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2
<짧은 인생은 비극이지만 역사는 희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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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400년 애굽의 종살이 하던 히브리 노예들이 언제일지 모를 해방의 날을 기다리며 절망적 현실들을 막연하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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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850인의 바알선지자와 단판을 지어 이겼던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의 위협과 선전포고에 멀리 호렙산까지 도망가 바위틈에 숨어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아무도 안남고 자신만 있는 것 같다고 했을 그 맘이 어떨지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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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의 말기 친바벨론이냐 친애굽이냐 논쟁하고 있는 망조를 보며 차라리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그나마 사는 길이라고 외치다 기어이 나라가 망하고 난 후에 원하지 않는 애굽으로 끌려갔던 예레미야의 심정이 무엇이었을지 생각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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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치유와 축귀와 회복의 기적들과 메시지들을 전하고 많은 이들의 환호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했지만 오래도록 자신을 정적으로 여기며 죽이려는 기득권자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한 어리석은 민중들이 죽이라는 외침을 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오를 때 어떤 맘이었을지 생각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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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바벨론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면 다시금 다윗 시대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며 열심히 수고했던 포로 귀환민들 앞에, 여전히 강대국의 흥망성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식민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급기야 재건한 성전이 더럽혀지고 하늘은 자신들을 외면한 것같은 현실들이 오래 지속되었을 때 그들이 느꼈을 맘이 생각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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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 여기며 메시아를 따르며 여전히 로마의 치하에 있으나 곧 해방의 새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던 이들이 마침내 메시아가 허망하게 잡혀가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것을 목도하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가졌을 절망이 생각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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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드라 성에서 많은 기적과 가르침으로 많은 이들이 신격화 하는 것을 말렸으나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자신을 돌로 쳐 죽이려고 거지반 죽음에 이르렀을 바울의 맘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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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악한 횡포에 온 세상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미친 개처럼 인종청소를 강행하던 전횡을 막기는 커녕 그에 동조하는 독일 국민과 교회를 보고, 이를 막기 위해 미친 개를 죽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암살조직에 가담했다가 계획이 발각되어 감옥에 잡혀간 본회퍼의 마음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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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세계사가 아니어도 우리 근현대사에도 이러한 절망적 현실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해방 후에 친일파의 득세에 독립운동가들이 오히려 수감되는 일들 속에서도, 한국전쟁의 동족 상잔의 비극속에서도, 독재자의 오랜 집권하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의 변하지 않는 현실과 더 깊어 가는 겨울을 맞았을 때에도, 독재자의 사후에 신군부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봉기한 민중을 잠재우기 위해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에도, 이후 직선제의 개헌이 선포되기까지 의문에 횡사한 이들의 주검들이 떠오를 때에도, 국가경영을 제대로 하지 못해 IMF를 맞아 수많은 기업과 개인이 파산하고 무너져 갔을 때에도, 간신히 살린 나라와 살림을 거짓된 선동으로 온 나라가 다 망해 버린 것처럼 떠들어 윤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거짓 포장된 사기꾼을 경제통으로 세웠을 때에도, 이후 독재자의 딸을 다시 소환해서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세웠을 때에도 절망과 낙심과 두려움은 막연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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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이야기들의 한복판에 있던 이들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절망의 시간들을 오래오래 견뎌내야 했고, 어떤 이들은 기다림의 끝을 보지 못하고 비명횡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 세대 안에서도, 그리고 한 세대 이후에도 역사는 이 모든 이야기들의 결말이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마침내 해방되었고, 엘리야는 회복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으며, 엘리야는 죽었으나 그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고, 해방의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들에게 메시아가 마침내 도래했으며,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은 구세주가 되셨으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주를 만나 다시 돌아갔으며,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던 이들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주어진 사명을 위해 거침없이 로마로 향했습니다. 히틀러의 끝은 멸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의 비극도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직 진행 중인 비극도, 결말이 난 희국도 있지만 우리는 그 사이의 긴장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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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역사 속에 희극보다 비극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이의 간극은 천차만별이지만 짧은 순간이어도 그 고통과 절망은 견디기 힘들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들을 맞닥뜨려 살던 이들 중에 모르고 그러려니 하고 살던 이들, 저항했던 이들, 절망을 양산했던 이들, 이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했던 이들이 혼재했었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암울한 현실이든 득세한 권력이든 이 모든 것을 견뎌내어 여전히 살아갔던 이유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이 모든 현실을 바꾸기 위한 노력의 한계를 알고, 절대적인 힘을 소유한 이의 구원을 바란 희망,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여전히 유지하고 상속할 수 있는 능력을 자본과 정치권력으로 가능하다고 믿으며 살아간 이들의 생각이 비극과 희극이 상존하는 가운데서 버티고 누릴 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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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짧은 인생으로 보면 악인의 득세와 절망을 양산하는 이들의 전횡이 더 나아 보이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들 그것을 얻기 위해서 현실의 고통들을 아등바등 앞만 보고 타인을 밟고 올라가서 마침내 고지에 이르려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는 인생과 세상의 역사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보여줍니다. 물론 여전히 비극이 현재 진행형이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 이해할 수 없어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역사도 많지만 그럼에도 비극이 영원하진 않고 진실이 밝혀지고, 악인의 멸망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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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별로 없습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최고의 가치들을 사람들마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이 만든 것이면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그 가치를 최고로 아는 사상을 신념으로 알고 기고만장하게 살아갑니다. 그에 반해 한계를 인정하는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한계, 이해할 수 없는 현실, 그리고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접할 때,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나는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 이후의 평가가 오늘 현실을 재고하게 하고, 끝이 있음을 아는 이 곧 한계를 아는 이들은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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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변함없이 굴러가는 것 같은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는 또 우리에게 주어진 희비극의 한복판에 있는 일상들을 살아갑니다. 거기에는 각자 여전히 살아갈 이유와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인 것도 있고,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것도 있으며, 그리고 예상되는 것도 있고, 염려되는 것도 혼재합니다. 이 가운데 변하지 않는 희망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고, 이해하고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이겨내고,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을 바꾸고, 마침내 모든 것이 회복되는 그런 희년 같은 날이 오게 하는 그 힘을 가지신 분, 그 힘을 온몸을 다해 던져서 오게 하실 분이 있었고, 지금도 함께하시고 앞으로도 함께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짧은 인생을 비극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희비극의 혼재를 맛보고, 오랜 역사의 외침은 희극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지금의 절망적 현실들을 감내하고 이겨내며 비극은 엑스트라로, 희극은 주인공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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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한복판, 주일을 앞둔 평화의 길벗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