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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y 17. 2021

사라진 줄 알았던 열정을 되찾은 순간

박막례 할머니를 만나다!

여유로운 토요일 오전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들이켜며 배우자에게 말을 걸었다. 콘텐츠 산업 종사자치고는 트렌드에 둔감한 편이라 인기를 얻고 있는 최신 예능이나 유행어를 파악할 때 배우자에게 도움을 받곤 한다.


“쏭아, 박막례 할머니 알아?”

“응, 알지. 영상 몇 개 본 적 있어.”

“유명해?”

“인기 유튜버 중에 손에 꼽을걸?”

“어떤 영상을 찍는데? 심방골 주부처럼 요리하시는 건가?”


지금은 내 일상생활의 일부이지만, 이때까지 어느 유튜브 동영상도 본 적이 없었다. 배우자를 따라서 1인 크리에이터 리얼리티 예능 JTBC <랜선라이프>를 몇 번 시청한 적이 있어서, 가끔 출연하는 심방골 주부를 알고 있었다. 할머니라는 단어를 듣고 박막례 할머니 채널도 으레 요리 콘텐츠려니 넘겨짚었다.


“요리도 하지. 그런데 결이 달라. 메이크업도 하고 스카이캐슬 같은 드라마도 따라 해. 코미디 쪽이라고 해야 하나? 감동도 있고.”


오히려 배우자의 대답에 혼란만 더해졌다. 대체 박막례 할머니는 어떤 분이지?’라는 호기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 배우자도 알고 있을 정도면 박막례 할머니는 분명 유명한 분이었다. 출간 예정 도서 목록에서 본 ‘인생은 박막례처럼(가제)’이란 인기 유튜버의 에세이 마케팅 담당을 자원할지 고민에 빠졌다. 박막례 할머니 정도의 막강한 팬덤을 보유한 사람의 누구나 공감할 만한 솔직한 사연을 엮은 책이라면 무조건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야’ 한다. 업무 하나하나에 품이 많이 들고 부서 내, 부서 간, 거래처와 소통량도 무한대로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많은 구독자나 팔로워를 보유한 유명 유튜버, SNS 인플루언서가 출간한 책이 반드시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온라인 서점에서 예악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팬들이 앞다퉈 구매해 하루 이틀 반짝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경우는 많다.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지만, 초반 팬덤이 입소문으로 이어져 별로 관심 없던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오래도록 사랑받는 책이 되려면, 책 콘텐츠 자체로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 유명인이 쓴 원고의 잠재력을 판단할 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글쓴이가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매력적인 글인가?’ 박막례 에세이의 원고는 단연 ‘예스! 예스! 예스!’였다.


70년 인생에서 우러나온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속이 다 시원했다. 아직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박막례 할머니의 기구한 인생사를 읽을 때는 내가 다 억울해서 눈물을 두세 번 훔쳤다. 글로 풀어낸 유튜브 영상 속에 감춰진 이야기는 이미 영상을 본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고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단순 뒷이야기가 아니라 영상과 글이라는 두 매체의 한계를 서로 잘 보완하며, 영상은 영상대로, 글은 글대로 좋았다. 무엇보다 박막례 할머니는 평범한 사람들이 소망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성실하고 착하게 하루하루 버티면 언젠가 복이 굴러들어 온다’라는 꿈을 이룬 전무후무한 주인공이다.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책 소개처럼 행운도 애초에 잘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 같은 세상이다. 그런데 막내딸이라 성의 없이 ‘막례’라고 이름 지어져 여자라는 이유로 공부 대신 집안일을 하다 남자 잘못 만나 인생이 꼬이더니 홀로 세 남매 키우고 제 밥벌이하느라 50년을 죽어라 일만 하다가 어느 날 치매 위험 진단까지 받았는데, 71세에 말도 안 되게 인생이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기업인 구글 CEO, 유튜브 CEO, 러쉬(영국 코스메틱 브랜드) CEO를 만나고 유수의 국내외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고 그녀의 유튜브 영상을 본 팬들은 댓글로 ‘할머니 사랑해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를 외친다. 손녀 유라 덕분에 처음 떠난 해외여행인 호주를 시작으로 미국, 영국, 일본, 스위스 등지를 여행하고, 멋들어진 크루즈 여행까지 간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난생처음 명품 신발도 신어 본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끝난 줄 알았는데 70년 동안 몰랐던 새롭고 놀라운 세상을 경험한다.


장년에 접어든 자식들에게 뒤늦게 어린이용 장난감인 팽이, 장난감 자동차, 마론 인형을 선물한다. 어린 자식들의 소원을 알면서도 호구지책이라 애써 외면한 과거가 늘 마음에 걸렸다. 나이 70대에 이젠 40~50대가 된 아이들의 소원을 마침내 들어주며 자식들에게도, 이 사연을 보는 시청자에게도 뭉클한 감동을 안긴다. 아니꼬운 세상 속에서 절망과 좌절에 익숙해 언제부터인가 ‘희망’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기도 남세스럽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 박막례 할머니는 어렸을 때 배운 대로 하루하루 충실히 착하게 살다 보면 어쩌면 내 인생도 활짝 피는 날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남겨주었다. ‘원래 인생은 불공평해. 살아남으려면 독해져야 해. 착하면 오히려 손해야’라는 독기를 가득 품은 각박한 마음에 ‘그래도 희망은 있다’라며 사그라져가던 불씨를 다시 지폈다. 이런 사람에게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독립하기 전까지 25년여간을 같이 살았던 우리 할머니를 떠올리며 이 책을 담당하기로 결심했다. 야근과 주말 근무, 갖은 스트레스를 각오하고 기꺼이 부딪치기로 했다. (나중에 듣기로 다른 동료들도 이 책에 눈독을 들였는데 업무를 나눌 때 내가 너무 재빠르게 자원을 해서 어쩌다 보니 기회를 놓쳤다고.) 하고 싶던 일이라도 매출 압박과 끝없는 업무량, 일정 지연과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면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물론, 억지로 떠맡은 일을 하는 스트레스와 우울함에 비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극한에 몰려 ‘내가 대체 왜 이 일을 맡는다고 했을까?’ 자책하며 포기하고 싶을 때, 미리 자신을 설득하도록 짜 놓은 사소한 내적 동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 나의 내적 주문은 ‘박막례 할머니를 어렸을 때 해 질 무렵 보채는 나를 업고 달래주시던 우리 할머니라고 생각하자. 이 책이 출간돼 널리 알려지는 일이 박막례 할머니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오신 할머니께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자’였다.


실낱같은 내적 주문에 기대 정신을 붙잡고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출간 준비 일정을 정리한 타임 테이블을 작성했다. 밤늦게 녹초가 돼 택시를 타고 귀가하고, 주말에도 판촉물 디자인에 쓰일 일러스트를 피드백했다. 집으로 퇴근한 뒤에도 각종 수정 자료를 공유받아 프로모션을 기획하는 등 정신없이 나날이 이어졌다. 마침내 최종 데이터를 제작실에 넘겼다는 편집자님의 연락이 얼마나 반갑던지. 약 일주일 뒤 사무실에 입고된 책을 받고는 ‘드디어 출간이구나. 지금까지 쏟은 노력을 선보일 시간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살짝 긴장했다.


사전 고지대로 2019년 5월 20일 오전 10시에 온라인 서점에서 예약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단숨에 실시간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일주일 판매량으로 집계하는 종합 판매 순위 1위를 거쳐 연말 주요 서점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김영하, 유시민, 임경선처럼 베스트셀러가 예상되는 유명 작가의 신간이 아닌 발굴한 기획물이 이토록 주목받는 경우는 사실 흔치 않다. 책을 직접 기획하고 작가를 섭외한 편집자는 두말할 나위 없고, 나 같은 마케팅 담당자도 평생 이런 책을 맡는 일은 한 번 있을까 말까 해서 진심으로 영광이고 행복했다. 유튜브로 책 출간 소식을 전하다가 ‘보잘것없는 내가 책을 내다니’라며 목이 메 눈물짓던 박막례 할머니를 보면서 나도 함께 감격의 눈물은 흘렸다.




책 출간 전날 드디어 저자인 박막례 할머니와 김유라 PD님을 뵈었다. 출간 전부터 기대와 주목을 한껏 받던 터라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는데 그중 내가 조율한 서점과의 인터뷰 자리였다. 좋아하는 유명 크리에이터를 만나다니 어찌나 설레던지. 할머니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인터뷰 며칠 전부터 어떤 옷을 입고 갈지 계속 고민했다. 예쁘지만 불편하고 때가 잘 타서 평소 입지 않던 하늘색 블라우스에 새하얀 스커트를 입고 힐을 신었다. 이날 할머니와 찍은 사진을 나중에 확인하니 흔들려서 초점이 나간 상태였다. 이조차 나의 벌렁거린 심장을 표현한 사진이라며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일과 사람에 치여서 점점 표정이 사라지던 시기였다. 이러다가 무기력증에 함몰되지는 않을지, 내 안에 열정이나 의욕, 설렘 같은 감정이 과연 남아있는지 답 없는 고민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일에 몰두하고 D-day에 입을 옷을 미리 준비했다. 옷을 침대에서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놓고 매일 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절실하게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생기자 의욕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내 인생은 부침개처럼 확 뒤집히진 않았지만 적어도 사라진 줄 알았던 열정은 되찾았다. 모두 ‘염병하네. 70대까지 버텨보길 잘했다.’라고 말하던 박막례 할머니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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