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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r 22. 2021

황금기를 누리던 포르투갈은 왜 쇠락했을까?

신항로 개척 이후 포르투갈 역사(16~19세기)

한 나라가 쇠락하는 데는 국내외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포르투갈의 영광이 사그라든 이유도 하나로 정의되지는 않는다. 1480년대부터 100년 간 ‘황금기’를 누렸던 포르투갈은 우선 식민지의 자원과 해상무역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국내 경제는 농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농촌의 많은 이들은 선원이나 군인이 돼 배를 타고 떠났기에 기본 경제활동인 농업조차 휘청거렸다. 곡물 생산이 부족해 많은 양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겉은 화려하지만 알맹이는 없는 속 빈 강정처럼 국내 경제기반은 점점 약해졌다.


더군다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 네덜란드 등도 적극적으로 해상 무역과 식민지 정복에 뛰어들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나라가 세계를 무대로 펼치던 쟁탈전의 독점권이 깨졌다.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포르투갈은 기존 식민지를 지키고자 많은 국력과 비용을 소모했다. 자신들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왔던 일들이 점차 발목을 잡는 일로 변해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포르투갈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스페인의 지배를 막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독점을 누리던 초기 개척 시대만큼의 지위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잘 나가던 포르투갈이 갑자기 스페인의 지배에 놓였다니 의아했다. 후손이 없던 젊은 왕의 죽음이 포르투갈-스페인 합병의 발단이었다. 1578년 모로코 정벌에 나선 포르투갈의 열여섯 번째 왕인 세바스티앙은 스물네 살 젊은 나이로 북아프리카 알카세르-키비르 Alcácer-Quibir 전투에서 전사했다. 외아들인 젊은 왕은 결혼하지 않았고 후손도 물론 남기지 않았다. 세바스티앙의 할아버지인 주앙 3세의 동생(세바스티앙의 작은 할아버지)이자 추기경인 엔히크가 왕위에 올랐으나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추기경 엔히크는 성직자이기에 자식이 없었다. 결국 1580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주앙 3세의 사위이자 처조카)가 왕위계승전쟁에서 승리하며 포르투갈 필리프 1세로 즉위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이자 포르투갈의 필리프 1세는 포르투갈의 자치권을 보장했고, 기존 화폐도 유지하며 모든 공식 문서도 포르투갈어로 작성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왕만 같은 개별 독립 왕국이었다. 그런데 다음 왕인 펠리페 3세(포르투갈 필리프 2세), 펠리페 4세(포르투갈 필리스 3세)로 넘어가면서 약속은 흐지부지 되었다. 무엇보다 스페인이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과 벌이던 전쟁에 포르투갈인을 강제로 동원했다. 전쟁 비용을 충당하고자 포르투갈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니 포르투갈인들의 원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게다가 흑사병을 비롯한 각종 전염병이 돌았고, 농사까지 흉년이라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1640년 포르투갈은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에 독립을 했다. 스페인은 당시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고, 카탈루냐 지방의 독립운동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느라 포르투갈로 대규모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같은 시기 독립을 도모했던 카탈루냐는 꿈을 이루지 못했고 아직도 스페인의 일부로 남아있으니 역사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1640년 동 주앙 4세의 포르투갈 왕정 복고 선언


스페인이 포르투갈 독립을 단번에 인정할 리는 없었다. 포르투갈의 독립운동 쿠데타 이후 스페인과 벌인 전쟁은 1668년에야 끝났고, 두 나라 모두 많은 국력을 소모했다. 쇠락해 가던 포르투갈은 16세기 말 식민지인 브라질에서 금과 귀금속 등 광물을 발견하면서 18세기 전반까지 유럽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호화로운 궁정 생활을 누린다. 그러다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뒤 아픔을 딛고 재건에 집중한다.




포르투갈과 우리나라를 비롯해 오늘날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은 19세기 이후의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한때 해양 강국이었던 포르투갈은 19세기 초반 급격히 쇠락하며 유럽의 주변국으로 밀려났다. 당시 포르투갈은 유럽의 패권을 주도하던 영국, 프랑스, 스페인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였다. 프랑스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적하고자 포르투갈에 스페인처럼 같은 노선에 서길 요구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영국에 휘둘리던 상황이었고, 결국 1807년 프랑스는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음…… 가끔은 소박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벌어지곤 하는데 이 시기 포르투갈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프랑스와 전면전이 무리라고 판단한 포르투갈 왕실은 수도를 식민지인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로 옮겼다. 대서양을 건넌 이례적인 천도에는 왕가를 비롯해 귀족, 관리, 수행원 등 1만 명이 넘는 인원이 포함되었다. 조상이 대대로 지켜온 터전을 버리고 아무리 식민지라지만 이역만리나 다름없는 낯선 땅으로 권력자층 모두가 옮겨 가다니 누구 발상인지 기가 막힌다. 임진왜란 때 한양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 일행에게 백성들이 ‘너 같은 것도 임금이냐’라면서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던데…… 당시 포르투갈 사람들은 상실감에 얼마나 어이없고 분노했을까.


자유주의 혁명 세력이 강력히 요구해 결국 1821년 포르투갈 왕실은 리스본으로 귀국했다. 1822년 주앙 6세는 새로 제정된 헌법에 서명했고 포르투갈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거듭난다. 한편, 브라질에 남은 장자(長子)인 페드루 Pedro 왕자는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황제에 즉위했다. 같은 포르투갈 왕국 일원으로서 남의 나라(물론, 당시에는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 왕국이었으나)에 남겨진 뒤 독립을 선언했다는 점도 황당하긴 마찬가지다. 어쨌든 브라질이 독립하자 포르투갈은 극심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19세기 포르투갈은 헌법 개정, 혁명, 쿠데타, 경제 불황, 식민지의 상실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발견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광장 바닥에는 ‘바람의 장미’라고 불리는 거대한 나침반이 그려져 있다. 그 중앙을 장식하고 있는 세계지도를 거닐며 가장 먼저 우리나라 한반도가 잘 그려져 있는지를 찾았다. 정복자가 된 기분으로 지금껏 여행했던 나라들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지도에는 과거 수많은 포르투갈인들이 목숨을 걸고 개척한 항해 경로도 배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문화와 언어, 지리와 기후, 민족과 역사 등 모든 것이 다른 나라를 강제로 식민지로 삼고, 빼앗은 자원으로 부유해진 영광의 역사…… 우리나라도 숱한 침략과 피지배국 역사를 겪어왔기에 자신들이 번영했던 시대를 상징하는 거대한 발견 기념비와 바람의 장미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늘날 물리적인 전쟁과 정복은 옛날보다는 드물지만 무역과 자본 제재 등으로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지 않은가. 세상은 더 좋아지고 우리는 점점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을 뿐, 인간 세상의 큰 틀은 500년 전과 그 이전이나 지금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지도.


포르투갈 점유 지역(빨강), 탐사 해역(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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