국민의 신임을 얻은 국회의원이 불법을 불법이라 말한 것을 가지고 막말이 오가고 오만 잡소리와 시비로 색깔과 위상을 운운한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어느새 공포 정치와 독재로 회귀된 시국이 인터넷이든 오프라인이든 말을 하기가 두려운 그런 시기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국민이다. 그런데 정부를 비판한 것을 가지고 국가를 향한 반란이나 역도로 모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슴을 사슴이라 하고, 바른 말을 하는 이들을 막으며, 하루아침에 수 천명의 사람들을 파업한다고 해고하고, 삶의 터전을 송전탑 건설로 잃어야 하는 이들의 절규에도 아랑곳 않고 밀어부치며, 가난한 이들의 주머니를 털고, 그런 불합리를 향해 말 한 마디 하면 종북과 색깔 프레임으로 사장시키려 드는 그런 나라에 국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참으로 암울하고 추위에 맘이 더 움츠러 든다.


앞으로 더 추워지면 몸도 세상도 꽁꽁 얼어 갈 터인데 시국도 이렇게 냉기가 돌아가고 있으니 앞 날이 그리 희망적이진 않다. 그래도 그런 독재와 부정은 결국 드러나고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다만 그 역사의 오늘을 사는 우리가 외치고 일어나서  제 역할을 감당하는 자에게 만이 그 희망을 현실로 맞이할 수 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그 말씀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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