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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y 12. 2021

못생긴 손가락이 부끄러웠다

신체 콤플렉스 극복기

예능인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는 모델 한혜진은 학창 시절 또래와 달리 유난히 큰 키가 콤플렉스였다고. 조금이라도 작게 보이고자 어깨를 둥그렇게 말아서 움츠리고 고개를 숙여 목을 집어넣고 다녔다고 한다. 어벤져스의 블랙 위도우로 유명한 스칼렛 요한슨은 아역 배우 시절 허스키한 목소리가 여성스럽지 않다며 여러 번 퇴짜를 맞았다고. 지인 중에는 허리에 비해 큰 골반을 감추고 싶어서 어렸을 때 늘 긴치마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나는 손가락이 못생겼다. 전체적으로 뭉뚝하고 작아서 좋게 보면 ‘귀엽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운뎃손가락은 그리 포장할 수 없을 만큼 유난히 못생겼다. 손톱은 보통 세로로 길기 마련인데, 내 가운데 손톱은 세로축이 가로축보다 짧다. 가로축이 세로축보다 2배는 더 긴 정도로 넓적하고 뭉뚝하다.


‘너는 손가락이 왜 그렇게 생겼어? 이런 손톱은 처음 봐. 신기하다.’


초등학생이 된 후, 어느 날 친구의 악의 없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내 손가락이 못생겼다고 알게 되었다. 같은 어린이였던 순수한 친구는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이고, 모욕을 주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내 못생긴 손가락이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이 몇 번 더 비슷한 반응을 보인 뒤에는 너무 부끄럽고, 놀림을 받을까 봐 두려워서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남몰래 일부러 손톱을 숨겼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앞뒤에 앉은 친구와 담소를 나눌 때 내 손은 항상 책상 아래 무릎 위에 있거나, 책상 위에 올려놓을 때는 가령, 오른손 검지와 엄지로 가장 못생긴 왼손 중지를 감싸고 나머지 손가락은 약간 주먹을 쥔 상태를 유지했다.




열 살 무렵에 여느 주말처럼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사회자로 활약하던 MBC의 <우정의 무대>를 보고 있었다. 우정의 무대는 군대 예능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매주 전국의 군부대를 찾아 끼 많은 장병의 장기와 병영 생활을 보여주었다. 백미는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리운 어머니’ 코너였다.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 사진 꺼내 놓고~’로 시작하는 노래가 울려 퍼지면 장막 뒤에서 어머니가 등장한다. 마침내 어머니와 재회한 장병 아들은 힘차게 달려가 어머니를 번쩍 들어 안고 빙글빙글 돌면서 기쁜 마음을 표현했고, 다른 장병과 시청자는 뭉클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오래전이라 세세한 에피소드는 머릿속에서 지워졌지만 딱 하나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장병들의 애인(여자 친구) 서너 명이 출연했는데, 억양, 말투, 일화로 미루어 장막 뒤 사람 중 자신의 애인을 맞추면 휴가권이 주어졌다. 추측할 수 있는 단서로 ‘손’도 있었는데, 뚫린 장막 사이로 내민 손을 보고 자신의 애인이 맞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당시 남자 친구는커녕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열 살 꼬마는 ‘저기에 출연하면 내 남자 친구는 나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겠다. 내 손가락은 못생겼으니까. 길고 고운 손가락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띌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럼, 나의 애인은 손쉽게 휴가권을 거머쥘 수 있겠지. 처음으로 못생긴 손가락이 어떤 상황에서는 효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후에 내 손가락이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십 대 사춘기에 접어든 친구들은 외모와 이성에 부쩍 관심이 높아졌고, 화장을 하거나 교복을 취향대로 수선(일명, 리폼)해서 입기도 했다. 간혹, 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준다며 호의를 베풀려고 할 때는 어찌나 난감하던지. 매니큐어에 흥미가 없기도 했지만 내 손을 보고 ‘너는 손이 특이하게 생겼구나. 꼭 개구리 물갈퀴 같아. 엄청 귀엽다’라는 나름 긍정적인 반응에도 귀엽다는 말보다 개구리 같다는 소리만 귀에 꽂혔다. 때로 여성 어른이나 여성 친구에게 ‘여자애 손 같지가 않다. 투박한 게 남자 손 같다’라는 말을 들으면 길고 예쁘지 않은 내 손에 더없이 자신감이 떨어져서 더욱 꽁꽁 손을 감추었다. 그런데 과연 여성의 손이 남성보다 대체로 더 길고 예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유일하게 아빠를 제외하면 성별 구분 없이 어지간하면 다 내 손보다 예뻐서 정말로 궁금하긴 하다.




‘내 손이 예쁘지 않고 여성스럽지 않다고 애인이 싫어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손을 내보이길 꺼렸지만, ‘손가락이 못생겼다’라고 농담조로 말을 한 사람은 있더라도 같이 손깍지 끼고 정다운 데이트를 하는 데 아무런 지장은 없었다. 지금까지 네일아트 가게를 회사 동료들과 딱 한 번 가봤는데, 못생긴 손가락을 직원에게 내밀기가 망설여졌지만, 정작 직원은 별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젠 누군가 혹시라도 ‘손가락이 못생기셨네요’라고 하면 ‘아빠 닮아서 그래요.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진 거예요’라고 말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사회가 전체적으로 무례한 말을 지양하는 분위기이기도 하고, 이젠 내 손가락까지 관심 갖는 사람이 없기도 해서 아마도 앞으로 손가락 평을 들을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나도, 다른 사람도 누군가의 못생긴 손가락보다 자신에게 닥친 골치 아픈 일이 많고,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더 많다. 어릴 때는 못생긴 손가락이 감추고 싶을 만큼 중요한 문제였는데, 내 몫을 온전히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성인에게 못생긴 손가락 즈음이야 아무런 흠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애초에 흠이나 문젯거리도 아니었고. 누군가 못생겼다고, 특이하다고, 여자 같지 않고 남자 같다고 비교했을 때, 비로소 ‘내 손은 못생겼구나’라는 자각이 생겼고 부끄러웠으며 감추고 싶었으니까.


열 살 때 <우정의 무대>를 보면서 엉뚱하게 처음 못생긴 손가락의 효용을 깨달았지만, 아직 그 효용을 발휘할 만한 일이 내 일상에서 벌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가늠이 되진 않지만, 왠지 인생에서 한 번 즈음은 못 생겨서 제대로 쓰임을 발휘할 순간이 있을 것만 같다. 못생긴 손가락에 자부심이 생긴 뒤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Love Yourself.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신체 하나하나를 자각하면서 ‘손가락아, 눈동자야, 너는 참 예쁘다’, ‘오늘도 제 몫을 다해주어서 고맙다’라고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자신과 대화를 할 때 시작하는 것 같다. 한때 콤플렉스였던 한혜진의 큰 키, 스칼렛 요한슨의 허스키한 목소리, 내 지인의 큰 골반은 이젠 자기만족을 넘어서 심지어 누군가는 동경하는 매력으로 자리 잡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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