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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정립이어야 한다.

20200314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정립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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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麗末鮮初) 건국 이념으로 민본애민(民本愛民)을 정한 삼봉 정도전은 고려말의 불교의 부패와 정교일치로 인한 문제를 깊이 경험한터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통해 이를 견제하고 건국의 이념들을 바로세우고, 나라의 운영체계에 있어서도 군주 한 사람의 전횡에 의해 정국이 소용돌이치는 군주정치가 아니라, 제상들을 세워 이를 견제하는 제상정치를 병행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정부와 국회의 관계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견제하며 경영하기 위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경연을 통해 토론하며 바람직한 정책을 펼쳐 가도록 했습니다. 경연을 진행할 때 왕이나 제상이라 할지라도 깊이 연구하고 분석하지 않고, 설득력 있게 정책을 개진하지 못하면 자신들의 뜻을 제대로 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서로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통해 일해 갈 때에 그 목적과 방향이 민본애민(民本愛民)이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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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기에 나라의 모든 문제는 백성의 입장에서 풀어가야 하고, 백성을 위하고(爲民), 백성을 사랑하고(愛民), 백성을 존중하고(重民), 백성을 보호하고(保民), 백성을 기르고(牧民), 백성을 편안하게(安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 경제, 종교, 윤리등 모든 분야에 실제적으로 적용되고 구현해야야 했습니다. 백성과 국가 그리고 임금과의 관계는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라고도 했습니다. 하여 임금된 자는 하늘인 백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우리 헌법에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한 것도 같은 의미과 정신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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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좋은 취지의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근본 정신을 망각하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력을 사심과 탐욕으로 독점하거나, 힘을 더 강화하기 위해, 정당한 절차를 거친 토론과 설득이 아닌 무력과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때에는 결국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권력투쟁에 대한 피해는 힘없는 백성이 고스란히 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정쟁의 과정에서 힘없는 백성을 수족 부리듯 이용하면서 말은 백성을 위한다 하고, 국민의 뜻이라 하지만 속내는 자신을 위하고 자신의 뜻을 그렇게 착각하며 오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를 탐하는 데 혈안이 되어 모든 힘과 권력을 동원해서 정국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조선초 이방원이 정도전을 비롯한 제상들의 힘을 무력을 통해 제압한 데에는 자신들의 뜻을 펼쳐가는 것이 지지부진한 것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할 때마다 정도전이 세운 제도가 발목을 잡기에 왕권을 절대화 하기 위해서 이러한 만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래도 건국 초기의 이념들이 기초에 있었기에 왕들이 바뀌면서 왕의 노력과 능력 여하에 따라 민본애민이 실현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합니다. 패륜적인 행위마저 서슴지 않았던 많은 왕위 쟁탈전이 그러 했고, 수없이 나뉘어진 당파의 정쟁이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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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서도 이렇게 정치와 관련된 신정, 족장, 왕도, 제국주의등의 다양한 정치형태가 등장합니다. 특별히 거기에는 지도자 그룹이 있었는데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로 대표됩니다. 이 세 그룹이 세워지는 데 있어서 모두 스스로 왕이 되거나 세습되는 데 반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세습을 막은 이유가 스스로 왕이 되거나 자동적으로 왕이 계승되어서 생기는 폐단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부름을 따라 합당하게 세워지는 것이지 스스로 왕이나 제사장 또는 선지자가 되려 하면 여지없이 그런 이들은 겉으로는 왕이지만 결국엔 하늘의 뜻 곧 백성들을 애민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에 급급하다 종말이 좋지 못합니다. 제사장 또한 비록 아론의 가문에서 세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늘상 장자가 자동적으로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 중에서도 하늘의 뜻을 따라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고 그런 사람을 분별하여 세우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동 세습되거나 스스로 무력적인 방식으로 그 자리에 앉으려 하면 종국엔 부패와 타락과 변질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태생 자체의 명분이 불분명하기에 당연히 편법과 불법을 안고 세워진 후에 이를 가리기 위해 또다른 부정이 행해지고 이러한 행위들은 동조한 자들을 늘 의심하게 만들고, 그러다 보면 믿을 수 없는 관계 속에서 극단적인 사건들이 발생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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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왕과 제사장들이 바르게 정치 하고 종교 본연의 역할을 잘 관리 감독하고 하늘의 선한 뜻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서 세워진 이들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응답한 자로 세워졌고, 그런 하늘의 뜻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왕과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하늘의 뜻을 모든 것을 걸고 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선지자들의 삶은 잃을 것 없는 자라야 가감없이 전했고, 백성이나 들어야 할 이들이 제대로 듣지 않기 때문에 극단적이고 이상한 퍼포먼스 등으로 하늘의 뜻을 전했습니다. 나단선지자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으며, 요나가 그랬고 예레미야, 에스겔을 비롯하여 신약에서 세례 요한등이 그런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간 이들입니다. 이 선지자 들 중에서도 스스로 선지자가 된 이들 그래서 자신들을 통해 하늘의 뜻이 전해진다고 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결국 현실에서 권력을 가진 왕과 제사장들의 전횡을 막기는 커녕 오히려 부추기고, 그들이 원하는 일을 애써 하늘의 뜻이라고 동조하고 승인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유지하며 부패한 권력에 부역하며 살아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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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러한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하늘의 뜻을 따라 세워져야지, 스스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되려는 것은 결국 자멸하는 길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부르심을 분명하게 듣고 그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자만이 참된 지도자로 세워질 수 있었고,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또 예언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해도 역사는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뜻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전한 하늘의 뜻은 그의 최종 결과와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신 영광의 길인지 아니면 멸망과 심판의 길인지 판가름 됩니다. 이 가운데에서 선하게 쓰임 받는 이들이 있는 반면 악하게 쓰임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열매와 결말을 보면 비록 하늘의 뜻을 따라 세워졌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갈려지는 것을 통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써 지도자가 되려 하지 말아야 하고, 선생이 되려 하지 말고, 스스로 힘을 가졌다고 함부로 휘둘러도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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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지도자를 민(民)이 직접 선출합니다. 다수결에 의해서 선출되기 때문에 결국엔 국민의 수준에 맞는 이를 뽑게 됩니다. 상향 평준화되기보다는 대부분은 하양평준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국민이 성숙해 있다면 온갖 언론과 여타 권력과 부패한 이들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이를 분별할 수 있을 테지만, 성숙하지 못한 이들은 그들의 선동에 놀아나서 결국 바람직한 선택을 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뜻이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수준에 맞게 담겨 있기에 그들의 수준에 맞는 이가 세워졌다면 이를 하늘의 뜻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 백성을 선진적으로 이끌어도 깨닫지도 못하고 급기야는 역행하는 일이 다반사 입니다. 오죽하면 사람은 거두어 쓰지 말라는 속담까지 나왔을까요? 그리고 통치자인지 섬기는 일꾼인지의 여부와 상관 없이 처음부터 또는 일하는 과정 속에서 이미 분별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선악간에 쓰임받았는지의 여부가 구분됩니다. 깨어있지 못한 민중이 안타깝고, 선동에 놀아나는 모습과 앞은 커녕 현실 인식도 제대로 못하고, 역사에 대한 이해는 더더욱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모습이 안타까울지라도 그렇게 깨우는 작업들을 해도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제대로 할 성숙도가 부족하다면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에 비참하고 참당한 결과라도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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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예전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을 하는 그룹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크게는 정치와 종교 그룹 뿐 아니라 정치도 입법 사법 행정의 분야들이 각각 분립되어 있습니다. 하나하나 권력의 쏠림을 방지하고 건강하게 경영되길 바라는 뜻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니 각각의 분야에서도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국가 경영의 근본 취지를 망각하지 않고서 바르게 공정과 정도를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분야에서 주어진 권한 이상의 것을 탐하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또 이런 역할을 하는 그룹이 언론과 미디어입니다. 이 그룹은 어쩌면 국가에서 종교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그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 내적으로는 선지자 그룹과 같은 역할로 보입니다. 그래서 통치자와 정부의 각 부서들이 어떤 정책들을 바르게 이어가는지를 살펴 봐야 했으며, 국민들의 삶의 면면들을 자세히 살펴서 소외되고 왜곡된 부분은 없는지, 이를 속속들이 감시하며 백성의 입장들을 잘 살피고 소통의 통로가 되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론이 만일 권력에 빌붙어서 정권의 나팔수가 된다거나, 불의한 무리들 특히나 자본 권력등을 갖고 있는 기업의 하수인이 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에 더해 아예 자신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좌우하려 하면 이는 문제는 더 심각해 집니다. 말과 글의 파급력을 넘어서 미디어로 무한 재생되고 전달되는 특성 때문에 한번 잘못 보도된 이야기는 눈덩이처럼 의혹이든 문제든 커져서 그 폐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여론을 조작하고 선동하게 되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자신들의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의 흐름을 왜곡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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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종교도 어쩌면 이런 언론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아니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고스란히 전수하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고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 또한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 스스로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것은 왕으로서의 기능과 같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사회생활 속에서 소통과 전수 내지는 여타의 관계들이 마치 제사장의 역할처럼 존재합니다. 더불어 시민사회단체와 같이 정부든 국민이든 전문 분야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하도록 조언하고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감시하고 저항하고 고쳐가는 일등의 역할은 선지자의 역할과 유사합니다. 이러한 일을 감당함에는 당연히 종교 고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입각하여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오늘날 언론을 비롯하여 다양한 이익단체나 전문 단체들이 나름대로의 기조와 목적과 정체성을 가지고 어떤 운동이든지 역할들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목적을 잃고 이기적인 목적에 집착하게 되면 심각해집니다. 그렇게 뭉쳐진 종교 그룹들은 공동의 이익보다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뭉치고 공격하기 때문에 꼭 몸에 생긴 암적 존재와 같은 폐해를 낳기도 합니다. 어느 날엔가는 공동체를 파괴하여 공멸의 길로 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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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불교도 그랬지만, 고래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독교도 제국과 독재자들의 통치 수단에 사상적으로 이용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고 그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을 토대로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고 순종하는 구조를 독재자와 정권에 충성하는 것과 혼합하여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 이용한 것입니다. 성경도 하나님도 오해한 것이 그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정교유착된 종교는 이러한 오해와 더불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보장받기 위해 적당한 유착은 손익계산에서 이롭다 판단하여 근본 정신을 희석하고 타협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의 불안한 정통성을 맛사지 해주고, 이를 위해서 추종자들을 동원하고 맹종하게 하는 일을 병행합니다. 이렇게 야합된 힘이 강력하기에 스스로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그렇게 생겨진 힘의 정의를 따라서 자신들의 무정과 왜곡을 정당화해 버립니다. 악화일로로 치달아 공멸의 길로 가는데, 그러기 전에 누리는 권력의 단맛에 취해 끝날이 올 줄 모르고, 또는 애써 외면하면서 떨어질 줄 모르고 매달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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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나 종교와 언론이 자신들의 근본을 우선 회복해야 하는것입니다. 근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얼마 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근본 출발은 긍정적인 것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근본을 망각하거나 왜곡하거나 오랜 시간을 걸치면서 희석되거나 고착된 것을 알면서도 개혁하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변화를 거부하거나 시대의 요구와 문제를 외면하고 이기적인 목적에만 전념하고 이타와 공공의 문제는 아예 상관하지 않는다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만 하려하는 것이 더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정치나 종교나 언론이 바로 서야(正立) 합니다. 무너지긴 쉬운데 바로 세우는데는 그마만한 희생과 시간이 요구됩니다. 급조된 정책이나 근본이 설리도 만무하고 당연히 오래 지속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감각적이거나 부정적인 선동으로 상대를 무조건 짓누르고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정작 자신들이 서야 할 때에는 주춧돌이 애초에 제대로 놓여 있지 않기에 어떤 정책을 펼쳐 가더라도 사상누각같은 결과를 낳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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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가 그간 쌓아온 나라의 근본이 많은 희생과 수고를 통해 오늘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인정합니다. 문화, 외교 등에 있어서는 우리의 전통과 잇점들이 잘 발휘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치와 언론과 종교는 발전은 커녕 퇴보 수준입니다. 당쟁으로 치닫던 조선시대의 모습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형태로 여전히 진행중이고, 언론은 일제 강점기의 간사한 기생충같은 모습에서 한층 더 교활해 졌습니다. 종교는 타종교는 말할 순 없고, 기독교만 보면 신사참배를 인정한 이래로 공공성은 퇴보하고 그 어떤 무속종교보다 더한 이기적이고 기복적이며 수구 배타적인 신앙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유연성도 열린 자세도, 사회성도 부재하고, 우리만의 신학적 토착화는 진즉 그 여지를 막아 커다란 장벽을 세워서 조금이라도 그 장벽을 뚫어 보려는 이들의 시도를 여지없이 매도하여 수장시켜 버립니다. 하나님과 성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오해하고 기만하면서 추종하는 기독교인이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역사를 알고 있으면서도, 혹은 제대로 알지 못해서 성도들을 바르게 양육하지 못한 지도자들이 문제이고, 그런 전통의 흐름 가운데 있는 필자같은 목회자도 책임을 면하긴 어렵습니다. 바른 신앙이 바른 신학을 낳고, 바른 삶으로 이어져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신앙이라는 것도 이상하게 변질되어 자신들의 욕심에 맞춘 기형적 신학의 틀에 따라 성경을 읽고 신학을 갖고 있다 보니 극단적으로 배타적이며, 혐오와 배제는 기본이고, 가장 기본적인 정신을 제대로 구현해 내지 못하고 있고 그런 문제 자체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알아도 어떻게 바꾸고 고쳐야 하는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설령 그것을 시도한다고 해도 금새 매도되고 매장되어 버리기 일수여서, 제 밥그릇 지키기에 급급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해 버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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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정도, 정립을 위한 시도를 멈춰서도 안됩니다. 계기가 있을 때, 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러한 시도 자체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방법도 힘도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엉뚱한 방향으로 헛다리를 짚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적어도 살아 있다면 그래서 생명이 있다면 분명 어디로든 싹을 틔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는 이가 있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그런 동지를 얻기까지는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충분히 정리해 가면서 점검하고 논의하고 교정해 가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일치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적으도 지금은 아니라는 데 동감한다면 할 수 있는 대로, 해야 하는 일을 조금씩이라도 시도하는 것입니다. 역사속의 변혁은 언제나 그렇듯 한 두 사람의 결단과 용기로부터 출발해서 나비효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소통의 도구들이 넘쳐나고 있기에 더더욱 생각을 표현하고 모으고 만나고 펼쳐가는 일이 과거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안주하는 것은 이율배반이고 직무유기고 역사앞에 우리의 자녀손들에게 한없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계속…)


2022년3월14일

평화의길벗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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