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화의길벗 라종렬 Dec 29. 2016

소외된 인간

쉴만한 물가 - 183호

20151231 - 소외된 인간


인간과 인생의 실존을 표현하는 말이 참 많다. 그중에서 구약성경에는 인생을 ‘고아, 과부, 나그네, 이방인’으로 표현한다. 이 표현만큼 인간 실존에 있어서 사회적이며 철학적인 표현이 또 있을까? 신약성경에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장애를 가진 자, 귀신 들린 자, 억눌린 자’등으로 표현한다. 구약의 표현보다 좀 더 개인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리고 훨씬 더 절망적이기도 하다. 이 모든 자들을 통틀어 한마디로 표현하면 ‘소외된 자’라고 할 수 있다. 


선민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시며 수차례 강조하시는 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을 잘 돌보고 대접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실존과 정체성이 그들과 같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민이 되기 전 자신들의 처지를 늘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지금 누리는 복락이 얼마나 귀한 지를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고아는 누군가 돌봐 주지 않으면 살기가 힘들다. 부모를 만나든 돌봐줄 사람을 만나든지 해야 살 수 있다. 그래야 먹는 것도 안식하는 것도 그리고 궁극적인 생존마저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뭔가를 다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혼자서만 살아갈 수도 없다. 돌이켜보면 인간은 고아와 같은 존재다. 그래서 고독하면 몸서리를 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과부와도 같다. 지금이야 여자 혼자 사는 일이 훨씬 더 자유롭고 경제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경우들이 많지만 고대 세계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았다. 상속의 문제로부터 여타 모든 보호장치가 남편의 유고로 상실되고 만다. 그래서 재혼하지 않는 한은 살아갈 길이 막막한 것이 바로 과부이다. 그에게 돌봐줄 이가 나타나야 정상적인 인간의 기본적인 삶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계대 결혼이나 고엘 제도 같은 보완 장치를 통해서 이러한 과부들을 보호하도록 하고, 정부를 통해서도 이들을 돕도록 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노랫말도 있다. 갈바를 알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을 향해, 무엇을 위해, 왜 사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그래서 그 끝이 어디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이 나그네 인생이다. 그런 이들에게 고향을 찾아주고, 살아갈 이유를 찾게 해주는 일은 참으로 소중하다. 그런 나그네들을 잘 대접하는 문화가 세계적으로 잘 분포되어 있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나그네와 같다는 부분에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이들을 잘 수용하는 것이 복을 받는 일이라고까지 생각하니 나그네라는 삶이 풍족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가장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여정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나그네는 길을 나서야 한다. 인생이 어디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아는 일이 나그네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일이다. 


인생은 이방인이다. 그래서 외인(外人)이다. 택한 자가 아니라 소외된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으로 맴돌아야 하는, 택함 받지 못한 자 같은 삶을 산다. 극소수만 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방인처럼, 손님처럼, 외인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주변인, 대로 소속을 스스로 거부하고 공동체를 이탈하는 이도 이방인이다. 도시화되어갈수록 우리는 모두 익명의 사람들에게 그저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서로 상관도 관심도 도움과 소통도 교류도 없는 인생이 이방인 인생이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장애를 가진 자, 귀신 들린 자, 억눌린 자’들은 또 어떤가? 이들 역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하고,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하며, 누군가의 손길과 관심이 없다면 기본적인 인권을 지킬 수 없을뿐더러 생명까지도 위협받는다. 그리고 도움은 한 두 푼으로, 한두 시간 만으로, 한 두 번의 관심 만으로는 턱도 없다. 오래도록 물심양면의 관심과 실제적 도움이 있어야만 생존도 인권도 삶도 가능한 이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 지에 따라 인간이든 공동체든 국가든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자들이 더 많아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도, 지금 그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을 돕는 일도 모두 한 개인이 다 감당할 수 없고 사회와 공동체와 국가가 함께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이렇게 소외된 자들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요구되는 때다. 주위에 소외된 자들을 만나거든 그들의 실존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과, 그들의 실종은 곧 자신의 실종임을 기억하여 마땅히 공존공영하는 길로 가야 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망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