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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Dec 21. 2016

붉은 죽

쉴만한 물가

2014122 – 붉은 죽


위키백과를 뒤적이다 보니 공교롭게도 지난 10여 년 동안 12월 19일엔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2007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이 보도, 2012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 그리고 엊그제 2014년 12월 19일엔 헌법재판소가 법무부의 청구를 받아들여 통합진보당 해산을 선고했고, 통합진보당 소속 지역구 의원 3명과 비례대표 의원 2명의 의원직도 모두 박탈했다. 지나온 10여 년의 시간은 통으로 꿰고 보니 심장마비에 걸리지 않은 것이 기적이다. 더더군다나 지난 일 년은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그랬고, 그리고 무엇보다 생 떼 같은 수많은 학생들을 차가운 물속에서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살리지 못했기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해였다. 그런 시간들을 가까스로 살아온 한 해의 끝자락에서 또다시 청천벽력 같은 선고가 뒤통수를 치며 억장이 무너지게 한다.


어떻게 이 나라는 부자들의 책임과 약자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면 진보라 하고 거기다가 억지로 색을 입혀 친북 내지 종북 좌파 빨갱이라 하고, 거기다가 십 수년 전 젊은 날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들먹여서 국민이 선출한 의원직을 박탈하고 세계 역사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자랑스러운(?) 정당해산이라는 기막힌 결정을 입법기관도 아닌 헌법재판소의 8명이서 결정하는 그런 이상한 나라인데도 민주국가라 한다. 더더군다나 문제가 된 정당의 의원에 대한 법원의 선고가 확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사상을 논하며 그가 소속된 정당 전체를 해산하는 것도 모자라 소속 의원직을 박탈한단다. 학생들이 뽑은 반장을 교사 몇 명이 자른 격이고, 동네 사람들이 뽑은 이장을 면 직원 몇 명이서 제명하는 일과도 같다. 아니 그보다 더더욱 말도 안 되는 횡포가 소위 헌법을 재판한다는 기관에서 그리고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대한민국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러고도 같은 의원들은 지독하게도 침묵하며 불똥이 튈까 봐 잔인하게 침묵하거나 방조한다. 자신들의 권리가 유린되는 것도 모른 채...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대선에서 해산 선고를 받은 정당의 대표가 대선 토론 때 지금의 대통령을 향한 공격에 대한 괘씸죄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본인이 아무리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고 상관없는 일이라 발뺌할지 몰라도 결과는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그려졌다. 그럼 나머지 정당은 안전할까? 당장 함께 연합했던 통합민주당은 이적단체와 같이 한 정당이라는 꼬리표를 획득한 것이다. 그럼 이제 언제든지 야당과 소수정당들은 해산의 빌미만 잡히면 아무 때나 해산될 수 있다.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아무 말도 못 하는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종북 프레임으로 발목을 잡고 심지어 매장당할 수 있는 정국 속에서 그것도 버젓이 전 국민이 보는 상황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지금 보고 있다. 사회당이나 공산당이 다른 선진 민주국가에는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나라는 유독 친북에는 예민하고 친일에는 온유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카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데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허나 거기에서 끝날까? 역사의 부메랑을 기억한다. 오래전 국회 선진화법이 그랬다. 그리고 다른 수많은 역사가 침 뱉은 그 우물을 다시 마시는 일이 생기고, 던진 돌이 다시 자신에게로 부메랑처럼 돌아온다는 사실을 그래서 누군가를 비판하고 비난한 그 손가락질과 화살은 반드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한다. 성경에 야곱이라는 자가 형 에서의 장자권을 붉은 죽 한 그릇에 산 후로 그의 전 인생은 험난한 세월을 살게 된다. 그가 친 사기는 삼촌과 자식들로부터 속임을 당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의 인생이 굴곡진 인생으로 점철되게 한다. 평생 붉은 죽으로 형을 속여 장자권을 산 자라는 꼬리표는 떼어지지 않은 채로, 붉은색 기피 증후군이나 붉은색 공포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처럼 산 것이다. 정작 붉은 팥죽으로 액운을 물리치려는 동짓날에 붉은색으로 인한 아픔 때문에 새알이 목에 걸릴 듯하다.


내내 <쉴만한 물가>로 독자들에게 쉼과 위로와 소망의 글들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안타까운 마음들을 더 고민케 하며 오히려 더 근심케 한 것 같다. 세밑에 훈훈한 소식으로 소망을 품어야 할 시간에 또다시 다가올 새해가 더 두렵게 여겨질 그런 일들을 맞닥뜨리고 보니 더더욱 안주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게 되어도 이런 부담스러운 글을 나누게 된다. “자유란 국가나 권력자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각자의 노력에 의해 매일 새롭게 쟁취되어야 하는 것”(까뮈)이라는데 ‘함께 한다는 것’은 함께 짐을 지는 것이지 다른 이의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어 편승하는 이기적 구호가 아니다. 역사 가운데 언제고 살기 좋았던 적이 있었던가? 늘 다사다난했고 파란만장했으며 일도많고 탈도 많은 날들의 연속이 세상사요 인생사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몸부림과 투쟁, 그것이 민주화이든 다른 무엇이든 치러진 대가 없이는 결코 얻어지는 것도 없으며, 오늘 뿌린 만큼 거두고, 마찬가지로 오늘 비민주적 행태와 역사를 역행하는 비열한 처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의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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